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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Nov 14. 2019

<동백꽃 필 무렵> 엄마, 엄마의 엄마, 그리고 내엄마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엄마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만큼 엄마들을 하나의 원리로 대동단결 시키지도 않는다. 엄마들 모두가 제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엄마들은 결코 그러한 사실 때문에 뭉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엄마가 둘이 만난다면 제 자식을 위해서 서로 싸울 수도 있고 또 그렇게 한다. 그리고 또 그만큼 자식들을 함께 지키기 위해서 힘을 합칠 수 있음도 물론이다. 그리고 자식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엄마가 등장하는 만큼, 자기 자식을 버리는 엄마도 나온다. 그리고 자기 자식을 고아원에 버리는 그 엄마 또한 아이가 배고픈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자기 자식은 신경일랑 쓰지도 않고 SNS에만 열중인 그런 엄마도 나오며, 그런 무책임한 엄마의 엄마도 나온다.


그런 점에서 그 엄마들은 어떤 점에서는 엄마답고, 엄마답지 않다고 할지라도 또 누군가의 딸답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엄마다움을 끄집어 낼 수도 없고, 엄마답지 않은 사람조차도 엄마가 있고 그 엄마를 알고 있다. 그런 모든 엄마들은 모두 엄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모두 다 같은 엄마라고 해도 그런 엄마끼리 싸우기도 하고 힘을 합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 사실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양보하라고 윽박지르기도 한다.


어떤 엄마는 끝까지 여자로 남고 싶어 하기도 하고, 엄마가 되는 대신에 능력 있는 남편의 '와이프'로 남으려 하기도 하며, 그 모두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남자의 구애를 물리치고 그냥 엄마로 남으려 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람을 강제로 엄마로 만드는 만큼, 그러나 엄마도 자식을 위해서 스스로를 엄마가 되기도 한다.


그 안에서 어떠한 '모성'이라는 것을 하나의 한 줄기로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엄마를 정의 내리기란 여간 쉽지 않을 것이다. <동백꽃 필 무렵>은 그 다양한 것들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서사를 드러내고 있다. 무언가 공유하면서도 또 차이를 가진 그 엄마들은 갈등한다. 자기 자식 때문에 갈등하고, 자기 자식과 갈등하고, 자기 자식을 지키려고 갈등하고, 자기 자식을 지키려다가도 오해를 낳아서 갈등하고, 자식이 상처 줘서 갈등하고, 자기 자식을 상처 줘서 갈등한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엄마를 떠올리면서도, 또 어떤 엄마들은 자신의 자식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나를 살게 해 주었던 자식. 그리고 또 내가 살렸던 그 자식. 그리고 나를 힘들게 하고, 또 내가 힘들게 했던 그 자식. 그러다 문득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들은 또 자신의 엄마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어떨까. 누군가는 배운 대로 가르쳤다고 변명하고, 또 누군가는 내가 입은 상처는 절대로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 없으면 살지 못하겠다고 우는 애를 가난을 달여 먹이더라도 함께 해야 하는지, 그 울음을 뒤로하고서라도 결별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어떤 선택이든 조금이라도 모자란 것이 있으면 그것에 또 아파할 것이다.


그 안에서 엄마를 정의 내리려다가. 문득 그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내가 아는 엄마는 오직 나의 엄마. 나를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엄마와 힘을 합쳐 아이들을 모아 영어 노래 대회에 나가게 만들기도 하고, 얼굴에 기스가 난 것을 보며 당장 그 집에 전화해 눈에 불을 켜고 다른 집의 그 엄마에게 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 엄마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엄마가 되기도 했고, 엄마인 게 너무 힘들어서 엄마가 되지 않으려 하기도 했고, 그러다 결국 그 누가 뭐래도 스스로 엄마가 아닐 수 있는 그런 방식은 어느새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애새끼가 밥을 못 먹는 것만 생각해도 잠을 못 자는 사람이 되었고, 자식 자랑과 자기 자랑을 구분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엄마가 없으면 엉엉 울던 아이가 어느새 자신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서운하고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없어도 늘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만을 여전히 소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엄마에게서 바보 같은 아들은 우연히 시청하게 된 그런 드라마를 통해서나 당신을 겨우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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