brunch

이비理非 - 옳음과 그름

나나미 켄토의 애매한 이유

by 아라베스크


주술회전 시부야사변 13화 이비 편. 나나미 켄토가 상반신의 절반을 죠고의 화공에 당해 치명상을 입은 채로 등장한다. 의식이 희미해진 상태로 혼자 시부야 역 지하를 목적 없이 걷고 있는 걸 마히토가 발견하고 나나미를 따라간다. 나나미는 승강장까지 내려가 모여있는 주령들을 맞닥뜨리고, 언젠가를 회상한다. 말레이시아…… 쿠안탄이 좋겠다고.


나나미가 죽음 직전 회상하는 쿠안탄의 정경은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풍경들이다. “평범한 해변에 집을 짓자. 사놓기만 하고 손도 대지 않은 책이 산더미다. 한 페이지씩, 지금까지 보낸 시간을 되돌리듯 넘기자. “ 이전 다곤과의 전투가 해변가였음을 생각하면 묘한 감상이다. 그리고 쿠안탄에서 바람과 물결, 평온을 즐기는 상상을 하며 현실인 지하철 승강장에서 주령들을 척살하는 나나미에게 마히토가 찾아오고, 손을 대고, 이타도리가 그곳에 도착한다. 마히토에게 죽기 직전, 학창 시절에 먼저 죽어버린 친구 하아바라를 생각하는 나나미. ”하이바라… 난 결국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도망치고… 도망쳤던 주제에 보람 같은 애매한 이유로 돌아와선…“


시부야 사변 OST 24번 트랙 애매한 이유는 피아노 소곡으로 나나미란 인물의 세월과 회환, 그리고 바람을 표현한 곡이다. 살아가며 품게 되었던 희망과 목표가 세월이 지나며 조금씩 사라져 가다가 이윽고 그것이 무엇이었던 건지 느껴지지 않을 때가 오면 좀, 지쳤다는 걸 알게 된다. 난 결국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쳐서.

보람 같은 애매한 이유. 그래서 돌아온 것이 옳았던 걸까, 잘못된 것일까. 소중했던 것이 있었던가. 그걸 잃어버린 걸까, 아님 놓지 못했던 걸까.


나나미의 죽음이 은유적인 것은 나 역시도 그런 피로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었다. 예견된 운명이 찾아오기 전까지 인간은 그런 피로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옳음과 그름 사이를 방황하고 애매한 이유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서. 무엇 하나 확실한 것도 없고 온통 모호한 결정들을 따라가면서. 그러다가 조금 지쳤을 때 나는 애매한 이유를 듣는다. 말레이시아. 쿠안틴. 해변의 풍경과 작은 집에서 오고 가는 물결 소리를 들으며 쌓아놨던 책을 한 페이지씩 읽는 내 모습을 그려가며.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버지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