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에 추석에 장만했던 나물로 비빔밥을 해서 남편과 함께 먹었다. 배가 먹고 싶어서 마트에 갔다. 선물 세트만 있고 내가 원하는 배는 없었다. 배는 사지 못했다. 대신에 노각을 한 보따리 샀다. 누릿누릿한 노각이 5개에 3000원이라니 요즘에 보기 드물게 착한 가격이었다. 부추와 대파를 넣고 김치를 담궈서 도시락 반찬 해야겠다 했다. 마트를 나오다가 옆 건물에 갓 개관한 도서관에 갔다. 추석에 휴무였는데 토요일에는 문을 열었다. 도서관을 까페처럼 꾸며 놓았다. 책 3권을 대출하고 3시간 컴퓨터 사용 예약을 했다. 2시간 정도 글을 쓰다가 집으로 와서 남편과 점심 겸 저녁으로 샤브샤브를 먹으러 갔다. 갔다와서 넷플릭스 '자산어보'를 보았다.
다시 보아도 처음 보는 것처럼 재미와 감동이 새로웠다. 조선시대 배경의 스토리에 나올 법한 클리세가 없다고 해야 하나, 비극적인 상황인데도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이 신선했다. 설경구, 이정은, 변요한 등 주연들은 말할 것도 조연들의 연기 잔치라고 해도 될 만큼 조연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처음 등장한 별장역의 조우진씨의 능청스런 연기가 웬만한 개그보다 더 재미있었다. 그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깨소금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잠깐 등장한 정약용의 제자 역의 강기영씨도 인상적이었다. 흑백영화라서 그런지 인물들의 삶이 한층 묵직하게 다가왔다.
자산어보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고 있는데 마루에서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과 아들이 거실에 나타난 파리 이야기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똥파리가 거실에 들어왔단 말이야?"
밖으로 나가자 남편은 파리채를 사러 간다고 벌써 나가고 없었다.
아들에게 언제부터 똥파리가 나왔냐고 물었다.
추석 전부터 난데 없는 똥파리가 나와서 하루에 4~5마리를 몰래몰래 잡았다고 했다. 합치면 20마리가 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집안 어딘가에 똥파리가 까놓은 구더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제 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엄청난 일을 엄마한테 왜 말 안했어?"
"엄마한테 말하면 충격받을까 봐 나랑 아빠랑 조용히 해결할라고 했지."
(뜻은 갸륵하지만)"이게 조용하게 넘어 갈 일이야?"
"밖에서 들어온 건지 집안에서 태어난 건지 그걸 알 수가 없어."
"여름에 모기 한 마리도 들어 올 수 없는 새 방충망이야, 분명히 집안 어딘가에서 나온 것 같아,
찾아서 박멸해야 돼."
"파리 재앙이 왔나?"
"맞아, 파리 재앙이야, 출애굽할 때 애굽에 내렸던 재앙, 파리재앙이 내 한테 왔네, 엄마가 청소를 안해서 벌을 받고 있는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속으로는 남편 탓을 했다. '저 더럽고 게으른 인간 때문이야, 저 인간이 음식 찌꺼기를 버리지 않고
꽁꽁싸서 집안에 쟁이니까 이 사단이 난거야.'
곧장 마트에 가서 50리터 들이 종량제 봉투 2개를 사고는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왔다. 정신을 챙기고 '엄청난 광경을 봐도 놀라지 말자.' 각오를 다지고는 마스크를 쓰고 목장갑을 끼고는 벽에 붙여 놓았던 소파를 마루로 밀어 제꼈다. 남편이 파리채와 잠자리채를 사 왔다. "여보 이 잠자리채는 뭐요?" "이거는 날아다니는 파리 잡는 거야 그물로 잡아서 바닥에 거꾸로 뒤집어서 가두고 잡으려고."
"여보 지금 장난해?, 똥파리가 바보에요? 비상이다, 나는 거실에 똥파리가 날아다니는 꼴는 못 본다. 집을 뒤집어서라도 단서를 찾아내서 발본색원을 할 테니까 당신은 나가든지 방에 딱 들어가 있든지 해요."
먼저 소파 밑에 있는 쓰레기와 먼지를 쓸어 냈다. 소파를 제자리로 밀어 넣고 거실 구석구석에 쳐박아 둔 물건들을 끄집어 냈다. 못 쓰는 컴퓨터 모니터와 안 쓰는 청소기, 고장난 믹서기에 동 호수 메모를 써 붙이고 쓰레기장으로 보냈다. 김치 냉장고 옆에 널브러져 있던 택배 박스, 부엌에 쌓아 두었던 안 쓰는 김치통 2개도 사정 없이 버렸다. 다용도실에 버리지 않은 식재료가 있는 지도 몰라,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던 고추가루 봉지, 깨소금 봉지가 더위에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느슨하게 밀봉이 되었지만 거기에도 벌레는 없었다. 먹다 남은 견과류 통 안에도 벌레는 슬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버리고 털며 청소를 끝내고 나니 4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청소가 끝났는데도 벌레들의 소굴을 발견하지 못해서 마음이 못내 개운하지 않았다.
언니한테 전화를 했다.
"색깔이 초록색이제?"
"응, 초록색이고 크지는 않은데 번질번질 징그럽다, 놀라서 자빠질뻔 했다."
"응, 아무래도 화분에서 나왔지 싶다."
"화분있어도 이런 일 한 번도 없었는데 무슨 일일꼬?"
"그것들이 한 번에 20마리 정도 새끼를 낳아. 20마리 넘게 잡았으면 거의 다 잡았네."
"무섭다, 또 나오면 어째?"
"분갈이 해야 된다. 새 흙을 사서 분갈이 해라."
"나는 못한다."
"그럼, 할 수 없이 버리야지 뭐."
"응, 버릴게."
화분을 들여다 봐도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어쨌든 범인은 화분이었다.
일요일 아침일찍 가족들이 거실에 모였다.
거실이 훤했다.
남편은 집이 갑자기 호텔처럼 깨끗해졌다고 했다.
아들은 똥파리 이야기나오자 마자 엄마 한테서 슈퍼 파워가 나오더라고 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갑자기 괴력을 발휘하더니 삽시간에 집을 뒤집었다고 했다.
재앙이 괴력을 일으켜 명절에도 제대로 하지 못한 거실 화장실 부엌 다용도실을 말끔하게 치웠다.
마침 서늘한 가을이 코 앞에 들이 닥쳐서 가을 맞이 대청소가 되었다. 똥파리가 열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