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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소금 Oct 15. 2024

그녀의 재봉틀

재봉틀로 만든 소품 사진 한 장의 나비효과


동대문 종합시장 앞에서 정각에 그녀와 만나기로 했다.

나는 일찍 다니는 습관대로 40분 쯤에 도착했는데 주위를 둘러보자 그녀가 

멀지 않은 곳에서 길다란 곤색 겉옷 자락을 펄럭이며 내 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내가 그렇듯 그녀도 이제 젊은 나이라고 할 수 없었으나 활기찬 모습은 여전했다. 생기 넘치는 모습에도 나이듦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덮고도 남을 젊은 티가 팍팍 났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옅은 청바지의 허리에서 내려온 끈, 블링블링한 티셔츠와 트랜디한 겉옷에서 풍기는 겉모습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를 가장 젊어 보이게 하는 것은 주머니 속 송곳처럼 숨길 수 없는 그녀의 열정이었다. 



"일찍 왔네, 나는 벌써 와서 한 바퀴 돌았다. 오늘 휴일이라 가게 대부분 문 닫았고 열어 놓은  집은 얼마 안되더라, 밥 묵었나? 저기 가서 뭐 좀 먹자."

"나는 생각없는디," 

우리는 곧장 동대문 종합시장 원단 가게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어렸을 때 부터 일을 잘했다. 농사일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했다. 부모님은 늘 빌빌거리며 제대로 해 내는 일이 없는 내게 저런 머리로 공부를 어떻게 할까 하고 혀를 찼다. 반면에 그녀는 매사에 야무지고 일머리가 좋다고 했다. 농사일도 어른이 한 것처럼 했다. 요즘처럼 가을겆이가 한창일 때는 감도 따고 밤도 땄는데 그런 일도 같은 또래 보다 갑절은 잘 해 냈다. 밥도 잘하고 반찬도 맛있게 했다. 심심하게 끓인 그녀의 시락국(우거지국)은 한결같이 일품이라 밥 맛이 없을 때면 그녀의 시락국이 생각날 정도이다. 



이런저런 일 중에 그녀가 가장 잘 하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재봉이었다. 그녀는 일종의 재봉 기술자였다. 하지만 재봉 기술은 그녀가 가장 숨기고 싶어하는 일이기도 했다. 재봉을 가난과 수치의 상징처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로 친정의 복덩어리이자 변함없는 센스쟁이 나의 언니이다. 



 "언니야, 재봉틀로 뭐 좀 만들어봐." 하면 

"재봉틀 재 자도 꺼내지 마라, 재봉틀 소리만 들어도 징글징글하다." 했다.

재봉이라면 절래절래 하던 그녀가 최근에 뜬금없이 친정 식구들 단톡방에 소품 사진 하나를 올렸다. 

"언냐, 뭐꼬?"
"심심해서 만들어봤다, 우떤노??"

"완전 멋지다. 팔아라."

"살 사람이 있으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넨 말이 어찌저찌하여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 아들 웅이에게 가 닿았고 이모의 재봉 솜씨에 놀란 웅이는 고려해 봐야겠다고하면서 곧바로 시장조사에 착수했다. 며칠 뒤  웅이가 언니의 소품 판매를 수락하면서 언니는 각중에(느닷없이)상품 제작자가 되었다. 



언니의 소품제작과 아들의 판매 수락 그 자체로 나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어떤 유형이 어떻게 거래되고 있는지 폭풍검색을 하기 시작했고 유사한 소품들이 자체 제작으로 쇼핑몰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쉽사리 확인하고 나자, 언니의 소품이 이미 팔려나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신이 났다. 



"언니야, 이것 좀 봐봐, 인터넷 시장에 언니처럼 하는 사람들이 널렸다."

"재주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노?"

"그렇겠지, 근데 아무리 잘 만들어도 판매자가 없으면 취미 이상 못 넘어 갈 거잖아, 근데 언니는 웅이가 자기네 쇼핑몰에 올려준다고 하니까 얼마나 좋노?" 

"맞아, 나도 웅이가 팔아 준다고 하는 말 듣고 어제 밤에 잠이 안오더라,"

"언냐 엊저녁에 집 몇 채 샀제? 나도 재봉틀 한 대 살란다. 언니한테 재봉 배워서 같이 하고 싶어. 나도 집 사야제."

"난리 났구마."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샘플 작업이었다. 

판매자는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웅아, 이거 어때? 완전 예쁜데? 똑같이 만들까?" 

"이모나 엄마눈에 예쁘다고 다른사람들도 예쁘다고 하는 건 아니야, 모르겠어? 딱 봐도 아줌마 취향이구만, 내가 정해 주는 대로 해 줄 수 있어? 원단의 색상과 디자인, 재질, 안감 연구해서 정해줄 테니까 똑같이 만들어야 해."

"넵넵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표님 지시하는 사양대로 합지요."



우리는 동대문 종합시장에서 판매자가 정해준 원단을 각각 5마씩 샀다.

"언냐, 저거 좋다. 저거 사자."

"안돼, 웅이가 저런 거 하지 말랬잖아, 우리는 무조건 웅이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돼."



재봉을 하기 위한 부자재도 구입했다. 언니는 물론 잘 알고 있었지만 나도 벌써 어느 정도는 꿰고 있었다.  관련 유투브를 반복해서 본 덕분이었다. 영업을 하는 부자재 가게들이 많아서 구입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초크만 해도 정말 다양했다. 옛날식 삼각형 분필형 초크, 물에 녹는 수성 초크, 일제 가루 초크 중에서 우리는 가루 초크 하나와 수성 초크를 색상별로 여러 자루를 샀다. 기본 색상의 재봉실과 60센티 자, 고정핀과 고정집게, 재봉틀 북도 몇 개 샀다. 재단 가위는 언니 것과 내 것을 다른 색으로 각각 하나씩 마련했다.  



안감까지 구입하다보니 원단이 보기보다 무거웠다. 아침도 거르고 나온터라 출출했다. 먹자 골목으로 가서 동대문종합시장의 시그니처 메뉴인 고등어 자반 백반을 시켰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고등어 자반 냄새가 혹시라도 천에 배일까봐 걱정이 되었다. 허겁지겁 먹고 재봉틀이 있는 언니집으로 갔다. 



설레는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언니네 거실에서 쇼핑 해 온 물건들을 펼쳤다. 

"희끄므리한 천하고 검은 천이 어디갔지? 시장에다 놓고 왔는 갑다." 

"그럴리가 있나?"그럴리가 있었다. 원단가게에서 천을 넣어 준 검은 봉지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물건 값을 치루면서 언니가 챙기고 있겠지 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고 언니는 언니대로 부자재를 고르느라 어수선한 상태였었다. 

"언니야, 내가 옆에서 계속 잔소리하면서 언니를 정신없게 만들어서 그렇다, 내탓이다."

"아니야, 내가 못챙깄으니까 내탓이다, 그나저나, 천 가게에서는 분명히 들고 나왔거든, 가만 있자, 실집, 끈집, 천집, 가위집 중에 아무래도 가위집에 놓고 온 것 같아."


우리는 원단을 찾기 위해 다시 동대문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역 앞에 내려서 지하철 4호선을 갈아탔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우리는 이 사건을 두고 앞으로도 이와같은 복병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사인이라고 해석했다. 



"언니야, 근데 형부 말이야, 왜케 티비 소리를 그렇게 크게 해 놓는 거야? 매일 그렇나?"

"항상 그렇지, 티비 소리 땜에 거실이 울린다. 송신하기 짝이 없다.(정신없다와 비슷한 의미의 경상도 사투리)."

"언니야, 언니도 집에서 형부랑 같이 있기 어렵겠더라. 형부는 그래도 살림은 잘 하잖아, 웅이 아빠는 집에 있으면 하루 종일 어지른다. 사람이 얼매나 더러운지 몰라." 

우리 자매는 우리의 남편들이 얼마나 함께 있기 힘든 사람인지에 대해 동대문 종합시장에 도착할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지하철을 내리면서 "인간들이 귀가 간지럽겠다." 하고 웃었다. 



동대문 시장에서 언니는 가위집으로 가봐야 겠다고 하면서 나더러는 실집과 끈집을 가보라고 했다. 그런다고 대답은 했지만 어디가 어딘지 도통 분간이 되지 않았다. 겨우 실집을 발견했다. 실집 사장님은 퇴근하려고 진열했던 상품들을 천으로 덮으며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내가 말하는 천이 들어 있는 봉지는 없더라고 했다.    

끈집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언니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데 언니가 눈 앞에 나타나 천이 들어있는 검은색 비닐 봉지를 흔들었다. 가위집에서 찾았다고 했다. 춤이라도 출듯이 기뻤다.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다시 언니 집으로 돌아가니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두꺼운 마분지로 본을 만들고 나서 천위에 본을 놓고 초크로 그렸다. 본을 따라 재단을 한 후, 재단을 한 천을 언니가 재봉틀로 박았다. 돌돌돌돌 박음질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겨우 4개 밖에 만들지 못했는데 9시였다. 형부가 통닭을 시켜 주었지만 입안이 깔끄러워서 먹을 수가 없었다. 

형부는 "처제가 소품에 꽂혀서 식음을 전폐하고 달려드는구만."했다.



정말이지 피곤함도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샘플이 웅이 마음에 들어야 할텐데, 과연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샘플이 괜찮으면 본격적으로 재고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언제까지 웅이가 제시한 재고량을 맞출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날짜 계산으로 신경이 곤두 서 있어서 그런지 음식이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다음 화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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