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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소금 Jun 04. 2024

등산길에서


출근할 때부터 등산 생각을 했습니다. 등산을 다녀오면 하루가 더욱 풍성해 질것만 같았기 때문이지요.

원래는 식사 시간에 35분 정도 산책을 했는데 지난 주부터 50분으로 늘렸습니다.

가파른 고개 하나가 추가 되었지요.

땀을 뻘뻘 흘리니 산을 본격적으로 타는 느낌이 들어 산책이라 부르던 것을 등산으로 바꿔부르기로 했습니다.



등산길 초입에는 공원이 있습니다.

공원은 구석구석까지 환희로 일렁거립니다.

6월의 햇빛과 바람을 전심으로 환영하는 나무와 풀, 꽃과 벌레와 새들의 즐거운 축복송이 울려퍼지는 듯합니다.


빛은 생명이고 생명은 성장이며 성장은 축복으로 이어지지요.

생명체들의 성장은 경이롭습니다. 키가 크고 이파리가 넓어지면서 각자가 간직한 고유의 색상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이 부십니다.  

하지만 빛과 바람과 물이 없이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비춰주고 땡겨주고 밀어주며 힘내, 잘한다 잘한다, 영차영차, 응원하는 공동체의 함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잘 가꾸어진 공원은 여기가 끝입니다. 공원은 오픈게임인 셈이지요. 진짜 등산은 이제 부터입니다. 가슴이 설렙니다. 진짜로요. 매일와도 하나도 지겹지 않습니다.

초록 샤워장이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 같습니다.

오오 오늘도 변함없이  환영해 주는 거지? 신다. 초록샤워 고고씽입니다.



지인을 만났습니다. 지인도 산에 올라오니 벌써 공기가 다르다고, 넘 좋다고 야단입니다.

"샤워하는 느낌이에요." 지인도 그 말을 받아서 "피톤치드샤워인가요?" "침엽수에서 나오는 게 피톤치드 아닌가요? 여기는 활엽수가  훨씬 많아요. 근데 활엽수에서 피치드보다 더 좋은 게 나오는 것 같아요. 이름은 몰겠어요."

침엽수든 활엽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초록초록 샤워장이  마음까지 씻어줍니다. 우울한 기분도 한달음에 씻겨 버립니다. 탈의, 비누칠, 샴푸질  같은 거추장스러운 과정이 없어서 더욱 사랑하는 초록샤워입니다.



35분코스라면 정상에서 내려와야 하지만, 이번에 15분을 추가하면서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진행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고개 내려가니 시야가 확 트입니다. 발 아래에 산뜻한 도시 마을이 펼쳐졌습니다.


어릴 적에 고향집 뒷산에 올라가 우리 동네를 굽어보며 그림을 그리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초가집과 집 앞에 흐르던 시냇물과 냇물에 놓였던 징금다리, 그 앞에 펼쳐진 른 논을 그렸던 기억이 어슴프레 나네요.



곳곳에 나무가 만들어 놓은 터널이 있습니다. '터널'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생각납니다. 하정우씨 주연의 재난영화 '터널'도 생각나고요. 그런데 나무가 만든 초록터널은 그런것과 거리가 멉니다.

생명이 뿜어내는 희망찬 기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초록 터널이 온몸에 생명의 호랑이 기운을 솟아나게 하지요.  



새가 나무위에서 친구를 기다립니다. (근거 있음, 물때까치, 무리생활을 하는 새)

봄날에 나무 위에 새를 보니 또 옛날 생각이 납니다

50년 쯤 전에 시골의 고향마을에서는 산이나 들이 놀이터였습니다.


일과 놀이도 딱히 구분이 없었습니다. 산에 가서 도라지나 나물을 캐기도 했지만 놀이도 했으니까요. 나무타기를 많이 했습니다. 저의 오빠는 나무타기 명수였습니다. 이맘 때면 새가 집을 지어 놓은 나무에 올라가서 새집에 있는 새알을 꺼내오곤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환경보호 같은 개념이 없었습니다. 모두 오빠가 꺼내온 새알을 부러워하며 오빠처럼 하고 싶었지요.

엄마조차도 금지시키는 말보다 감탄하는 말을 했을 정도니까요.



오빠가 나무에 올라가 새알을 꺼내오던 그 시절에는 동네에 아이들이 바글바글 했었습니다. 아이들만큼 처녀총각들도 많았습니다.


요즘 같은 모내기철에는 처녀들이 모두 나와 논에서 모내기를 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요.

그랬는데 말입니다. 그 많던 처녀총각들은 한꺼번에 소문도 없이 하나 둘 씩 사라졌습니다.


너도나도 도시로 도시로 떠난 것이지요. 꽃다운 나이에 도시로 나간 그들은 옷 공장 신발 공장에서 청춘을 바쳤습니다. 후에 그분들은 70년대 산업역군으로 불리었지만 사실 원래 그들은 산업역군이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 말이 뭔지도 몰랐지요. 다만 가난과 배우지 못하는 설움에 찌들어 있는 촌구석이 징글징글 했을 따름이었지요.

저도 비스무리한 맥락으로 고향이 마냥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일까? 했었지요.



그래도 고향이 그립습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칭얼대며 보채는 데도 시큰둥한 엄마 사랑을  애절하게 갈구하며 엄마품을 파고드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고향은 어머니 품일 것인데,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를 조건없이 사랑하셨고 나 또한 어머니를 사랑지만  어쩔 수 없이 해소되지 않는 결핍 또한 남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주도 말고 강원도 아니고 고향 마을에 가서 딱 한달, 아니 일주일 살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낮에는 입이 미어터지게 상추쌈을 먹고 저녁에는 소쩍새가 서글피 우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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