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분홍소금 Oct 30. 2024

동대문에서 길을 잃다

교회 주일학교 교사 수련회를 가려고 금요일에 휴가를 냈다. 오후 4시반에 집에서 멀지 않은 역에서 출발예정이라 그전에 동대문 종합시장에 가기로 했다.



언니와 내가 동대문 시장을 갔을 때는 공휴일이거나 토요일이어서 원단을 취급하는 2층과 3층 가게들이 문을 닫은 상태라 아쉬웠었다. 동대문 시장을 평일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평일에 가서 지하에서 3층까지 다 휘저으면서 둘러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찾는 원단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찾는 원단은 다름 아닌 코드류이였다. 웅이는 코드류이까지 추가하면 이모가 너무 힘들것이라며 그런 것은 다음에 천천히 해도 된다고 했지만 우리는 이번 겨울 상품으로 코드류이를 꼭 넣고 싶었다. 웅이가 하지 말라는 것은 두 말 않고 하지 않았던 우리였지만 코드류이는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다. 웅이가 그렇게 말해도 우리는 웅이한테 일단 만들어서 보여주자고, 막상 우리가 만든 것을 보면 웅이도 좋아할 거라고 하면서 평일에 동대문에 가서 코드류이 천을 꼭 사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수련회 덕분에 평일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은 나의 심정은 개봉박두를 목전에 둔 마음 그 이상이었다.

웅이에게 동대문에 함께 가는게 어떠냐고 하니 웅이도 좋은 생각이라고 하며 흔쾌히 따라 나섰다.



차를 타고 가면서 웅이에게 동대문에서 우리가 할 일을 미리 일러 주었다. 이모가 사라고 부탁한 몇 가지와 두 가지 색상의 코드류이와 재봉 부자재를 산 후에 '먹자골목'에 가서 점심을 먹으면 우리의 미션은 끝난다고.



드디어 동대문 시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먼저 2층과 3층을 둘러보기로 했다. 두둥! 2층에 올라가니 일단 시장 안이 너무 조용했다. 예상대로 라면 2층에서는 가게마다 원단을 롤에 둘둘 말아서 세워둔 원단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기대한 장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계단 바로 옆 가게마다 원단들이 이것 저것 쌓여 있거나 원단 롤 기둥들이 서 있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자투리 천이었다. 자투리 천은 지속적으로 공급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선뜻 구입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가게들은 원단 롤을 세워두고 손님이 필요한 양 만큼 끊어서 파는 대신 옷감 견본을 묶은 책자를 구비해 놓고 있었다. 직원은 우리가 견본 책자를 보고 마음에 드는 원단을 주문 하면 4시반 이후에 창고에서 올려다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샘플을 준비중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주문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원하는 천을 구할 수가 없었다.



대실망이었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웅이가 "여기가 인터넷 판매로 전환했나 봐, 온라인 판매를 주로 하니까 사람이 많은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문을 닫는가봐, 앞으로 필요한 원단은 온라인으로 사고, 대량으로 살 때는 오후에 와서 주문 먼저 해 놓고 시간에 맞춰 받아 가는 식으로 해야겠다. 필요한 원단 구입에 대해서는 내가 더 알아볼게. 내려가서 이모가 사오라는 것과 부자재 사고 집 가면 되겠어." 결론을 내린 듯한 웅이의 말을 듣자 실망한 마음이 급해 졌다.

"무슨 소리? 모두가 이런 식으로 판매를 하는 것은 아닐거야, 찾아보면 원단 롤을 구비해 놓고 소매 손님을 받는 집도 분명 있을거야, 좀 더 돌아 다녀 봐야지."



원단기둥이 보이는 가게를 향해 미친듯이 돌진했다. 몇 군대를 가봤지만 내가 찾는 코드류이는 없었다. 이번에는 웅이가 다리에 힘이 빠지는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하면 안 돼, 그만 보고 부자재 사러 내려 가자."

"여기는 원래 주먹구구식이야 무식하게 발품으로 해결하는 데라고, 이왕 왔으니까 좀 더 돌아 보자, 한 집만 찾으면 돼,그 집에서 샘플용으로 얼른 사고 나서 그 때 미련없이 내려갈게."

웅이는 마지못해 따라다니는 티가 역력했다. 다니다 보면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웅이의 그런 모습을 보니 그 때 부터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웅이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2층3층을 마구 누비고 다녔다. 종횡무진으로 쏘 다녀 보았지만 내가 원하는천이 없었다. 코드류이를 소매로 파는 가게들이 몇 군데 있었으나 언니와 내가 원하는 색상과 디자인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가게마다 앵무새처럼 주문하면 4시30분 이후에 올려다 준다고 했다.



웅이는 답 나왔는데 헛고생을 하냐고 살 걸 사고 가자고 했다.  결론이 났지만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마지못해 지하로 내려 가면서 그때까지도 꽂혀 있는 것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하는 고생이 왜 헛고생이냐? 이까짓 고생이 뭔 대수냐? 이런 고생도 안하고 무슨 일을 하냐?" 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온 몸으로 화가 난 티를 내며 언니가 부탁한 누비천과 부자재를 사고 억지로 원단시장을 빠져 나왔다.  

점심을 먹기로 한 '먹자 골목'에 들어 섰으나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오느라 아침밥도 거른 상태였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웅이도 엄마가 안 먹겠다고 하면 자기도 사무실 근처에 가서 먹겠다고 했다.



바쁘니까 서로 갈길을 가자고 하면서 돌아오는데 마음 같아서는 동대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끝까지 마음 먹은 것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짜증과 분한 마음, 허탈한 마음이 뒤섞여서 마음이 무거웠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차근차근 이유를 짚어보니 생색과 질기디 질긴 내생각에서 비롯한 아집이 나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애초에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이 컸다. 평일에 오면 뭐든 다 될 것 같았던 기대와 흥분을 자제하지 못했다. 어린아이와 같이 들뜬 마음으로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서 오는 욕구의 좌절로 인한 분노와 짜증에 속수무책으로 휩싸였던 것이다. 한가지 생각에만 꽂혀서 달라진 원단 구입 방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키지 않아 하는 아들을 끝까지 끌고 다니면서 고생을 시켰다.



내 맘대로 기대하고 혼자 실망했다. 휴일과 마찬가지의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기대와 흥분으로 저멀리 달아나 있었던 피곤함과 과로로 인한 통증이 되돌아와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이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왜 이 모양인가? 하며 강하고 질긴 내 모습에 대한 자책도 밀려왔다. 내가 혹시 평생 이런 식으로 살아온 게 아닐까? 웅이가 이런 엄마와 함께 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톡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휴대폰을 열려고 하는데

웅이에게서 먼저  톡이 와 있었다.



"엄마 나 지금 동대문 시장이야, 동대문 여기 저기 찬찬히 둘러보고 있어. 오늘 소득이 많았어. 수확이 좋아, 내가 뭘 더해야 할지도 확실히 알게 되었어. 엄마 덕분이야, 동대문 시장 같이 가자고 해 줘서 정말 고마워."

장문의 톡을 읽으며

'아들아, 너가 나보다 옳도다.' 가 저절로 나오며 지옥에 빠져 있던 심신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아들과 여러번의 톡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나자 비로소 시장기가 돌았다. 덕분에 집 근처 맛집으로 소문난 분식집에 가서 잔치국수와 깁밥을 시켜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흩어진 정신을 가다듬고 교사수련회 출발 장소로 가기 위해 바지런히 움직였다. 기대와 흥분이 다시 찾아왔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