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
어쩌면 고통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이 관용을 보이고 용서를 할 때 비로소 사랑은 시작된다. 영화에서 같은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청소를 하는 모습은 우리란 말에 담겨 있는 희망처럼 보이고, 내가 아파도 누리의 아픔을 느끼고 안아주는 모습에 아픔이란 건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감의 매개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고통이란 건, 다른 사람의 아픔이란 것은 크고 깊을수록 강하게 전달된다. 그래서 누리의 상처를 주인의 고통 없이 느끼긴 어렵다 - 인물들의 이름을 일반명사로 이해하면 영화 속 상황을 묘사하는 이러한 문장은 생각의 여지를 준다. 만약 누리의 상처가 다른 친구들의 장난이었다면 태선은 누리가 그것에 아파했다는 걸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해의 주체를 파악하지 못한 책임으로 지금까지 고통받으며 살아왔음에도.
이야기가 결말로 나아가며 다수의 고통을 일반화하려는 호도는 혼란스러웠다. 위로는 현상의 폭을 좁혀야 가능했던 것인가. 사과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게 만들어진 작품이란 걸 잊고 마지막까지 영화를 현실로 보았을 것이다. 주인이 없는 자리가 세상이라는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