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의 스토리텔링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는 특이하다. 일반적인 액션-스포츠 영화와는 다른 점이 느껴진다. 비슷한 장르의 타 작품들은 아래의 공식을 따른다. 나쁜 짓을 일삼는 강한 상대 또는 챔피언이 있다. 그들은 주인공을 괴롭히거나 곤경에 빠트린다. 반면 주인공은 너무나 불상한 존재로 그려진다. 왕따를 당하거나,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신체적으로 불구가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악역을 맡은 상대로부터 자극을 받고 주인공은 노력을 한다. 주로 몽타주 방식으로 그려내는 장면들을 여러분은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숱한 역경을 이겨낸 주인공은 마지막에 극적으로 그 상대를 대상으로 승리를 한다. 관객들이 최대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그런 성장식 구조를 따른다. <록키2>, <겟썸>, <리얼스틸>등의 영화가 그러하다.
하지만 <주먹이 운다>는 다르다.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인 강태식(최민식)은 가정을 책임질 아버지이자 잊혀진 운동선수이다. 광장 한 복판에서 인간 샌드백이 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믿었던 후배 원태(임원희)가 돈을 훔쳐 달아나고, 아내와도 이혼을 하여 아들과 멀어졌다. 졸지에 노숙생활을 하게 된 태식은 지하철 역사에서 복싱 신인왕전 광고를 보게 된다.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대회 출전을 작심한다.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자, 상금으로 재기도 하고 신체포기각서까지 작성한 원태도 구해내고자 한다.
유상환(류승범)은 비루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위 말하는 양아치 짓을 하고 다녔고, 합의금을 구하려다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교정소에서 처음으로 복싱을 접한다. 처음에는 자신과 싸웠던 다른 교정소 동료를 이기고자 시작했다. 아버지가 공사판에서 일하다 사고로 돌아가시고, 곧이어 할머니께서도 입원을 하게 되자 마음을 고쳐 먹는다. 그 또한 신인왕전에서 우승을 하여 멋있는 손자가 되고자는 희망 하나로 죽어라 훈련을 한다.
두 사람에게 우승은 모두 간절하다. 이런 그들은 마지막 결승에서 맞붙게 된다. 이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은 쉽사리 한 명을 응원할 수가 없다. 우승은 한 명 뿐이고 둘 다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느끼지만 감독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 상황 자체가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분명 드라마틱한 결말을 원했던 관객에게는 석연치 않은 결말이다. 하지만 이쯤 되어선 누가 이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패자에게도 카메라 프레임이 주어졌다는 점. 이겨야 하는 간절함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점. 그들의 인생에도 스토리가 있다는 점.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 포인트다. ‘패배자 = 노력이 부족한 자’ 라는 인식을 깨버리고 그들의 스토리를 들어보자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감정이입을 하는 취지는 비극 문학의 특성과 닮아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알랭 드 보통이 쓴 책 <불안>의 한 대목이 떠올랏다.
- ‘패배자’라는 말은 졌다는 의미와 더불어 졌기 때문에 공감을 얻을 권리도 상실했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다는 냉혹한 말이다.
- 비극의 주인공은 윤리적인 수준에서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어야 한다.
- 이 인물은 동기가 악해서가 아니라 판단의 잘못이라 부른 것, 또는 일시적인 맹목, 또는 현실적이거나 감정적인 과실 때문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여기서 '운의 역전'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귀중하게 여기던 것을 모두 잃고 거의 언제나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내놓는다.
- 주인공에 대한 동점심, 주인공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생기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은 비극을 감상한 뒤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적 결과다. 비극 작품은 재앙을 피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재앙을 만난 사람에게 공감을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 비극은 죄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구조적인 면에서 순수 비극과 이 영화에 차이가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생명을 잃을 정도의 처지에 처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고전 문학 <오이디푸스 왕> 정도의 오리지널을 맛봐야 확인할 수 있다. 자꾸 겉을 돌려고 하지 말고 핵심을 보자. 이 영화와 비극이 가지는 그 역할을 말이다. <주먹이 운다>는 굳이 관객을 불편한 상황까지 이끌고 가서 패배의 상황을 보여준다. 결투가 끝나고 패배자의 슬픈 처지를 들추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태식, 상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덕분에 두 주인공 모두에게 공감을 할 수 있고 '이해'를 하는 경지까지 올 수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그 발버둥을 보았기에, 교도소에 있는 상환이나 실패한 아버지로 그려지는 태식을 더 이상 '한심한 인간'으로 볼 수 없다. 그렇게 류승완 감독은 진 사람과 지지 않은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그것도 세련된 방식으로 말이다.
대결구도의 승패에서 줌아웃 해 보면 더 많은 패배자들을 마주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항상 승리하는 법은 없다.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는 때로 떨어지기도 하고, 지기도 하며 그리고 뜻하지 않는 사고도 겪는다. 패배자라는 이름으로 불편해하지 말고 매도하지도 말라. 어느 누구도 그런 재앙을 피할 능력이 없다.
다시 뒤로 돌아가, 앞서 예시를 든 영화의 악역들을 살펴보자. 그들의 이야기는 심각하게 단편적으로 소개된다. 그런데 그들도 결승에 올라갈 자격을 갖춘 선수이다. 분명 그 뒤에는 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고, 승리에 대한 간절함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행히 각본상의 ‘나쁜 짓’ 덕분에 마땅히 패배하고 짓밟혀야 하는 명분이 생긴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편하게 감정이입을 하고 주인공에게 동조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는 언제까지는 영화 속의 이야기 일 뿐이다. 그 어떤 누구도 패배하여 마땅한 사람은 없다.
뭔가 찜찜한 듯한 결말을 보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 갈 때 쯤 상철(천호진)의 대사가 생각날 것이다. 말동무도 되어주고 국수도 대접해주며 기껏 베풀었는데, 술 취해 행패를 부리는 태식에게 던지는 한 마디이다.
이 세상에 사연 있는 사람, 너 하나뿐이 아니야.
이제 국숫집을 하던 상철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