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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Dec 04. 2019

<몽마르트 파파> : 여전히 지속되어야 할 삶


포디엄에서 또 좋은 기회를 주어서 오늘 관람하고 돌아왔다.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중등교육 미술 교사를 하다가 은퇴한 아버지가 꿈꾸는 제2의 삶. 그것은 파리에서 거리 화가를 해보는 것이라는 내용. 그 안에서 별다른 특별한 내용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관람 후 이러한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몽마르트 파파>는 지루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작위적이지도 않았다. 민병우 감독의 센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는 직접 내레이션을 녹음했는데, 어거지 설정을 만드는 대신에 자신의 목소리로 개입하여 주기적으로 다큐멘터리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그의 설명과 작중의 내용이 엮여서 관객의 웃음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그것은 순전히 감독의 내레이션의 기지에 달려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별다른 내용이 없는 이야기를 언변으로 포장하는 것이고, 좋게 이야기하면 꾸밈없이 정직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분위기를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극장>에서 나올법한 내용이다. 결말은 충격적이라기보다도 잔잔하고 평범했지만, 그만큼 현실적으로 와닿는 지점들이 있었다. 이 다큐는 한 명의 아버지가 은퇴하고 난 후 마주한 제2의 삶을 거창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삶은 이어지는 것이다. 그 안에서 지속 가능한 삶이라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고, 자연스러운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가 마친 후 전체적인 관객들의 분위기는 좋았던 것 같다. 나도 즐겁게 보았다. 줄거리를 보고서 이 영화의 관람을 고민하고 있다면, 나는 관람을 권하고 싶다. 이하로는 스포일러가 있다. 주의를 요한다.


1. 은퇴 이후 일어나는 일들





정년을 다 채운 은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노동을 해 온 날들 중 가장 노련했던 순간에 그 일을 그만둔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 순간은 가장 완숙한 날을 기점으로 하여 순식간에 미숙한 모습으로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렇게 나이를 먹은 그다음 날은 여전히 그에게조차 처음인 그런 날일 것이다. 하물며 은퇴 후에는 늘 하던 루틴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당혹스러울 것이다.


감독의 아버지 민형식씨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산책을 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다시 또 산책을 가고, 가끔 미술 교사를 했던 자신의 재능을 살려서 재능 기부를 하러 출강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가끔 강원랜드에 가서 오락하듯 슬롯머신을 하는 것도 그의 소소한 취미(?)가 되었다. 그것을 보고 있는 아내는 그 모습이 못마땅하다. 그것은 하릴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이 보기 싫어서 일 수도 있지만, 늘 무언가를 규칙적으로 하던 사람의 방황 자체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은 언젠가 우리가 모두 겪게 될 일이기도 하다. 한 가정의 가장을 예전에는 아버지가 도맡아 했지만, 이제는 여자건 남자건 모두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언젠가는 은퇴를 해야만 하고, 100세 시대에 우리는 남은 40년을 다시금 스스로 가꿔야 하는 것이다. 청년들이 취업을 앞두고 무기력증에 시달리듯, 늘 하던 일들을 그만두고 무차별적인 자유를 강제당한 은퇴한 자의 삶 역시도 무기력 속에서 방황한다. 그들은 다시 제 2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2. 가족이 하는 일



그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아버지의 계획 : "프랑스 파리에서 거리 화가가 되는 것." 그 목표는 어찌 보면 생뚱맞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에 아내 이운숙씨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더니 "니 아빠가 그 일을 잘 도 하겠다.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을 계속해서 되풀이했다. 그런 아내의 회의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민형식씨는 당당하게 "장을 준비해야겠다"며 응수한다. 나는 그러한 티격태격이 보기 좋았다. 그러면서도 아내인 이운숙 씨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했다. 내심 그 목표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면서도 사실은 남편이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서 열정을 되찾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욱 불을 붙이려고 남편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은퇴한 가장의 그 생뚱맞은 목표는, 그 목표에 이르는 구체적인 계획에 의해서 허무맹랑을 벗을 수 있게 된다. 아들인 민병우 감독은 아버지의 계획을 듣고 실제로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찾아본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거리 화가로 활동하기 위한 라이센스가 있다. 그 라이센스 취득을 위해서 심사를 거치는 절차를 찾고, 아버지를 도와 그 심사에 필요한 서류들을 내는 것이다.


나는 은퇴한 가장을 위해서 가족들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이 모습들을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식들은 부모가 은퇴한 이후에 조용히 살아주기를 바랄 수도 있을 것이다. 퇴직금이나 연금이 충분하다면, 그냥 일을 벌이지 말고,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고향에서 살아주기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는 자신의 전성기를 보내야 하는 자식들의 이기심이다. 그러나 민병우 감독은 자신의 다큐를 위한 좋은 소재(?) 때문이라고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그러한 생각들을 돕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도움이 아버지에게 새로운 목표를 실현하도록 했고, 가족들은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는다.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말했던 어머니도, 정말로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보자, 여전히 회의적이라는 듯이 툴툴 거려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3. 그리고 또 여전히 삶



파리에 도착한 가족들. 그쯤 되면 아버지든 어머니든 이미 충분히 깨우쳤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생의 과업 중 큰 것들을 이미 얼마간 해결했다. 이름을 길이 길이 남길 위인이 된 것도 아니고, 인류의 미래를 뒤바꿀 만한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 했다. 자식을 먹여 살리고, 학교에서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성실하게 지도했다.그것들을 충실하게 한 그 삶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면 족했고, 어디에 소개될 만한 놀라운 일들도 아니다. 그러나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그런 뒤에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 일 역시도, 여전히 지나온 삶의 연장선 상에 있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린다. 대단한 유명세를 떨칠 것도 아니고, 그림을 팔아 벼락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 당신의 그림 취향은 인상파 올드 스쿨의 어느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그 붓 터치는 모네에 의해서 완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이 마주하는 새로운 풍경 속에서 영감을 얻고, 현상을 곱씹어 본다. 그리고 그리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소매치기도 당하고, 여기저기 여행을 하면서 아내와 다투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러 나갔더니 비가 내리고, 그림이 팔릴만하니 화가들의 집단 파업에 동참하느라 그 기회를 놓친다. 그 안에서 자신의 그림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런 사람들이 늘 찾아 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민형식 씨는 그런 것쯤에 상처받지 않는다. 그는 은퇴한 사람이고 삶 안에서 대단히 특별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천천히 그려내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태도가 어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숙련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평범하지만 아주 힘들게 이룩한 그 삶 안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을 그리 되도록 한다.


그러한 삶은 무엇인가. 지속 가능한 삶이고, 여전히 지속되어야 할 삶이다. 라이센스가 허용하는 기간 동안 결국 그림을 한 점도 팔지 못했다. 아내는 남편의 그림의 가치를 모른다. 그러나 아내가 무엇을 신경 쓰는지는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림의 예술적 가치가 아니라 그저 함께 살아가는 내 남편의 건강과 가족의 안위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따라서 함께 파리에 온 것이며, 그림이 팔리지 않은 날 저녁에는 무언가를 기리듯 불교 경전을 노트에 필사했다. 그러한 삶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아도 지속 가능한 삶이며, 그 가정을 여기까지 오도록 했던 삶의 익숙한 굴레다.


그러며 살아생전 겨우 한점의 그림을 팔았다던 반 고흐의 무덤에 그들은 찾아간다. 그는 이름을 남겼지만, 너무나 슬프게도 요절했다. 그런 삶도 있는 것이다. 그 삶은 은퇴한 이후 삶의 위대한 평범성을 짊어지고 여전히 함게 살아내고자 하는 그런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일 것이다. 그를 통해서 또 무언가를 배운다. 그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어른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4. 그리고 나의 삶



은퇴는 고사하고 아직 미생의 삶을 살고 있는 젊은 날의 우리들은 무엇을 목적해야 할까. 우리는 호연지기로 살아야 할까 안빈낙도로 살아야 할까. 이 다큐멘터리는 "은퇴한 사람도 자신의 꿈을 꿀 수 있는데 하물며..."라는 교훈을 전하는 것 같지 않다. 애당초의 은퇴한 어른의 삶과 우리의 삶은 정말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버렸는지도 모른다. 젊은 날의 우리도 내 삶이 낯설듯이, 은퇴한 어른의 삶도 그처럼 낯설다. 그냥 삶이다. 그 삶을 우리는 각자 나눠가지고 산다.


그 안에서 여전히 우리는 무언가를 목적하며 살아야 한다. 그 안에서 함께 티격태격할 수 있는 사람들. 소소한 즐거움과 버팀목이 되는 사람들. 늘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무언가를 이룩하면서 배우고, 또 이룩하지 못해서 배우고, 가끔은 특별한 사건 안에서 배우고, 평범한 지리멸렬 안에서도 배운다. 그 삶을 지속 가능하도록 꾸려야만 한다. 포부를 크게 가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렇게 실행되는 일 안에서도 허탕을 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우리는 그를 통해 무엇을 느낄 수 있을 텐가? 그것을 느낄 수 있고 의미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 삶에 진정한 패배는 없다. 더 무르익어가는 그러한 삶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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