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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Feb 13. 2020

영화 <빈폴> : 행복해지는 방법을 잊은 이들의 삶


들어가며


감사하게도 초대권을 받아 영화 <빈폴>을 관람했다.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레닌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점이며, 이 둘은 전쟁에 참여했던 전역한 지원병이라는 것이다. 전쟁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야 남녀노소 모두 막론하고 두루 화자 되었으나,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여성 지원병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흔하지 않다. 실제로 영화는 전쟁이 남긴 참사와 아픔을 여느 영화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로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흔한 접근은 전쟁이라는 것이 '트라우마'를 남긴다는 아이디어일 것이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전시 상황의 아픈 기억들. 사라져간 전우들. 그리고 더 이상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병든 신체.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전역한 두 여성 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시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직접적인 피 튀기는 전쟁 현장에 대한 기억이나 언급도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전쟁을 뒤로하고 나서, 묘하게 감도는 음울한 분위기와, 어떻게 해서든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들이 들려온다. 전쟁이라는 기억 자체가 그들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행복해지는 방법을 쉬이 떠올리기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전쟁이 끝난 후에 남은 상처들은, 상처의 추억이 씻기지 않아서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이 더더욱 문제이다. 행복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희망을 찾고자 하고, 행복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전후에 그러한 행복을 깨끗하게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다. 그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영화는 이에 대해서 대답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런 희망의 부재의 시대에 그녀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서술할 뿐이다. 영화 <빈폴>은 그 절뚝거리는 삶을 세련되게 묘사한다. 그 묘사는 소름끼치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하다. 행복해지는 방법을 잃은 자의 삶은 단지 슬퍼 보이지 않는다. 무섭다. 그 무서움과 이질감을 넘어서 발버둥 치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마침내 빠져든다.


2월 27일 개봉으로 예정되었다. 이하로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1. 아픔의 기이함



아프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이것은 아픈 이들이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아픔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다는 어떤 삶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픔이라는 것 자체가 벗어나고 싶은 것이며, 불쾌함보다 더 괴로운 무언가라는 점에서 그렇다. 고통이라는 것은 너무나 원초적인 것이어서, 그보다 더 근본적인 설명을 찾기가 어렵다. 통증 자체는 하나의 감각이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몸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뜨거운 것을 만지면 즉시 손을 뗀다. 고통은 그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하나의 신호인 것이다. 우리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 아픈 사람은 종종 무섭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슬프지만, 그러한 슬픔으로 당장 연결 지을 필요가 없는 사람의 아픔은 무섭다. 우리는 벌어진 상처를 보면 눈살을 찌푸린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피조차 보기를 두려워하기도 한다. 많은 상처들은 우선 불쾌감으로 다가온다. 그 불쾌감이 연민과 슬픔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상처의 소유자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타인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이해할 때일 것이다. 그러나 그전까지 아픈 사람들의 몰골은 우리를 우선 두렵게 한다.


영화는 전신이 돌처럼 굳어버리는 발작 증세를 일으키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이야'다. 그녀가 마비 증세를 일으킬 때면, 그녀는 그 어떤 감각에도 반응하지 못하고, 의식도 사라진다. 그 안에서 묘한 신음이 주기적으로 흘러나올 뿐이다. 우리는 그녀의 그 발작 증세는 전쟁에서 얻은 뇌진탕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를 알고 본다 하더라도, 마치 하나의 뻣뻣한 전봇대처럼 굳어버리는 그녀의 모습은 기이하게 보인다. 그 기이함은 그저 외형적인 기이함일 수도 있지만, 그 모습이 낯선 것이면서 동시에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모습은 불쾌하다. 그 불쾌감은 불편함으로 이어진다. 이미 벌어져 버린 상처. 그것은 이유가 뭐였든 간에 이미 터져버린 전쟁이고, 그 전쟁으로부터 필연적인 것으로 될 수밖에 없는 상처와 후유증을 남긴다. 영화는 전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궁핍한 사람들의 일상과, 이야의 발작 증세, 그리고 그녀가 전역한 후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병원 안 환자들이 전쟁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들의 삶은 안타깝지만, 잘린 팔은 다시 붙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이미 산산조각이 난 것 같다. 아픔 사람이 주는 불쾌감은, 그 아픔이 더 이상 나아질 수 없을 것 같을 때 가중된다. 희망 없는 고통이 타인의 고통일 때 우리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이야'의 상황을 더욱 처절한 것으로 만든다. 그녀에게는 이제 막 말을 뗀 듯한 작은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파슈카'다. 이야는 파슈카와 함께 뒤엉켜서 놀다가, 아이를 덮쳐서 얼굴을 부비는 와중에 다시 마비 발작 증세가 찾아온다. 이야는 발작 증세에 몸이 굳어버려 아이를 짓누른 채로 의식을 잃는다. 파슈카는 그런 이야 밑에 깔려 숨을 쉬지 못하고 질식사한다.


피할 수 없는 전쟁에 참여해서 얻은 상처에 의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통제할 수 없는 병을 얻었다. 관객들은 그 상처에 쉬이 안타까워하지 못한다. 온몸이 굳어버리는 기이한 현상. 그리고 그 증세로 어린아이를 질식사 시켜버렸다는 사실. 그 모든 것들은 단순히 그녀의 상처에 공감하고 아파하게 만드는 것을 방해한다. 오히려 우리를 당혹시키고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그녀가 작고 어린아이를 의도하지 않게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다. 더 나아가 시각적으로 꼼지락거리던 아이의 손이 점차 힘을 잃어가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섬뜩함을 느낀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렵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그녀는 자신 앞의 현실을 견딜 수 있을까? 심지어 그것은 그녀가 한 짓이라고조차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은 전쟁이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도하고 야기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피치 못한 아픔과 상처, 후유증을 가지고서 살아간다. 그들은 어딘가 아프고 병들어 있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은 기이하고 불편하다. 영화는 시종일관 그러한 모습들을 서술하고 있다.


2. 기준 없는 죽음



파슈카의 죽음이 있은지 얼마 후, 한 여자가 이야를 찾아온다. 그녀의 이름은 '마샤'다. 마샤는 이야가 전역하기 전에 함께 싸웠던 전우다. 그러면서 그녀는 파슈카를 보러 왔다고 말한다. 그러며 우리는 알게 된다. 파슈카는 사실 이야의 아들이 아니라 마샤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전장에서 만난 남자와 아이를 가졌고, 그 아이를 뇌진탕에 의해 의병전역하게 된 이야와 함께 떠나보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와 함께 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남편이 전사하자 복수를 하기 위해 전장에 남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아들을 보려는 희망도 잠시, 마샤는 이야의 표정을 보고 파슈카가 죽었다는 것을 짐작한다. 이야는 자기를 원망해도 좋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이야를 대놓고 원망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마샤와 이야 사이에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을 예감했을 테지만, 실제로는 그 죽음에 대해서 마샤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랄 의아하게 여길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이한 시절에 사람들은 기이하게 행동하는 수밖에는 없다. 아이의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이미 죽음은 그녀들 곁에 너무나 많이 있었다. 전쟁은 죽음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죽음의 반대인 '생명'이라는 것을 그 자체로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의문케 만든다. 어떤 생명은 소중하고 어떤 생명은 소중하지 않다. 내가 지켜야 할 생명을 위해서 기꺼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 과정에서 잃고 싶지 않은 죽음도 너무나 많이 지켜보게 된다. 지원병으로서 마샤와 이야도 그랬다. 그들은 지키기 위해서 죽였다. 그들은 대포를 다루는 사수와 부사수였다. 그들은 죽이기 위해서 전장으로 갔고, 그 과정에서 마샤는 남편을 잃었다. 복수하기 위해서 남았고, 베를린으로 전진했다. 너무나 많은 살인이 있었을 것이며 너무나 많은 상실이 있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죽음에 슬퍼하는 방법을 잊는다. 그것은 죽음에 무감해지는 것이 아니다. 무감해지는 것처럼 보일뿐이다. 문제는 기준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기준이 사라질 때 감정은 일괄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마비된다. 어떤 사람들은 죽이며, 어떤 사람들은 죽임 당한다. 그 안에서 나는 죽을 수도 있고 또 죽이는 주체가 된다. 그러며 소중한 사람을 잃고, 살기 위해 애썼으나,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죄책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어떤 죽음에는 슬퍼하려다가, 어떤 죽음은 복수로 이루어진다. 그 복수를 위해서는 슬픔보다 분노가 중요하고, 단순히 슬퍼만 하기에는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눈물을 틀어막는다. 그런 시절 안에서 죽음이라는 것들은 너무나 상대적인 것이 되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기준을 상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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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죽이는 전쟁터로부터 돌아온 '이야'는 결국 전쟁으로부터 도망쳤으나, 전쟁으로부터 얻은 마비 증세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의 아들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또 그녀는 자신이 일하는 병동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의 안락사를 돕기도 한다. 그 사내는 척추에 상처를 입고 전신이 마비된 남자였으며, 자신의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녀는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죽였고, 전쟁에서 얻은 병 때문에 우발적으로도 죽였으며,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 이를 위해서도 죽인다. 그 안에서 무엇이 상처이고, 무엇이 아픔이며, 무엇이 죄책감이고 무엇이 상실인지 이들은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이들을 괜찮은 것으로 만들어주기 못한다. 무의식적으로 불안과 아픔이고 고통은 뿌리내려 있다. 그러나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원인을 발견하면 해결은 할 수 있기는 한 것인지를 알 수 없다. 혼란 속에서 그들은 출구를 찾지만, 출구를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3. 거짓된 희망



자신의 분노와 상실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마샤. 그 때문에 그녀의 행동 역시도 기이하고 이상한 것이 된다. 그녀는 전쟁의 상처로 인해서 불임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야에게 자신의 아이를 대신 낳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녀는 아이가 생기면 자신이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착한 이야는 그녀의 부탁을 쉬이 거절하지 못한다. 그러며 그들은 실제로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한 일들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정말로 기이해서, 차라리 우울하다. 우리는 사라진 나의 아이가 다른 아이로 인해서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의 아이가 죽으면 우선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샤는, 감정을 잃어버린 로봇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 기이함의 깊은 이유를 발견한다. 남편을 잃고 복수하기 위해서 전장에 남은 마샤. 그녀는 차라리 자신의 아이와 함께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를 원망하기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으며, 더 나아가 아이를 잃은 슬픔에 무너져 버리면 아예 살아갈 수조차 없을 것 같다 두렵다. 그리하여 이야를 원망하는 것보다, 자신의 상실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버리는 것보다, 그냥 새로운 아이를 가지면 된다고 장담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마샤는 병원장을 협박하여 이야와 잠자리를 가지게 만든다. 남자를 무서워하는 이야는 울면서 관계를 가지고, 마샤는 그런 이야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관계를 가지는 이야 옆에 동침했다. '아기를 낳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이야는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가지고, 이야를 강제로 범하는 병원장 역시도 죄책감에 병원 일을 그만둔다. 이야에게 빚을 갚으라고 강요한 마샤 역시도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괴로움에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다.


정말로 꾸역꾸역 괴롭게 진행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이야는 임신을 하지 못한다. 이야는 그것을 차마 마샤에게 말하지 못하고, 마샤는 이야가 낳을 아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야는 자신이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만, 그 모든 것을 보는 관객들은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도 그들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한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다. 문제는 실제로 있다가 사라진 마샤의 아들 파슈카의 빈자리다. 그리고 전장에 묻고 돌아온 파슈카의 아버지다. 그리고 더 이상 임신을 하지 못하는 몸이 된 마샤의 몸이고, 언제 발발할지 모르는 이야의 마비 증세이며, 전쟁이 종결되었음에도 끝나지 않는 생활고다.


거짓된 희망. 그것은 이미 죽은 아이의 자리를, 새로운 아이를 잉태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이유는 희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있어서는 안 될 불행과 우울의 연쇄를 우리는 바라보지만, 그 모든 국면에 있어서 우리는 그 어디에 칼을 대야 할지를 가늠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저 재앙 같은 전쟁이 찾아왔기 때문이며, '종전'이라는 것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은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이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벌어져 버린 전쟁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다시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잊어버렸다. 어쩌면 행복해질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복과 같은 어떠한 희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기에, 그들은 희망을 만들어내야만 하고, 그렇게 고안된 희망은 그래서 거짓된 희망이 된다.


4. 기이함의 이유



한편 자신의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해서 부유한 집으로 결혼해 들어가려는 마샤. 이런 마샤를 보면서 이야는 질투심을 느낀다. 그녀는 마샤를 사랑했던 것이다. 이야는 남자를 만나 시집가려 하는 마샤에게 화를 내지만, 그러나 결국 마샤를 위해서 그녀를 보내주고자 한다. 그리고 마샤가 그토록 원하는 임신을 하지 못한 이야는 마샤를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짐을 싸던 그녀는 마샤가 오려던 찰나, 다시 마비 증세가 찾아와 짐을 싸둔 채로 굳어버리고 만다. 그것을 발견한 마샤는 자신을 버리려 했던 이야에게 화를 낸다. 그런 마샤는 정작 자신이 결혼하고자 하는 집에서 거절당한 뒤였다. 불임인 신체와 신분의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전쟁에서 남은 상처와 후유증으로 결국 서로에게는 서로만이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전쟁이 만들어 놓은 상처들은 그녀들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고, 그러며 그들은 괴로워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제거된 모든 선택지들이 사라진 남은 것은 그 둘 사이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필연적인 관계만으로도 여전히 삶은 우울한 빛깔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며 마샤는 다시 한 번 더 집착적으로 말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더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 희망에 기댄다. 그러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는 결코 남은 이야와 마샤의 삶 안에서 진정한 희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가지지도 않은 아이의 출산을 이야기하는 마샤와 이야의 이야기는 기이하면서도 슬프다. 아픈 이들을 기이하게 여기는 감정은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타자로 만든다. 하지만 그렇게 타자로 만드는 데에는 '무관심'과는 다른 더 깊은 이유가 있다. 그들의 병세가 호전되지 못하리라는 생각. 그때 사람들은 아픈 이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도리어 무력감을 느낀다.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들을 도울 수 없을 것을 알아서 눈을 질끈 감는 것이다. 그러니 기이함을 느끼는 심정 안에는, 타자를 짐짓 포기해버리려는 단념의 마음이 있음과 동시에, 단념을 넘어서 그들에게 마음 쓰는 마음도 이미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돌아볼 때, 우리는 그들의 삶에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꾸역꾸역 살아내는 이야와 마샤의 태도를 추적하며, 그저 기이하게 느껴지던 마음은 껍데기를 벗어낸다. 그들의 우울을 이해한다. 그들이 슬픔과 상실을 가까스로 무시하고 넘어가고자 할 때, 도리어 우리는 그들이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며 그들이 자신의 슬픔과 상실을 마주하지 못하는 이유까지도 이해하게 된다. 살아내고자 희망을 고안해내는 그들을 보면서, 오히려 관객들이 보는 것은 희망 없음이다. 동시에 그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에게 거짓된 희망조차 없으면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도 은연중에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희망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낼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아니다. 이야와 마샤의 삶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함부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픔을 받아들이고,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아가라고 어떻게 제안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그들의 고안된 희망을 바라보면서, 철저히 희망 없음을 바라보면서, 껍질을 벗어낸 기이함의 이면에 희망이 있다. 함께 우울해지고 침전하는 그 마음과 슬픔에 희망이 있다. 이제는 손닿을 수조차 없는 저 먼 과거를 보낸 이들의 삶에 이입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희망이 있다. 한 발짝 물러서면 다시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음울함이지만, 한 발짝만 더 들어가면 참을 수없이 슬퍼지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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