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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병,설마 불치병은 아니겠지

by 분홍소금

최근에 사무실에서 어떤 분이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며 나가더니 잠시 후에 커다란 '코스~쇼핑백'을 들고 들어왔다. 여사님은 쇼핑백을 들고 나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와 당근하고 오는 길이라고 하면서 쇼핑백에 들어 있는 물건을 꺼내 내게 보여 주었다. 접시였다. 지금은 단종된 모델의 영국접시였는데 한눈에도 디자인이 너무 예뻤다.


이렇게 수수하고 질리지 않으면서 모던한 디자인의 접시를 어떻게 구했냐고 하니 여사님은 당근에서 같은 브랜드의 접시만 모으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굿차이나(?) 에서 단종된 가든 라인(?)이 너무 마음에 드는데 단종된 품목이라 시중에서 구할 수는 없지만 당근에서는 간혹 나온다고 했다. 가든 라인을 찾기 위해 강남 서초 잠실 위주로 그 곳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싹쓰리 해오다시피 하여 모은다고 했다.


당근에서 예쁜 그릇을 마구잡이로 사서 모으는 게 아니라 특정 브랜드, 특정 라인을 이런 식으로 모으다니, 완전 꿀팁이잖아. 신박한 당근 사용 설명서를 본 것 같이 팔랑귀가 펄럭거렸다. 몇 년 전에 '오쿠'를 당근에서 구한 이후로는 앱을 지웠었는데 저런 식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있었다니.


그릇 구매에 대한 욕구가 스물스물 올라왔다. 내게 그릇이 더 이상 필요한가? 답은 '당근 필요하지.' 였다.

여태까지는 손님 치를 일이 없었지만 머지 않아 딸과 아들이 결혼할 것이다. 지난주에 딸의 남친까지 상견례급 만남을 갖지 않았나 말이지.

아무렴, 곧 우리 집에서 식사를 대접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딸 뿐아니라 아들도 결혼을 해야 한다. 우리집에서 새 식구와 함께 식사할 일이 많아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음식을 차릴 때 이왕이면 예쁜 그릇에 담아 세팅을 한다면 맛깔스럽게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먹는 사람 입장에서도 대접받는 기쁨이 더할 것이다.


나도 여사님처럼 해야겠다.

가만있자, 우리집에 무슨 그릇이 있더라?


그릇도 성격대로 찔끔찔끔 사 모아서 그런지 맥락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 집에 있는 그릇과 잘 어울리는 브랜드를 찾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유행타지 않고 집밥의 특성을 살려주는 그릇, 있다 있어. 우리집에도 있다. 나는 큰 고민없이 한 브랜드와 라인을 떠올렸다.


당근에다 브랜드와 라인을 입력을 했다. 떴다떴어. 올린지 일주일이 지났잖아, 가성비가 있었다면 벌써 누가 채갔을 텐데 아직도 남아 있는 이유가 뭐지?

시중에 같은 브랜드를 검색을 했다. 가격면에서 새 제품과 별 차이가 없었다.그래도 시중가 보다는 낮은데, 뭐지? 사람들이 저 브랜드의 진가를 모를 리가 없잖아.


찬찬히 살펴 보았다. 독일산인데 미국에서 샀다고 했다. 진품이라 이거지, 좋아좋아, 비싼 이유가 있었구만. 아이들 혼인 준비로다가 미리 사서 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체 개발한 합리적인 이유를 들이대며 질러자는 데로 마음이 급격히 기울었다.


다만 한가지 걸리는 것은 내게 필요 없는 찻잔세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요즘에 누가 저런 찻잔에 커피를 마시나 싶었다. 젊은 사람들은 죄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머그 잔에 마신다. 집에 늘린 게 머그 잔과 커피잔인데 찻잔세트에까지 비용을 지불하고 싶지 않았다. 아쉽지만 패스.


틈만 나면 들어갔다. 처음에는 내가 찾는 브랜드만 검색을 했지만 몇 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종횡무진으로 누비게 되었다. 독일산 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체코, 헝가리 일본 등 국적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가만 있자, 재봉틀 실을 사러 동대문에 갈 게 아니라 당근에서 봐야겠다. 내가 여태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재봉틀 부자재를 입력했다. 내게 꼭 필요한 온갖 부자재들이 올라왔다가 판매가 종료되었다. 에구 아까워라, 내게 정말 요긴한 것들인데, 한 달 전에만 이런 생각을 했어도 저걸 구할 수 있었을텐데.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냐 실 사러 동대문에 갈게 아니라 먼저 당근에 들어가서 필요한게 있나 보면 좋겠어. 언니 동네 당근에 한 번 봐봐."

언니가 알았다고 했다.


검색하는 품목이 점점 늘어났다.

계획에 없었던 칼 세트를 샀다. 칼 세트에 포함된 가위를 보자 갑자기 집에 있는 가위가 무뎌졌다는 사실이 일깨워졌다. 판매자와 톡으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을 하고 상품을 다시 보니 어딘지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네모난 중국 칼과 집에 몇 개씩 있는 다용도 칼, 과도, 칼꽂이까지 거대한 세트가 아닌가. 정작 필요한 건 가위 하나인데 따라오는 게 더 많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나 할까. 아뿔사, 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번 주에 계획한 연재가 있었고 그러려면 대충이라도 가닥을 잡아야 하건만 온 신경이 당근에 꽂혀서 글쓰기가 도통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새 당근 중독자가 된 것인가.

낮에도 틈만 나면 당근, 퇴근해서도 그저 당근, 아침에 일어나서도 당근,

며칠 동안 당근이 블랙홀처럼 나의 짜투리 시간을 모두 빼앗아 갔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 라는 말이 있더니만 '당근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구나, 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어쩌지 어쩌지?'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냐 재봉틀 실 있잖아, 그거 그냥 동대문 갈 때 사고 말자.

내가 괜히 언니한테 당근에서 보라고 했나봐, 당근은 안 돼, 클나."

"당근이 원래 글타, 니가 당근을 처음 하는 가베," 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두 번이나 저장을 누르고 그곳에 갔다왔다 .


'제법 근사한 세트가 올라왔는데 이번에도 그놈의 커피잔 세트가 필요 이상으로 많단 말이야, 두 세트만 돼도 사겠는데, 네 세트라니, 커피잔 세트에 비용을 쓸 수는 없지.'


나의 당근질은 멈출 수 있을 것인가, 당근병이 설마 불치병은 아니겠지, 그렇지만 쉽게 끊어질 것 같지 않은데? 언제쯤 싹둑 끊을 수 있을까? 나도 내가 궁금하다.


이미지 출처 :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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