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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늙어서 정규직이 되다

-추합-

by 분홍소금

일전에 공공기관 채용에서 예비 번호를 받았었는데 추가합격이 결정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고 난 후 얼마 뒤, 합격자 발표 날에 예비번호를 보자 혹시나 하는 기대와 희망이 마구 밀려왔다. 하지만, 현실인즉슨, 그 누가 어렵게 들어간 공공기관에서 퇴직할 생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애써서라도 잊어버려야 했고 얼마 안 있어 진짜로 잊어버렸다. 그런데 뜻밖에 낭보를 듣게 되었다.


듣자말자 제시한 날짜에 갈 수 있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망설일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불러주셔서 황송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능합니다,” 하고 또렷하게 말했다.


그리고 채용 신체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갔다. 불과 2주 전에 건보공단 신체검사를 했지만 건보공단 검진 내용과 다르다고 해서 다시 갈 수 밖에 없었다.


먼저 키, 혈압, 시력, 청력, 색약 같은 간단한 검진을 했다. 시력이 2주 전에는 1.0,1.0이었는데 오늘은 1.0,1.2였다. 시력이 이렇게 들쭉날쭉인 게 좀 웃겼지만 굳이 1.0, 1.2 라는 숫자 보다는 그냥 나는 시력 하나는 좋구나. 했다.


피검사를 하면서 2주 전에 뽑았는데 또 뽑네요, 했더니 간호사 선생님이 그 때 채용신체검사도 같이 했으면 비용도 아끼고 좋았을 텐데. 했다.

참 나, 그 때 내가 이렇게 추합으로 붙을지 어찌 알았겠나.


소변검사 컵을 보관함에 넣고 엑스레이를 찍으러 갔다. 옷을 갈아입고 대기하고 있는데 TV에서 대통령취임식을 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을 여기서 보는 구나, 했다. 새 대통령이 선서를 막 하려는데 내 이름을 불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엑스레이를 찍으러 가야했다.

마지막으로 문진표를 들고 의사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의사선생님은 대뜸

“이제 편하게 쉬시지 뭘 또...”

하는 것이었다. 문진표에 적혀 있는 내 나이를 보고 ‘그 나이면 이제 쉴 때 아닌가.’ 하고 묻는 듯했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쉬고 싶은데...”

하고 얼버무렸다. 의사선생님은 ‘알레르기가 있냐? 간염을 앓은 적 있냐?’

등, 몇 가지를 더 묻더니 엑스레이 사진을 보며


“이 사진을 보니 아직 일 더 하셔도 되겠네요.”했다.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이 때문에 의기 소침된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사람이 여유가 없이 너무 악착같아 보였나? 아니면 그 나이에 무슨 공무원이야, 하는 걸까? 혹 나이 들어서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것이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인걸 나만 모르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자 점점 더 기운이 빠졌다.


이만한 일로 내가 이러는 이유는 정년을 코 앞에 두고 취준을 하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를 떨칠 수가 없어서 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느니, 내 나이가 어때서 같은 말이 주눅 든 마음을 돌이키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럴 때가 아니지 않는가.


마음을 추스리고 좀 더 곰곰이 생각하자 조금 전과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좀 전에 들은 말이 나이 든 사람 티를 팍팍 내면서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이 굴까봐, 미리 맞은 예방주사 같이 느껴졌다. 어떤 말을 들어도 요동하지 말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예방주사, 맞아, 오늘 내가 예방주사 맞은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 의사선생님이 고맙기까지 했다.


이제 다시 기쁘고 감사했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자. 기대하는 마음으로 힘차게 출발해야지. 잘난 척 노, 비굴해서도 안 돼. 겸손하고 공손하게. 치우치지 않는 발걸음으로 내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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