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고마운 회원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내가 너무 성급하게 이직을 덜컥 한 것은 아닐까?
이전 직장은 특성화 고등학교였는데 거기서는 학생들을 만나서 취업상담을 했다. 자소서 쓰기 수업도 하고 학생들이 직접 쓴 자소서 피드백을 해주었다.
지원하는 기업의 경영목표, 인재 상에 맞게 지원동기와 포부를 쓸 수 있도록 핵심 포인트를 일일이 알려주었고 면접에서 지켜야 할 태도와 면접관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법등을 지도했다.
그 일은 나의 적성에 꽤 잘 맞았다. 근무시간 내내 학생들의 자소서를 수정하고 피드백 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힘든 만큼 보람도 있었다. 무엇보다 상담과 피드백을 하며 나도 아이들과 함께 덩달아 성장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거기에서 일을 해야 할 이유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일 자체가 적성에 맞는다는 것 빼고는 좋은 게 하나도 없었다.
3월~12월까지 계약이 끝나면 퇴직금도 없고 다시 취업을 해도 조기 취업수당도 받을 수가 없었다. 12월에 계약이 만료되면 1월과 2월은 실업자가 되고 재취업을 위해 자소서와 면접을 또 쓰고 봐야 한다. 그리고나면 대개는 같은 학교(못가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음)에 가서 10개월을 한 번 더 일 할 수 있지만 규정상 그 이상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2번의 계약이 끝나고 나면 또 취준을 해야 한다. 일자리때문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이런저런 잡다한 일을 구하기 위해 동부서주해야 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일자리의 질도 떨어질 것이 뻔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작년 공채에서 예비번호를 받은 곳에서 연락이 왔던 것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승낙을 했고 바로 이직했다. 생각도 못했는데 정년을 보장받는 정규직이 되었다.
이직한 직장은 취업상담교사와 정반대로 모든 조건이 다 좋은 데 일에 대한 가치는 아니올씨다 이다.
물 좋고 정자 좋은 데가 없다는 말이 딱 맞다. 지난주에 센터 회원에게 호되게 당하고 나니 더욱 이직을 한 나의 결정이 과연 옳았나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내가 정말 돈을 좋아하는 사람 맞구나, 정규직이 뭐라고 거기에 목을 맸을까? 일이 주는 가치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뭘 하자고 이리로 왔나 싶은 마음이 계속 맴돌았다.
오늘 사무실에서 팀장님이 그 분이 정식으로 민원을 제기하지 않았으니 시시비비를 따지면 뭐가 좋겠냐 하며 그걸로 됐다고 간단히 마무리를 했다.
나는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오만 정이 떨어져서 누구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내 처지가 딱해 보였는지 사람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었다. 왜 풀이 죽어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나의 까칠하고 불친절한 사수도 태도가 한층 누그러졌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은 늘 민원인을 상대하는 업무를 하는 나에게 고마운 사건일 수도 있다. 입사 초기에 민원인에게 매운 맛을 봄으로서 앞으로 있을 지도 모르는 큰일에 대한 대비를 할 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 깨어 있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매사에 각별히 조심해서 처신해야 함을 온 몸으로 체득했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게 해 주고 나를 깨어 있게 해 준 그 회원님께 오히려 감사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