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꿈에서 우리 집 거실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특히 하얀 하이그로시 거실장 위는 빛이 났다. 우리 집은 원목 거실장인데 꿈에서는 웬일인지 흰색 하이그로시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거실장만 바뀌었을 뿐 영낙 없는 우리 집 거실 맞았다.
꿈도 깨고 잠도 깨어 거실로 나가 순간 온수 포트에 스위치를 올려놓고 거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실은 어제와 다름없이 난장판이었다. 거실장 중앙의 Tv가 있을 자리에 컴퓨터가 있는데 그 주위에는 물 컵과 책들 영양제 병들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여서 나뒹굴고 있었다. 거실 창문 앞쪽 한 켠에 놓아둔 화분의 식물들도 몇 개는 졸고 있었다. 웬만해선 죽지 않는 불사조 스킨답서스는 시들어진 지 한참 되어 보였다.
우리 집은 왜케 지저분하지? 나는 원래부터 청소와 정리 정돈과 담 쌓은 게으른 인간이더란 말인가? 스트레스 지수가 급 상승했다.
-안 그래, 너는 정상이야.
내가 맞 받아쳤다.
-아니요 안 그런 것 같아요.
-못 믿겠으면 생각을 좀 해 봐.
생각을 해 봤다.
어렸을 적에는 공부보다 일을 훨씬 많이 했다. 어린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강도 높은 노동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요즘 같은 겨울이면 먼저 오전에는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 해 왔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기 전에 고구마를 씻어서 무쇠 솥에 고구마를 한 솥 안쳤다. 고구마 위에는 아침에 먹고 남은 식은 밥을 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점심으로 고구마와 김치, 이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고구마 솥에서 데운 밥을 먹었다.
잠시 쉬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점심을 먹고 나면 청소를 했다. 빗자루로 방이며 마루며 구석구석 쓸어내고 나서 걸레로 꼼꼼하게 닦았다. 닦은 걸레는 도랑에 가져가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빨래 방망이로 두들겨서 빨았다. 마지막으로 축담도 쓸고 마당도 쓸었다
오후 4시 쯤에 소죽을 끓였다. 소죽을 끓이고 나면 나의 하루 일과가 비로소 끝이 났다. 엄마는? 엄마는 늘 바깥 일을 했고 언니는 오후에도 나무를 하러 갔다. 그들이 하는 일에 비하면 집안 청소와 소죽 끓이기는 일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허드렛일에 불과했다.
어느 날 도시에 사는 이모가 우리 집에 왔다가 나를 보고는 "애가 희한하네, 어린애가 방바닥에 엉덩이 한 번을 안 붙이고 일을 하노?"했다. 흐음.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내가 결혼할 당시엔 대기업에 다니던 여성들도 결혼과 동시에 퇴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 전임자 선배 언니도 그랬고 나의 입사 동기인 내 친구도 그랬다.
결혼을 하고 느닷없이 전업주부가 되어 잠시 당황했지만 일찌감치 체제 프랜들리형이었던 고로 신속하게 집안 일에 적응했다.
새댁 때부터 김장을 40포기씩 했다. 요즘에 김포족(김장을 포기한 사람들)김모족(김장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뻥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 때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친구가 내가 새댁 때 겪은 에피소드랍시고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다.
어느 날, 내게 "너는 집에 있으면서 매일 바쁘다카노?" 물었더니 "냉장고에 반찬, 식 재료 썩히지 않으려면 한가하게 엉덩이 붙이고 있을 시간이 없어."라고 했다한다. 나도 내가 믿기지 않아서 "내가 진짜 그런 말을 하더나?"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이들이 잠이 들면 집안 일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낮에 어질러 놓은 장난감을 제 자리에 다시 정리해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장난감을 치우느라 새벽 녘에 잠을 잘 때도 많았다.
남편이 "내일이면 또 어지를 텐데 뭐 하려고 매일 그렇게 치우노?" 하면 "치워 놔야 어지르는 재미로 놀지." 했다.
수업을 위해 꽤 긴 기간 동안 학생들의 집을 방문할 때가 있었다.
내가 방문한 학생들의 집을 생각해 보면 엄마가 전업주부라고 해서 다 깔끔한 것도 아니고 직장맘이라고 다 지저분한 것도 아니었다.
전업주부인데도 정리 정돈이 전혀 되지 않은 집이 있는가 하면
직장 맘 인데도 파리가 미끄러져 낙상할 정도로 언제나 깔끔한 집도 많았다.
수업 중에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의도치 않게 그 집안의 사정을 알게 된다. 그런데 정리 정돈이 되어있지 않고 씽크대에서 모종의 음식물이 썩는 냄새가 풍기는 집은 부모님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외로 그런 엄마일수록 교육 열이 높고 아이한테 관심이 많았다.
집의 정리 정돈 상태와 자녀 교육 간에 어떤 상관 관계가 있을까마는 있다해도 강박적으로 깔끔을 떠는 것보다 수더분하게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엄마들은 어찌어찌해서 엄마 역할까지는 해내지만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느라 무기력한 나머지 집안 정리까지 해낼 에너지가 없어 보였다. 요즘에 그 무기력해 보였던 엄마들과 내 모습이 어쩐 일인지 자꾸 겹쳐 보여서 하는 말이다.
남편과 평화롭게 지낸 지 꽤 되었다. 거짓 평화이든 강 같은 평화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싸울 일 없이 평온하게 지낸 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문제는 마음이 평온한 것 까지는 좋은데 치뤄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평화가 유지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남편의 모든 것을 허용하고 용납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고?
남편은 함부로 어지르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당신은 24시간 몸종이 필요한 사람이여, 따라다니면서 주워야 돼."했겠는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제 버릇 개 줄까' 처럼 가는데 마다 난장판을 만드는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도 줍기도 하고 한꺼번에 대청소를 하기도 하며 그럭저럭 지냈는데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청소하는 간격이 점점 느려졌다. 토요일이나 연휴에 날을 잡아 말끔히 해 보려고 시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행률이 갈수록 점점 떨어졌다. 핑계 거리도 늘어 났다.
남편이 집안에 특히 거실에만 틀어 박혀 있으니 청소할 엄두가 나지 않고 의욕은 점차 사그라졌다. 게다가 브런치를 시작하고 부터는 글도 써야 했다. 청소를 방해하는 원흉의 정체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남편인가, 브런치인가, 게으름인가. 원래 나는 지저분한 인간인가?
언니가 가끔 와서 하는 말이 있다.
-니는 이래 놓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나?
-응, 왜?
-니 눈에는 구석구석 더러운 게 안보이나?
-응, 안 보여.
이제는 다른 사람 눈에 버젓이 보이는 오염도 보이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니. 청소 못함이 불치병 수준으로 깊어진 것은 아닌사 싶어 화들짝 놀란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매일 정리 정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다, 알지만(날 잡아서 하는 사람 치고 제대로 정리 정돈 하는 사람 못 봤다)나는 또 날을 잡고 세부 계획을 세웠다. 25일 크리스마스는 자진 반납이다. 25일 하루 만이라도 내 이 인간을 내쫓고 기필코 청소를 하고 말 것이다. 새해는 정말이지 반짝반짝하게 시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