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래동화 중에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가 있습니다.
쇠도끼를 연못에 빠뜨린 나무꾼이 금도끼와 은도끼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정직하게 쇠도끼가 자기 것이라고 말했다가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다 받았다는 내용이지요.
그게 끝이 아닙니다. 금도끼와 은도끼가 탐이난 욕심쟁이 이웃이 똑 같은 일을 연출한 다음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가 전부 자기 것이라고 말했다가 가지고 있던 쇠도끼까지 빼앗기게 되지요.
교훈은 정직입니다. 작가는 왜 하필이면 나무꾼을 예를 들어 정직을 가르치려 했을까요? 어느 시대에나 계급 깡패, 탐관오리들이 널렸을 텐데요. 뭐, 정직은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미덕이니 예를 든 사람이 나무꾼이든 어린아이든 큰 상관은 없겠습니다.
그런데 그 쇠도끼이야기가 성경에도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열왕기하 6:1~5 말씀이었지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중략)드디어 그들과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쇠도끼가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이르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하니
이야기의 배경을 이렇습니다. 엘리사가 사역하고 가르치는 선지학교,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교 혹은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우상을 섬기던 악한 왕 여로람이 통치하던 시기의 선지자였습니다. 소수에다 비주류였지요. 좁은 길이었고 핍박 받는 환경이었지만 엘리사의 사역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메마른 개천에서 물이 나오게 하고, 기름 한 그릇으로 빈그릇이 다 채워지는 기적을 일으키고, 수넴 여인이 아들을 낳게 하며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고, 독이 든 죽을 해독하고, 적국 장수 나아만의 나병을 고쳤습니다.
여호와의 손을 힘입은 엘리사의 경천동지할 사역에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했던 게하시의 나병치리가 맞물려 대단한 부흥이 일어난 것이지요.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재목을 가져다가 건축을 하자고 합니다. 엘리사는 고민하지 않고 허락합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바로 재앙 같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열심히 나무를 베는데 그만 도끼 자루에서 쇠도끼가 빠져서 물에 그대로 풍덩 빠져 버린 것이지요.
이 사람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에서 보듯이 자기 것도 아닙니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9세기이고 철기시대 초입이었습니다. 철기로 만든 도구는 제사장이나 지역의 유력한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매우 진귀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나 가질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매우 값진 물건이었지요.
다른 사람들은 돌도끼로 힘들게 나무를 찍고 있을 때 빌려온 쇠도끼로 엄청난 효율을 내고 있었는데 그만 물에 빠뜨렸으니 쇠도끼를 연못에 빠뜨린 나무꾼보다 더한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은 드뎌지고 쇠도끼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못하면 어떤 낭패를 당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털썩 주저앉아 목 놓아 울면서 외쳤을 거예요.
엘리사는 도끼를 빠뜨려 망연자실하는 제자에게 쇠도끼가 어디 빠졌냐고 묻습니다. 이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장소 그 상황, 그 환경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는 의미입니다.
망한 환경을 피하지 말고 직시하라는 것이지요.
열왕기하 6:6~7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 지라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고 이르되 너는 그것을 집으라 하니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집으니라
이렇게 직면하라고 하는 것은 이제 죄와 사망에 매인 옛 사람은 떨어뜨려 버리고 주님이 살려주신 새 사람으로 들어 올려야 된다는 것입니다.(우리들교회 김양재 목사님설교 인용)
저에게도 쇠도끼가 도끼 자루를 벗어나 연못에 빠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정 경제라는 재목도 베어 들이고 아이들과 저의 든든한 의지가 되어 줄 것 같은 쇠도끼 같은 남편이 일으킨 바람 사건은 제게 한 세계가 연못에 그대로 빠지는 절망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저는 내 힘으로는 감당키 어려워 엘리사 같은 공동체에 물으며 새로운 시각을 가진 새 사람을 덧입기 시작했습니다.
새 사람으로 떠오르기 위해서는 사건을 내 잣대가 아닌 하나님의 구속사의 시각을 장착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했지요. 나를 구원하기 위한 세팅이라는 가치관이 들어왔을 때 남편은 그르고 나는 옳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하루 아침에 그리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편의 드러난 잘못보다 나의 드러나지 않은 미움과 원망과 분노와 생색의 죄가 그보다 덜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차츰 벗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의 시각이 사그라드는데 무려 10년이 걸렸다고나 할까요?
믿음으로 손을 내밀어 나뭇가지를 베어 던지는 일은 나의 일상에서 내게 주어진 사명을 붙잡는 것입니다. 내 가까이 있는 이상한 남편, 빌런 상사, 아픈 자녀를 회피하지 않고 잘 감당할 때, 내가 서있는 주변이 회복되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크고 작은 망하는 사건에서 고정관념과 옳고 그름에서 벗어나 구속사를 생각하며 내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