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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소금 May 09. 2024

선생님 우리 선생님

중학교 국어선생님 이셨던 문향자 선생님은 자주 창밖 너머의 화단과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셨다. 그 당시 주말 연속극'후회합니다'(1978년)에서 집을 나온 여주인공(김혜자분)이 바닷가가 보이는 별장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처럼 온갖 생각에 잠긴 얼굴로 수업이 시작되는 줄도 모르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셨다. 뭘 보고 계시는 걸까? 운동장인가 아니면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바람인가?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걸까? 누구를 생각하는 걸까? 선생님 연세가 되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선생님 시작 종 쳤어요."

선생님은 교탁으로 돌아오셨다. 

"선생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셨어요?"

"우리 엄마 생각했다."

"선생님 엄마 이야기 해 주세요."

우리는 선생님의 엄마에 대해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 옛날에도(?)무엇이든지 수업만 아니면 다 좋았다. 



"우리 엄마는 바느질 솜씨가 좋으셨다. 경북대 사범 대학에 다닐 때 내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멋쟁이였어. 내가 입은 옷은 거의다 엄마가 손수 만들어 주신 거라. 특히 원피스를 잘 만드셨지. 시장에서 파는 거랑은 차원이 달랐단다. 치마도 많이 만들어 주셨고. 가장 기억 남은 것은 모시 적삼인거라. 너거는 모시적삼을 할머니들이 입는 것만 봤제? 우리 엄마가 만든 모시 적삼은 신식으로 만들어서 내한테 잘 어울렸는거라. 여름에 빳빳하게 풀을 먹이고 다림질을 싹 해서 입고 나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선생님은 45분 수업에 25분 정도는 이야기로 채우고 나머지 20분 동안에 진도를 나갔다. 다른 선생님들은 주로 문법, 낱말 뜻, 필기에 집중했지만 선생님은 늘 단원에서 다루는 내용에 집중했다. 수업의 첫 마디는 이렇게 시작했다.

"단원의 내용이 뭔지 알겠나? 집에서 안 읽어왔나? 지금이라도 읽어 보자. 1번부터 돌아가면서 한 문단씩 읽어봐라."


선생님은 우리가 시험 문제 풀이에 정신이 팔려 교과 내용을 놓치는 것을 늘 안타까워 하셨다. 

"무엇보다 내용이 제일 중요하다. 내용이 머리 속에 들어올 때까지 반복해서 읽어라. 내용을 다 꿰고 있으면 어떤 시험 문제도 다 풀수 있다."



선생님은 내 친구 숙이의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1주일에 한 권씩 책 읽기 숙제를 내 주셨다. 숙이의 손에는 늘 책이 들려 있었다. 주로 소설책이었다. 숙이가 읽는 책들 중에 내가 처음 보는 책도 많았다. 어느 날 숙이가 나에게 물었다. "소금아, 너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뭐고?"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머리 속에 즉시 떠오르는 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물쭈물 얼버무리며 "니는 뭔데?" 하고 되물었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제일 재미있고 인상적인 책은 '폭풍의 언덕'이다. '폭풍의 언덕'은 '에밀리 브론테'가 쓴 책이다, '에밀리 브론테'는  '제인에어'를 쓴 '샬롯 브론테' 동생이다."

"나는 아직이야, 나도 읽어 보고 싶다. 그 책 어디서 구했어?" 쿨하게 말해도 될 것을 그러지 못하고 속으로 '잘난 척하고 있네' 하고 욕했다. 

숙이는 옹졸하기 그지없는 내게 해맑은 표정으로 문향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덧붙였다.  

"니는 문예반 아이가? 글짓기 대회도 나가고.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책을 많이 읽어야 글도 잘 쓴다 카더라." 



내가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이 숙이의 담임선생님이라는 사실에 숙이가 한없이 부러웠다. 

문향자 선생님이 한 번이라도 내 담임 선생님이 되기를 바랐지만 이듬 해에 선생님이 정년 퇴직을 하는 바람에 소원은 소원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실 문향자 선생님은 니반 내반 차별 없이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가르치셨다. 

새 학년이 시작된 어느 날 글짓기 대회를 앞두고 국어 시간에 연습 삼아 쓴 글에 대해서 선생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진심 어린 피드백을 해주셨다. 내가 쓴 글을 읽으신 선생님은 "봄 날에 대해서 쓰려면 눈에 보이는 예쁜 꽃에 대해서 쓰기 전에, 예쁜 꽃을 피우기 위해 춥고 메마른 겨울 동안 얼마나 힘들게 참고 견뎠을지를 먼저 생각해야 된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그 한마디는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이후에 오랫동안 글쓰기는 내 삶에서 멀리 멀리 떠나 갔지만 그 때 고이 간직한 선생님의 한마디는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한 지금까지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선생님의 말씀은 비단 글쓰기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슨 일에 든지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에 있는 것을 보려고 애써야 할 것을 주문한 것이리라.

선생님의 나이가 되어보니 선생님이 새삼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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