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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Dec 25. 2019

"그리워하지 말고 사랑해줘" : <차일드 인 타임>



씨네마포 현장

들어가며


<차일드 인 타임>을 시사회로 관람하고 왔다.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자리였다. 15명의 소수 인원을 대상으로 <씨네마포>라는 카페 겸 영화 굿즈를 판매하는 곳에서 진행되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평론가분께서 진행을 도와서 다 함께 이야기 나누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좋은 이야기가 오갔다. 소소하지만 따뜻하고 즐거운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초대해주고 진행해주신 포디엄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남긴다.


<차일드 인 타임>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출연할 뿐 아니라, 기획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구의 공이 크건 간에, 우선 이 영화는 아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하나가 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 영화가 가질 수 있는 풍부함을 제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이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의 질문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삶에 드러나는 크고 작은 비극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며, 그러한 대답에  맞춰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비극들을 반드시 거쳐야 하며 그것에도 불구하고 목숨이 붙어있는 한 대체로 더 잘 살고 더 열심히 살고, 또 어떤 일들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면서 무시하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도 엄마와 아빠는 늘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그들은 어떻게 당신들의 부모님의 장례식을 치르고도 삶을 살 수 있었던가. 그때 당신들은 '나는 아직도 죽으려면 멀었단다'라며 어린 자식들의 마음을 안심 시키면서도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처음 맞이해보는 이별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러나 도대체 언제부터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하나 둘 겪다 보면 자연스럽게 적응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직 어린 날의 아이들은 안심하기 위해서 그렇게 믿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야, 지금의 두려움과 불안을 장래로 미루고 유보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게 될까. 사실 삶은 늘 그때마다 처음인데 말이다.


생각이 이러한 곳에 이르면, 무시해 왔던 우리의 불안은 천천히 눈을 뜨고 점점 더 강하게 떨려오기 시작한다. 우리의 삶은 과연 안전한가? 혹은 우리에게 적응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기는 하는가? 오히려 재앙과 비극은 갑자기 찾아와서 우리를 한 번에 무너뜨리지는 않을까? 그리고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어른'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처음 겪어보는 견디기 힘든 비극 안에서 그들은 아이와 다름없는 방식으로 괴로워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것이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 안에서 한 명의 어른으로서 자신의 비극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여주고'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조금 난해할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다. 상징과 비유들이 주요한 서사 큰 줄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주 좋게 관람했고,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 늘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관람을 권하고 싶다. 2020년 1월 9일 개봉이다. 이하로는 스포일러가 있다. 주의를 요한다.


굵은 나무도 부러진다



이 영화는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아이를 잃어버린 과정이 아니라, 이미 예고 없이 벌어진 바로 그 일로부터다. 정황상 누군가 데려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테이큰>처럼 납치된 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현실적으로 되찾아지지도 않고 어떻게 되찾아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그 현실 안에서 제 딸을 잊어내고 새 출발을 하는 과정을 그리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피로하고 가슴 아프다. 


'쟁취하고자 하는 집착'과 '훌훌 털어내고 나아가는 포기'라는 쉬운 이진법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어떻게 사랑하는 딸의 부재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인가.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현실 안에서 나와 함께하는 고통과 그리움과 자책과 원망은 어떻게 다뤄야 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모든 것이 고민이 되는 이유는 그들의 선택지에 포기하고 죽어버리며 삶을 그저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어른의 암묵적 논의'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괴로워서 살아갈 수가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크고 작은 비극 안에서 그 두 가지의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정말로 큰 비극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화는 그것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정말이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우선은 보여준다. 


동화 작가인 스티븐은 딸아이의 손을 붙잡고 직접 쇼핑을 갔다 잃어버린 장본인이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아이를 찾아 수소문한다. 매일 아이를 찾는다는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며, 사립탐정을 고용한다. 그러나 그것을 그저 방관하는 아내 줄리도 있다. 그녀는 집 안에서 무기력하게 TV만 보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직접 발로 길길이 뛰는 남편을 보면서 무섭기 때문이다. 남편 스티븐은 매일같이 나가서 전단지를 붙이고 돌아오는데, 그때마다 함께 손 붙잡고 돌아와야 할 딸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한 실망에 지치는 것이고, 자신이 기대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외면상으로는 기대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다.


아이를 잃은 부모 앞에서는 도대체 건전하고 합의된 어른의 방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 아이를 데려갔다. 그렇게 데려간 인간이 나쁜 것이다. 그렇게 아무리 이야기를 해 봐도, 수십 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과거에 대한 후회다. '내가 조금 더 아이를 위해서 신경 썼더라면.' 자책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책하는 남편을 쉽게 용서하기란 어렵다. 원망이다. 그 대상이 가깝고 직접적일수록 더 쉽게 원망할 수 있다. '당신이 잃어버렸잖아.' 줄리는 남편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게 된다. 그럴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책임소재'가 아니라 '아이의 부재' 그 자체이다. 서로는 함께 하면서 아이의 부재를 더욱 강하게 느끼고, 아이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슬프기 때문에 각자의 다른 방식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더 싸우게 된다. 그러한 다툼을 종식시키고 싶지도 않다. 그런 다툼이 사라진다고  해도 여전히 아이는 돌아오지 않고, '돌아오지 않으니까 싸우지 말자'고 이야기할 겨를 도 없다. 모든 것은 그저 낯설고 처음이기에 사회적인 규칙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새로운 룰을 제정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 둘이 별거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모든 것이 괴로워 줄리는 외딴 시골마을로 떠난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는 규칙을 잃어버린 어른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법, 사랑하는 법, 스스로 먹여 살리는 법, 그리고 아이를 먹여 살리는 법들을 알아간다. 그러면서 점점 어른이 된다고 자부한다. 그러면서 타인에게 조언을 해 주고, 스스로도 과거의 경험을 미루어 또다시 늘 해왔던 대로 오늘을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고목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점점 굵어가는 이 노련한 나무는 묘목에 불과했던 시절과는 달리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그러나 정말로 거대한 바람이 예고도 없이 불어왔고, 나무는 부러진다. 그 어떤 과거를 찾아봐도 지금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대답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로 우리의 과거를 샅샅이 찾아도 대답을 발견할 수 없다면 과연 저 너머에 대안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산 사람은 살아야지" : 진보의 강박




그리고 딸아이가 사라진지는 3년, 스티븐과 줄리가 별거한지는 1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다. 스티븐은 줄리가 살고 있는 외딴 마을에 그녀를 만나러 방문한다. 둘은 다시 만나 관계를 가진다. 그러며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이 흘러 그 둘 사이의 복잡함은 조금 더 해소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그것은 딸아이의 부재다. 여전히 환영처럼 드러나고 꿈으로도 나타나는 딸의 모습이다. 그리고 함께 할 때 상실의 고통은 배가된다. 함께 있으면 계속해서 자신들이 무엇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가까스로 숨기며 버티고 있는지를 되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며 서로가 서로를 아직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둘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데에 합의한다. 그 합의가 이루어졌던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버티고 자신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그 어른의 강박이다. 그래서 우선하는 것은 계속해서 고통과 상실을 상기시키는 그 관계를 유보하고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오랜만이었던 그 둘의 만남은 그 둘에게 어떠한 변화를 준 것 같았다. 이를테면 계속해서 자신 곁에 나타나는 딸아이의 환영과 같은 공통 경험을 털어놓고 인정한다. 잊으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감정이다. 그것은 단순히 아픔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없앤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어딘가에 딸이 살아 있다면 반드시 되찾아야 할 현실의 문제로도 남아 있는 것이다. 여전히 포기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또 여전히 미루고 싶은 아픈 감정도 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다만 여전히 지속되어야 하고 딛고 일어나야 한다고 어른들은 강박적으로 생각했다. 아내 줄리는 시골로 가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과 피아노를 연주하여 수당을 받는 일을 시작했다. 스티븐은 동화 작가로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물고기가 되고 싶은 소년>의 이야기다. 그러며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자문 역할을 위해서 주기적으로 참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이루어진 두 부부의 만남 이후, 줄리는 스티븐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했던 대로만 하고자 하는 어른들의 강박증이다. 슬픔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묘수였다. 어쩌면 작은 것부터 하나씩 다시 배워보는 것이다. 그러며 피아노를 가르치는 줄리와 그것을 배워서 그녀에게 칭찬을 받는 스티븐. 그들은 어른이 되어서 잊어버린 '진정으로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천천히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성공적일 수 있는 걸까? 우리가 그 어떤 상처도 모르던 시절. 넘어지고 나서 엉엉 울어도 어디선가 부모님이 찾아와 나를 일으켜주던 시절. 그리고 이내 넘어진 상처는 아물고, 그전에 먼저 잊히곤 했던 그런 시절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그리고 그렇게 돌아간다고 해도 과연 그것은 옳은 것일까?


이러한 대답을 몸소 실천하고자 하는 인물이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중요한 서브플롯으로 다루고 있다. 그의 이름은 찰스다.


"물고기가 되고 싶어" : 퇴행의 욕구


찰스는 영국의 수상을 도와서 '유아 교육'의 정책의 실무를 맡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업으로 스티븐의 동화의 출판을 돕던 친구이자 동료이기도 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찰스는 스티븐과 식사를 한다. 그러면서 불현듯 시골로 내려가 은퇴생활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스티븐은 공직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또 자신의 출판일을 도와주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당황한다. 스티븐의 이런 반응에 찰스는 '자신답게 살고 싶다'는 수수께끼 같은 이유만을 남긴 채 정말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간다.


그런데 시골로 내려간 찰스는 여유로운 시골의 전원생활을 누리러 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가 집에서 요리를 하고 가사를 하는 새에, 찰스는 숲을 어린아이처럼 헤집고 돌아다닌다. 거기서 나무들을 이용해 자신만의 비밀 아지트를 만들기도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경치를 내려다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이 할애하는 것은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전쟁놀이 같은 것을 하는 것이다. 찰스는  '자신답게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일들을 자유롭게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결코 그것을 '자유로움'인 것처럼 미화해 보여주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 모습은 철저하게 기이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그의 행태는 병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퇴행적"이다. 


오랜만에 그를 찾은 스티븐에게 오줌이 섞였는지 뭐가 섞였는지 모를 것을 유리병 안에 담아 권하기도 하고, 함께 나무를 타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모두 정상적인 어른이었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제안들이다. 그리고 스티븐은 그런 찰스를 보면서 당연하게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지내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찰스는 말한다 : 


"내 안에 잃어버린 아이를 찾고 있어."


스티븐은 "잃어버린 아이"라는 말이 자기 자신에 대한 비유인 것처럼 느껴져서는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경멸스럽다고 호통친다. 그러며 원래 교양 있고 어른다운 너 자신으로 돌아오라고 말하며, 면도나 하라고 면박을 주고는 그 자리를 떠난다.


하지만, 찰스의 그러한 기행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역시도 그러한 '퇴행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물고기가 되고 싶은 아이>에 관하여 글을 쓰고 있다. 그는 찰스의 기행에서 찾을 수 있는 퇴행의 요구들을 자신의 동화에 투사하고 있었다. 왜 그 소설 속의 아이는 물고기가 되고자 하는가? 그 이유는 물고기가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흔히 물고기는 3초마다 자신이 무얼 했는지 잊어버린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소설에 다음처럼 쓴다 : 


"잊어버리고 싶다. 심지어 좋은 기억들조차도." 


왜 좋은 기억조차 잊어버리고 싶은가? 그 이유는 바로 그 좋은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들이 동시에 아픔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아끼던 대상에 대한 기억이, 현실의 상실을 비로소 아프게 한다. 그래서 상실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는 좋았던 기억조차 잊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망각의 태도, 늘 천진하게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오로지 눈앞에 놓인 것들만을 좇아 흙 밭을 뒹굴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괴로웠던가. 우리는 언제부터 지나온 삶의 무게에 짓눌렸던가. 그 이유는 우리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며 천진하던 날들을 잊어왔고, 그것들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찰스의 퇴행은 바로 이러한 단언에 반항하는 것이다. 내 안에 사라진 소년은 여전히 있다고 호소하고 싶은 것이다.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을 기행에 스티븐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 사라진 소년과 소녀에 대한 요구는 삶의 극단에서 허우적거리는 어른들이 한 번쯤 들어보았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러한 요구가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자들이 다시 어떻게 그 유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찰스는 실패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져버리는 길을 선택하고 죽어버린다. 


영화는 도대체 그가 무엇을 왜 찾고자 퇴행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아동 교육'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으며, 동시에 '동화'를 쓰는 스티븐의 글을 알아보고 출판을 도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러한 아이다움에 대해서 반 평생을 바친 사람이었고, 그러다 어른들의 입장에서 아이를 논하는 것에 환멸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엄숙한 어른들이 강제로 제거해버린 그런 아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에 그는 실패했고, 그는 목적을 상실한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


"그리워하지 말고 사랑해주렴" : 진보와 퇴행 사이에서



한쪽에서는 어떻게든 진보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어떻게든 털고 일어나고자 시도하는 스티븐과 줄리 부부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아예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퇴행의 요구가 있다.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것처럼 행동하는 찰스다. 결국 그 두 가지의 시도는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간다. 유아기로의 퇴행이 답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잊을 수 없는 것들, 반드시 떠올려야만 하는 것들을 가지고 가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를 떠올리도록 하는 것들, 그러나 좀처럼 현실적으로 되찾아 올 수 없는 것들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그러한 아픔 안의 진실은, 말 그대로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스티븐과 줄리에게는 딸 케이트다. 사랑했기 때문이고 또 너무 사랑해서 돌아오지 않는 딸의 자리가 너무나 슬프다. 그리고 그러한 슬픔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기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것이며, 그래서 또 살아내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잊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인도한다. 마치 '물고기가 되고 싶은 소년'처럼 말이다.


소년이 어른이 되고자 하는 순간, 그는 다시 물고기를 꿈꾼다. 그러나 물고기를 꿈꾸고 다시금 유아기로의 퇴행을 생각하는 그 순간은 오히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유년을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잊을 수 없는 것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결코 잊을 수도 없고 잊고 싶지도 않아서 삶은 순식간에 괴로워진다. 절대로 천진난만하던 날로 돌아갈 수 없다.  스티븐은 "좋은 기억조차도" 잊고 싶다고 적다가 자신의 입으로 이내 중얼거린다 :


"네 모든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 


어른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도대체 그들의 딸 케이트는 살아 있기는 할까? 살아있다면 되찾을 것이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속 시원하게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포기라는 것이 가능할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삶은 정말로 무서운 것처럼 느껴진다. 포기할 수 없는 패배가 있고, 동시에 아무리 되찾으려고 해도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과연 이 징그러운 삶을 버텨낼 수 있을까. 스티븐의 어머니는 스티븐에게 말했다 :


"네 아버지에게 너를 가졌다고 말하던  날이었어. 나는 그때 몹시 불안했단다. 네 아빠가 임신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랐거든. 그런데 말이야 그때 창밖에서 네가 보였어. 나는 그게 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단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리라는 것은 알아. 그러나 내게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단다" 


자신의 자식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살아 있는 것처럼 목격했다는 어머니의 증언.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그런 아이의 탄생을 겪은 엄마에게 그 순간들은 너무나 소중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엄마는 자신의 아들의 상실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아들에 대한 자기 사랑도 알고 있다. 그러며 그녀는 스티븐에게 말한다 : 


"케이트를 그리워하지 말렴. 그리워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달라. 그녀를 그리워하지 말고 사랑해 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어서 자신 앞에 펼쳐지는 아들과 딸의 환영. 그것은 하나의 부모가 자식의 존재를 제 삶을 아우르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하나의 메타포다. 과거에도 나는 마치 이 미래를 보았던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그 사랑은 연결되어 전체를 인정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처럼. 그 안에서 그녀는 그리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리움이란 지난 과거에 대한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대상은 이제 잊느냐 마느냐의 논쟁거리가 될 뿐이다.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아프지 않으면 가끔 꺼내어 보는 옛날 사진처럼. 그러나 정말로 과거인 바로 그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면 훌훌 털고 일어나서 걸어 나가야 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현재 진행형으로 내 곁에 있음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괴롭건 괴롭지 않건 사랑하고 있고 더 적극적으로 무언가 해야 할 그런 것이다. 


내 곁에서 나를 너무나 행복하게 해 주던 아이. 서툰 말로 엉터리 글쓰기를 하고 그것을 읽어가다 그만 나를 너무나 감동시켰던 바로 그런 아이. 그런 아이는 세상에서 태어나 부모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를 오로지 아이를 위해서 살아온 것처럼 만들어 버리기도 했고, 자신의 미래를 그 아이를 위해 뭐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마치 모든 미래와 과거와 현재는 그 사람을 둘러싸며 그 아이와 자신의 관계를 운명으로 만든다. 그래서 괴롭다. 그 아이가 자신을 떠나가서 괴롭다. 찾으려 해도 쉬이 되찾아지지 않아서 괴롭다. 그 괴로움에 살아내기가 어려워서 늘 쉽게 잊어버리는 물고기가 되고 싶다. 그러나 물고기가 되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이유는, 결국에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잊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함께 사는 것이다. 기억과 함께 사는 것을 넘어 더 적극적으로,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여전히 사랑한다. 다시 만나면 사랑한다고 말해줄 것이고, 다시는 말해주지 못해도 사랑하기로 한다. 그 안에서 딸아이를 되찾으려는 구체적인 노력들은 얼마간 뒤따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행위조차도 생사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절박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열 달 정도의 시간이 흘러, 스티븐은 자신의 아내의 전화를 받는다. 그녀가 출산한다는 소식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관계를 가졌던 그 두 부부의 새로운 아이였다. 스티븐과 줄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남자아이의 환영을 본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의 딸 케이트도 함께다. 스티븐은 케이트와 함께 걷는다. 그의 표정은 무언가 환희와 설렘과 두근거림에 젖어 있다. 


줄리는 오랜만의 출산에 혼신의 힘을 다하며 그를 찾아온 스티븐에게 말한다 : 


"남동생[brother]이야"


새롭게 태어난 아이는 사라진 케이트의 대체물이 아니다. 그녀의 "동생"이다. 다시 삶을 시작하게 해 줄 수단이 아니다. 그냥 아이다. 그러나 한 명의 가족이다. 그러며 그들은 딸의 빈자리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자리를 그들 곁에 두고 있다. 그러며 그 자리에 여전히 그녀의 딸이 앉아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가기로 하는 것이다. 그리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또 더 많은 사랑으로 새로 태어난 아이 곁에서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른이 되어 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둘은 다시 처음을 산다. 다시 부모가 되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남자아이의 부모가 되고, 처음으로 둘째 아빠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잊을 수 없는 딸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하는 그 삶의 태도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곳에 이르기까지는 얼마나 어렵고 고되었는가. 모든 삶을 다시금 복습했다. 글을  쓰고 피아노를 치고, 아이로 돌아가서 자신을 찾고자 했던 친구를 삶의 뒤꼍으로 보내야 했다. 다투고 이별하고 원망하고 자책했다.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고자 발버둥 치다가 수십 번 무너졌다. 그리고 이 삶으로 돌아온다. 그런 뒤에도 삶은 여전히 처음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어른이 되어가고,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언제나 그 처음인 그 삶을 잊지 않고 살아가 보겠다는 그런 다짐으로 완성된다. 그 완성은 여전히 미완의 삶을, 두렵고 힘든 그 삶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 삶 앞에 발을 다시금 발을 디뎌본다. 그 "다시금"이라는 말조차도 오늘에 와 여전히 처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때 그들은 처음 이 세상에 발 디뎠던 아이가 된다. 그러나 그만큼 먼 길을 거쳐 다시 아이로 돌아온 그들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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