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하 Jun 15. 2020

영화 <밤쉘> : 그녀들은 어떻게 굴레를 벗었는가



시사회 초청을 통해서 11일, 용산 CGV에서 <밤쉘>을 관람했다. 관람 시 마스크는 필수였으며, 티켓을 배부할 때에도 초청자와 그 동반자까지 연락처와 성명을 수집했다. 줄을 서 있을 때에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엄격하게 유지했다. 직접 배급사 대표님께서 나와서 코로나19와 더불어 생길 수 있을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새삼 코로나19가 영화 시장에서까지 대단히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힘낼 수 있기를 바란다.


영화 <밤쉘>은 폭스 뉴스의 회장이던 로저 에일스의 성착취와 관련한 실제 사건을 다룬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여성주의적인 요소와 깊게 관련되어 있지만, 단순히 그 측면에만 주목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점에서는 폭스 뉴스가 상징하는 미국의 답답하고 꽉 막힌 ‘보수 주의 일반’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미국 보수 주의와 언론 사이의 유착의 문제, 성소수자 억압의 문제, 폭스 뉴스사 내부에서 정치적 자유의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룬다. 그런 점에서 드러나는 것은 특정 이념이라기보다도, 권력 자체가 가질 수 있는 폭력성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의 집약체이자 비리의 상징인 ‘로저 에일스’의 비행과 몰락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그러한 일련의 내용을 간판 앵커인 ‘메킨 캘리’, 회장 로저와 사이가 틀어져 퇴직하게 되는 ‘그레천 칼슨’, 간판 앵커가 되려는 야심을 가진 ‘케일라 포스피실’ - 이 셋의 금발 미녀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굳이 ‘금발 미녀’라 언급한 이유는 영화의 제목인 <밤쉘>이라는 내용이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Bombshell’이라는 것의 첫 번째 의미는 ‘폭로’이다. 즉, 로저 에일스의 부정에 대한 폭로를 상징한다. 다른 하나는 ‘금발 미녀’라는 의미다. 보수적인 언론사 내에서 능력이 아닌 그저 여성으로서 대상화되어 그것을 통해 승진과 퇴직이 좌우되는 부당한 현실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폭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밤쉘’이라는 것은 영리한 제목이라 할만하다.


한편, 영화의 서술 방식은 <빅쇼트>제작진이 참여했다고 홍보되었던 만큼, 영화의 형식은 ‘빅쇼트’의 그것이나, ‘더 울프’와 같은 영화의 그것을 닮아있다. 실제 사건을 다루는 내내, 특별한 제 삼자의 해설이 등장하지 않고, 등장인물들이 제4의 벽을 뚫고 관객들을 향해서 직접 설명한다. 그 안에서 복잡하거나 루즈해질 수 있을 실제 사건의 재현을 부드럽고 경쾌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장르와 이러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 영화를 흥미롭고 진지하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7월 중에 개봉 예정이며, 아직 구체적인 날짜는 공개되지 않았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확정되어 있지 않은 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미리미리 예의 주시 하기를 바란다. 이하로는 스포일러를 포함한 분석이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왜 세 여성인가? : 과거와 현재와 미래



하지만 그러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녀가 여성으로서 희롱되고 농락 당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영화는 트럼프와의 설전을 통해서 이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차기 대통령 유력 후보인 트럼프와의 설전에서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에 트럼프는 정면으로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갖갖은 희롱을 통해 응수하고 웃어넘겨 버리는 것이다. 그를 통해서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해하지 않고 희롱하며 동조한다. 그 안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리고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지나치게 시달린 나머지, 결국 트럼프와 적당히 타협 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간신히 손에 넣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비되는 여성성을 감내해야 하는 그녀는 여전히 간판 앵커이며 폭스 뉴스의 ‘현재’이다.영화의 화두는 간판 앵커인 ‘메킨 칼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녀는 폭스 뉴스의 ‘현재’라고 할 법하다. 그녀는 스스로를 ‘빅 마우스[Big mouth]’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이 폭스 뉴스 안에서 어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그녀는 트럼프와의 설전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기득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폭스 뉴스의 회장만큼은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발화 권력이라는 것이 있다. 빅마우스다.


그러는 한편, 다른 한 명의 금발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그래천 칼슨’이다. 그녀는 로저 에일스와의 관계가 틀어지며 결국 폭스 뉴스에서 해고당한다. 그리고 그러한 계기 안에서 그녀는 로저 에일스가 자행한 성착취를 폭로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본론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그녀를 통해서이다. 그녀는 이미 한차례 전성기를 보내고 난 뒤에 로저 에일스의 심기를 거슬러 퇴직하게 된다. 그녀의 폭로는 여러 가지 비난에 휩쓸린다. 단지 그녀가 ‘퇴물’이 되어 ‘해고’당했기 때문에 ‘물귀신 작전’을 쓰는 것이 아니냐는 투의 지적들이 그것이다. 더 이상 폭스 뉴스에서의 미래는 없으니 스크래치라도 내기 위해서 발악하는 것으로 화자 된다. 그것이 사실이건 어떻건 그녀는 폭스 뉴스를 나온 여성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폭스 뉴스에 몸담은 여성의 ‘미래’이다.


한편, 폭스 뉴스의 정점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또 한 명의 금발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케일라 포스피실’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으며, 폭스 뉴스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며 자아를 실현하기를 희망하는 열렬한 신입이다. 그녀는 정점에 올라가기 위해서 로저 에일스와 직접 면담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거기서 그녀는 자기 자신의 능력과 꿈, 그리고 폭스 뉴스에 대한 사랑을 한껏 어필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성적 요구’였다.


그녀는 앞에서 말한 폭스 뉴스의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두 여성의 과거를 보여준다. 그녀들은 모두 출중한 능력을 가진 대단한 여성들이지만, 가장 중요한 승진의 기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요구받는 것은 그녀들의 능력이 아닌, 그녀들의 대상화된 여성성이다. 그러한 부당하고 수치스러운 도전들을 현재와 미래를 살다간 여성들은 ‘과거’에 케일라와 같은 일들을 크고 작게 겪어왔던 것이다. 케일라는 그런 폭스 뉴스의 어두운 과거를 대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여성은 별개의 시간을 살고 있는 별개의 사람이 아니라, 보수적인 언론사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연결된 한줄기의 시간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세 여성의 상이한 시간이 연결 됨으로써 폭스 뉴스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시간은 ‘굴레’가 된다. 영화의 핵심은 그러한 굴레가 어떻게 균열이 발생하고 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대가성 성착취의 기이한 구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대가성’이라는 말을 쓰기에도 부당하다. 애당초 ‘교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성’이라는 것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지불하며 그를 통해서 무언가를 ‘구입’하기에는 깊은 정신적 충격과 수치심, 그리고 트라우마를 남긴다. 특히 직장 안에서 그러한 요구들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며, 그것이 새어나가기라도 했을 때에는 조롱거리가 되어 2차 가해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대가성 성착취는 ‘뇌물’이나 ‘연줄’과 같은 다른 비리들과는 분명히 다른 양상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로 그것을 부당하게 요구받았을 때 그 요구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직장 안에서의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는 개인으로서 존립할 수 없다. 그것이 유리천장이라는 것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여성들은 능력으로 승부하지 못하게 되고, 화장이나 짧은 치마를 강요당한다. 그러며 오직 그것으로 승부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안에서 온전한 능력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그녀들이 그러한 요구들을 통해서 계급의 위로 올라갔다고 할지언정, 그 사실이 마치 공정한 거래를 한 것인 양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케일라의 눈물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떠한 상처를 남기는지, 그리고 또 그러한 과정들을 어째서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 그래서 더욱 그 상처의 골이 깊어지는지다.


권력이 변명하고 자기 자신을 은폐하는 방식



한편, 그래천 칼슨이 로저 에일스의 성착취 사건을 폭로한 이후, 로저 에일스는 갖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비리를 변명하고 은폐한다. 변명하는 하나의 방식은 그가 한 ‘업적’들에 대해서 떠벌이고 다니는 것이다. 그는 대단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며, 그에 의해서 오늘날의 ‘폭스 뉴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업적에 의해서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었고 그로 인해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은 그의 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되기는커녕, 사실상 그가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근거가 된다. 사람들은 그를 거치지 않고서는 승진할 수 없고 계급의 위로 올라갈 수 없다. 바로 그 사실이 그가 당당하게 성착취를 저지를 수 있었던 이유이지, 그의 죄가 없었던 것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사람들의 입막음이 시작되기도 한다. 간판 앵커 매킨 칼리는 그 때문에 그래천의 폭로에 쉽게 동조하지 못한다. 그녀 역시도 부당한 성적 접촉을 로저로부터 당했지만, 그녀의 발언으로부터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지위도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망설인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현재’의 망설임을 통해서 우리는 해직당한 그래천의 상황도 바로 이해해볼 수 있게 된다. 그녀는 분명히 퇴직한 이후를 폭로와 고소의 적절한 시점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녀를 비겁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폭스 뉴스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이해하도록 한다. 살아있는 권력인 로저 에일스의 휘하에서는 폭로도 무엇도 가능하지 않고 그들을 시시각각 순종시키려 든다. 그 때문에 ‘빅 마우스’인 메킨도 흔들렸던 것이고,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케일라는 로저의 성적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폭스 뉴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굴레를 이해하게 된다. 폭스 뉴스의 미래인 그레천이 퇴직 후에야 폭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폭스 뉴스의 현재인 메킨이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폭스 뉴스의 과거인 케일라가 착취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 굴레를 고착화 시키는 권력의 탈출구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반복되는 굴레로부터의 탈출 : 폭로의 단순하지 않은 계기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는가? ‘폭로[Bombshell]’ 때문이다. 그래천이 한 폭로는 그래서 위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러한 폭로가 가지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울 수 있었다는 말인가? 폭로의 위력은 단순히 진실을 큰 소리로 말한다는 데에 있지 않다. 그 폭로가 지시하는 진실 자체가 대단히 거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거대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폭로가 거대한 것을 들춰냄으로써 어떠한 일들이 발생하는가?


폭로가 들춰내는 것은 ‘로저 에일스’가 가진 권력형 성범죄다. 제아무리 로저의 ‘업적’이나 그가 창출한 ‘일자리’들을 들먹인다고 해도, 그가 저지른 죄질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그레천이 설령 해직 후에 한 폭로가 비겁한 것이라는 지적이나, 로저의 변명도 무의미하다. 로저는 너무나 많은 성범죄를 저질렀고, 그것을 갖가지 방식으로 은폐했다. 그 안에서 한 사람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도, 로저 에일스의 위대한 면모를 들먹이며 면죄부를 주려 시도하는 것도 모두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본질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그레천의 발언은 단순한 사실 적시가 아니라 하나의 ‘폭로’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또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심각한 사실과 그에 대한 폭로가 어떠한 효과를 발생시키는지다. 폭로는 대중들에게 심각한 사실을 공표하도록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숨어있던 피해자들이다. 성착취의 문제에 대한 공표는 숨어 있던 피해자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만이 그런 일들을 당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도록 한다. 그를 통해서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었던 이들의 시간이 연결된다. 현재를 살고 있는 메킨은, 이용 가치가 떨어지자 해고당한 그래천을 보면서 자기 자기 자신의 미래를 보며, 다른 수많은 피해자들을 보면서 자기 자신의 과거를 본다. 그리고 그녀들의 과거이자 성착취의 현재를 살고 있는 카일라는 이 갑갑한 굴레에 갇혀 살게 되는 자기 자신의 미래를 그녀들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렇게 서로의 시간들이 연결되며 그들은 굴레의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며 그녀들은 연대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이 굴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 ‘폭로’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폭로라는 현상은 단순히 목소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폭로가 들추는 진실과, 그 진실의 연루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폭로[Bombshell]’는 그 폭로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금발 여성[Bombshell]’들의 자각과 용기와 연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폭스 뉴스 여성들의 ‘과거’를 상징했던 카일라는, 로저 회장의 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세계 안에서의 권력은 사람만이 바뀔 뿐 여전히 지속될 것을 예감한다. 그러며 그녀는 그 회사를 박차고 나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제 그녀는 폭스 뉴스의 현재와 미래를 살고 있는 이들의 과거였다가, 다시 또 자신 스스로 살아내는 ‘현재’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문제와 별개로 스스로 짊어져야만 하는 바로 나의 삶이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역사는 언제나 굴레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그 굴레의 탈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굴레’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헤쳐나갈 수 없는 그런 것은 아닌 셈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굴레의 진실들을 보고 또 이해하는 것이다. 상호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루며 사실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되는 계기들이 있다. <밤쉘>의 경우에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폭로’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폭로할 수 있었던 한 사람의 결단이 있고, 그로부터 고무되어 자신뿐만 아니라 전체를 보며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동조가 있었다. 그러며 세상은 굴레안에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굴레를 만들어낼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어렵고, 어렵기 때문에 굴레들은 굴레로서 아주 오랜 시간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며 영화 밖에 서 있는 우리들은 또한 그 폭스 뉴스의 지난 굴레를 보면서 다시 이 현실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또 그를 통해 무엇을 보는가? 그것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때마다 현재를 살고 있는 내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어쩌면 아주 작은 것부터라도.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온다』 : 아이들은 오므라이스 꿈을 꾸는 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