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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

김민기를 기억하며

by 아라베스크



황지우 시인은 강단에서 어린 예술 학도를 마주하며 갑자기 강의를 끊고 - 매번 그럴 때마다 시인적 특질이란 생각이 들었다 - 이런 류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때의 사람들은, 예술도 그야말로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한 환자였고 징후였어. 다른 건 생각할 수 없는. 너희들은 모르지. 왜 그때의 사람들은 그런 것만 쓰고 그리고 불렀는지. 보고 들으며 촌스럽고 고루하고 지루하고 할 거야.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비극이었던 시절이야.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도, 어쩌면 저 현대 예술의 걸작들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기울어졌다고 했다. 병에 걸린 닭처럼. 온몸에 이데올로기를 얻어맞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게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몸이, 생각이, 삶이. 나는 우리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문화가 어땠을지 상상해보려 했다. 그런데 그럼 우리가 무엇으로 변할 수 있었을까, 동인이 무엇이었을까가 생각나지 않아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김민기를 생각하면 이데올로기로 기울어진 인간이 연상된다. 김민기가 이데올로기로 기울어지기만 한 인간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생각되는 사람으로 김민기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렇게 잊힐 사람으로. 아마 사람들은 그의 노래 봉우리마저 기울어진 노래라고 기억할지 모르겠다. 이 노래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 메달을 못 따 선수촌에도 못 남고 집으로 돌아가는 선수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주제곡이었다고 한다. 노래는 화자가 어느 시기에 도달해 지난 시간을 회술 하며 지금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봉우리. 지금 화자에겐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과거엔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봉우리. 인생의 전부였던 고개. 화자는 무조건 올라가 높은 곳에서 고함도 치고 한숨 늘어지게 잘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높고 뾰족한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고 오르다 보게 된 바다.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넓은 바다. 아득하게 넓은 바다를 보게 되었다고. 그러니 그러지 말라고,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손을 흔들거나 고함치거나 할 필요 없다고,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말라고, 혹시라도 어쩌다 아픔 같은 게 저며올 땐 그저 바다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고.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이는 바다를 생각하라고 말하는 감성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지난 고통받았던 시간들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높은 곳에 올랐어도 바다의 광경에 압도될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바다란 낮은 데로만 흐른 물들이 고인 곳이기에 고갯마루엔 대단한 의미 같은 건 없을 거란 것을. 노래의 끝은 지금 화자가 있는 곳. 숲 속의 좁게 난 길. 땀 흘리며 같이 걷는 이 길이 사실 진짜 우리의 봉우리라는 것. 여기서 화자가 생각하는 건 어쩌면 높은 곳엔 봉우리란 없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난 이 대목이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아마 아니 사실 오늘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저 높은 고갯마루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걷는 숲 속의 좁게 난 길이다. 이건 고통으로 기울어졌던 인간이 삶을 극복해 가며 말할 수 있었던 진실이다. 나는 그렇게 이 노래를 여긴다. 아마 우리는 김민기가 그의 노래가, 작품이, 봉우리가, 죽음까지 모든 것이 기울어졌다고 생각하며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진실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것은 진정으로 위대했다. 우리의 것이 현대란 말을 붙일 수도 없이 촌스럽고 하찮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바다였기에 모든 봉우리를 압도할 위대함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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