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의 온기를 기억할게

by 분홍소금

겨울 나무는 흔히 나목이라고 부르며 헐벗고 앙상하고 삭막한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등산 길에서 내가 본 겨울나무는 봄 여름 가을에 못지 않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나무는 몸통을 가렸던 무성한 잎을 벗어버리고 온전한 속살로 세상과 마주하고 서서 찬 바람과 얼음눈, 구름과 햇빛과 소통하고 있었다.

삶을 무겁게 했던 것을 내려 놓은 후 가벼워지고 홀가분해진 자유와 열린마음을 보았다.


생기와 온기의 원천이 되는 힘은 나무 뿌리에서 올 것인데 어떤 환경에도 쓰러지지 않을 힘을 깜깜한 흙 속에서 길어올리는 뿌리의 위대함도 겨울에 더 돋보였다.


찬바람과 적은 일조량의 시련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즐거운 인내와 결코 손상되지 않는 분홍색 희망을 보며 고난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타듯 넘실넘실 넘어가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했다.


나무껍질을 만졌을 때 전해져 오는 온기는 어떤 상황에도 우리가 마지막까지 지녀야할 것이 온기임을 가르쳐 주는 듯 했다.


완연한 봄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모습이 마치 처음 봄을 맞이하는 것처럼 경이롭다

어제 솜털에 쌓인 이파리와 꽃봉오리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는데

오늘은 웅성거렸다. 아마 내일은 목소리를 뽑아 노래할 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리허설을 마치고 나면 웅장한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질 것이다.

너의 온기1.jpg
너의 온기.jpg
너의 온기3.jpg
(어치, 까마귀, 청설모)


1년에 사계절이 있어 다행을 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오고 봄 다음엔 여름, 찌는 듯한 여름이 무한 반복될 것 같이 지루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가을, 가을만 같아라 하면 어느새 겨울이 오고야 만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아서 '꽃길만 걸으세요' 하는 말처럼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말이 있을까 싶게 영원한 봄도 영원한 겨울도 없다.


인생의 사계절은 시절에 구분 없이 찾아온다.

겨울 한 철에도 사계절이 뒤섞이고 따스하고 포근하여 갖가지 꽃이 만발한 동화 같은 봄 한 날에도 삶의 현장에서는 봄소식이 멀기만 할 때도 있다.


출근 길 가로수의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 잎에 마음이 빼앗겨 오늘 하루가 봄같기를 바라지만 사무실에 도착하면, 느닷없는 겨울의 살 풍경을 맞딱드린다. 상사의 모습과 동료의 표정에 찬바람이 불고 책상 위에 놓는 실타래 같이 꼬여 있는 업무가 겨울의 시간임을 알려준다.

겨울의 풍경에 솜털이 보송한 새 이파리 같던 마음이 얼어붙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냉기가 올라온다. '내가 언제까지 여기서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어야 하나, 언제 지겨운 마음을 애써 감출 필요없이 속시원히 사표를 던질수 있을까? 한다. 식사시간까지도 풀리지 않는 꽁꽁 얼어 붙은 마음을 안고 산을 오른다.


봄볕에 졸고 있던 나무들이 화들짝 하고 깨어나 나를 둘러서 쳐다본다.

내가 뿜은 냉기에 어린 나무 하나가 '에이취' 하고 재채기를 한다.

'미안미안.' 미안한 마음에 나무 둥치를 가만히 만져본다.

껍질이 켜켜이 붙은 둥치, 매끈한 둥치, 가는 줄기까지 나무는 여전한 방식으로 저마다의 온기를 간직하고 있다. 얼어 붙은 마음이 어느새 스르르 녹는다.

나무들이 빙그레 웃는다. 햇빛도 구름도 바람도 발걸음을 떠 받쳐주는 흙과 낙엽과 작은 돌멩이, 말라붙은 풀잎까지 덩달아 응원의 미소를 보낸다. '괜찮아괜찮아.' 마음에 훈풍이 일어난다. 훈풍에 봄내음이 숨어 있다.

출근길에 봄, 사무실에서 겨울, 산에서 다시 봄이 된다.


내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꼼꼼히 들여다 본다. 까탈스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풀지 못할 일은 아니다. 냉기가 흐르던 직원들이 점심을 먹은 후 커피를 사들고 와서 느긋하게 티 타임을 즐기고 있다.

사무실에 봄 햇살이 비친다.

너의 온기4.jpg
너의 온기6.jpg
너의 온기5.jpg

그래도 봄날은 길지 않을 것이다. 저녁에 집에 가면 또 겨울이 시작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무의 사계처럼 사무실에서, 집에서, 인간관계에서 끊임없이 사계절이 반복될 것이다. 하루 동안에도 겨울의 차가움과 봄의 다정함, 여름의 환희 가을의 쓸쓸함이 오고 갈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겨울의 시간이 오면 겨울나무를 기억하리라.

봄나무는 겨울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같은 나무일지라도 겨울에 내게 베풀었던 풍성한 은혜를 생각하며

굳이 겨울나무나무라고 이름 붙여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겨울 나무야, 겨울의 시간에 전해준 너의 온기를 기억할게

겨울의 냉기에 지지 않던 너의 용기와 속살을 솔직하게 드러낸 너의 당당함도.

너의 인내와 너가 꿈꾸었던 희망을 나도 붙잡고

겨울에서 봄으로 난 길을 따라 너울너울 건너갈게

그동안 고마웠어.

너의 온기 8.1.jpg
너의 온기 8.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