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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Mar 18. 2020

영화 『온다』 : 아이들은 오므라이스 꿈을 꾸는 거야

나카시마 테츠야 영화의 끝판왕


3월 17일 시사회 초청으로 관람. 코로나에 의해 원래 예정된 시사회 날짜보다 일주일가량 밀렸다. 중간중간 다른 시사회들도 있었으나 취소되었다. 마스크를 지참하고 착용하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하다는 것을 사전에 주지받았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이미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과 '고백'으로 유명하고, 한국에도 꽤 많은 마니아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나 역시도 그의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보다는 '고백'이 조금 더 나의 취향에 가까웠고, 처음 그 영화를 봤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카시마 테츠야의 스타일은 중간중간 딱딱 끊어지고, 기괴한 시퀀스 분할이 특징이다.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에 영화의 색채의 차이와 극단적인 배경음의 차이를 둠으로써 독특한 개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특성은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이 CF 감독 출신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개성은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고, 나는 그의 스타일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그만큼 난잡하고 혼란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고, 그가 연출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 개연성을 일부 희생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하나의 조언은 이렇다. 이번에 한국 개봉을 앞둔 <온다>는 그러한 나카시마 테츠야의 특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며, 그의 이러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이번 영화도 아주 좋아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전작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극단적인 시퀀스 분할과,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그의 장기들이 총망라되어 있고, 기괴한 분위기 속에서 극단적으로 평온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사용하며, 은은하고 정적인 음악으로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들은 감각적이다. 이러한 그의 특성을 장점으로 여기는 이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결코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영화 '고백'에서도 그랬지만, 그의 이러한 연출은 마지막 극단을 향해서 달려가는 하나의 '롤러코스터'다. 두 시간 반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마치 하나의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종료 직후에 숨을 헉헉거리게 만들었다.


유의할 점은 이 영화의 장르가 '컬트'쪽에 치우친 '공포물'이라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공포영화를 절대로 즐기지 않으며, 영화관에서 공포영화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기껏해야 내가 관람한 것은 '곡성'이나 '검은 사제들' 그리고 '사바하'가 전부이다. 모두 마일드한 공포감을 드러내는 영화이며, 전형적인 공포 영화라기보다는 컬트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다. 공포영화 마니아들에게는 아마도 아쉬운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영화도 꽤나 겁을 집어먹고 보는 편이고, 그래서 <온다>역시도 무섭지는 않을까 사전부터 걱정하고 들어갔다. 그러나 다행히 생각보다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으며, '곡성' 정도로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한다. 장르는 공포물이지만, 결코 공포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영화는 아니라고 하는것이 좋겠다. 다소 잔인하거나 놀래는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나카시마 테츠야의 영화를 좋아해서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충분히 감수하고 관람해도 될 것이다. 우리의 공포감을 조장한다기보다도 이 영화는 자신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영화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30여분 간 휘몰아치는 '불제[구마의식]'가 진행되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며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하나의 놀이기구를 탄다는 마음으로 관람하면 좋겠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내가 정말로 즐겁게 관람했기 때문이며, 나카시마 테츠야 영화에서 내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들을 모두 발견했고 그 이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의 팬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관람을 권한다. 3월 26일 개봉 예정이다[코로나 때문에 변동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하로는 스포일러를 담은 해석이 있다. 주의를 요한다.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


이 영화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것보다는 우선 즐기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시마 테츠야는 일관된 주제를 대마로 놓고 여러 가지 상징들을 배치해 놓았다. 이번 영화는 '어린아이'이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라는 존재를 어른들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며, 그러한 어른들의 눈을 통해서 드러나는 아이의 존재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영화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예고하는 예비부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섬뜩한 무언가가 곧 엄습할 것을 예고하면서도, 두 부부의 결혼식 과정들이 대단히 아름답게 그려진다는 것이 압권이다. 남편 히데키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카나는 함께 아이를 길러낼 결혼 생활을 기대한다. 모두가 그들을 축복한다. 그러나 그만큼 관객들은 그러한 모든 것들이 과도하게 행복하게만 그려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아내 카나의 어머니는 결혼식에 참석해서는 행복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음침하고 지루해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고, 노래 부르고 즐거워 보이는 남편 히데키의 친구들은 그러한 행복한 모습을 마냥 곱게만 보는 것도 아니다. 과도한 행복한 분위기가 지나치다는 것을 암시하며, 우리는 어떤 위선을 포착한다.


그러한 느낌들은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구체화된다. 남편 히데키는 언제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아내의 남편과 아이의 아버지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겉 포장에 불과하다. 그는 심심치 않게 사내에서 불륜을 저질렀으며, 블로그에 아이의 사진을 올릴 뿐, 실제로 육아를 하지도 아내 카나를 돕지도 않는다. 그 안에서 아이는 방치되고, 카나 역시도 아이를 홀로 돌보고 기르는 것이 버겁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그것"이 "온다". 부모를 죽이고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서다. 히데키는 자신을 부르는 의문의 소리를 알아채기 시작하고 그것이 점점 자신을 향해 달려오며 위협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들은 악령을 용하게 퇴치한다는 히가 자매를 만나서 퇴마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를 위협하는 의문의 '그것'은 히데키의 고향마을에서는 '보기왕'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예로부터 아이를 데려간다고 전해진다. 민속학과 교수로 있는 히데키의 친구는 그러한 '보기왕'에 관련된 설화나 민담들의 원형은 사실상 아이를 버리는 부모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말해준다. 아이를 버리는 부모, 그러나 그들은 사라진 아이의 이유를 아이를 '악령'이나 '귀신'으로 돌리며 자기 자신의 탓이 아니라 변명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전설 속의 보기왕은 현실로 나타나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를 위협하며 아이 치사를 데려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기왕은 아이들을 데려가지만, 또한 그 자신이 이미 버려진 아이들의 원혼이다. 


보기왕 : 어른의 눈에 비친 어린아이라는 공포


퇴마사 자매 중 언니 코토코는 말한다. "아이들은 종종 죽음에 이끌린다"고. 그러면서 그녀는 아이들이 종종 곤충을 죽이거나 작은 동물을 괴롭히는 경우가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이를 두려운 존재로 묘사한다. 이러한 코토코의 화법은 우리가 종종 아이들을 섬뜩하게 느끼는 하나의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들은 순수하다. 그러한 '순수함'이라는 것은 종종 해맑고 귀여운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선과 악을 뚜렷하게 알지 못하는 미지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런 그들이 종종 파괴와 죽음에 이끌린다는 것, 아이들이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살아가며 선과 악을 배우고 통제와 절제를 배운 어른들에게는 무서운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은 어른들의 공포심을 자극함과 동시에 책임감을 자극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너무나 작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그러한 아이를 먹여야 하고 돌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어린아이의 존재는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즉 아이는 순수하지만 통제불능인 미지이며, 그 아이를 어른들이 길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이다.


아버지 히데키의 '위선'은 그러한 아이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드러낸다. 순수한 아이는 귀엽고 아름답기만 한 것으로 표현되며, 히데키는 아이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아이를 잘 보살피는 자신의 모습을 SNS를 통해서 가장한다. 그러나 그 다른 한편으로 그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며 모든 양육을 자신의 아내에게 떠맡긴다. 그러면서 양육의 부담은 커져만 가고, 아내 카나는 자신의 아이 치사를 점점 짐짝 취급을 하기 시작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중에, 자주 아픈 치사만 없다면 자신의 삶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아이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되기도 하고, 이 영화는 그러한 낙태에 대한 메타포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노자키는 퇴마사 자매 중 동생 마코토의 남자친구다. 그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옛 연인을 낙태시키게 한 일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그러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 죄책감 때문에 여러 번 곤경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낙태 역시도 선택과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아이들을 버리는 부모에 대한 하나의 상징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른들이 아이에게 가지는 공포라는 것은, 그들이 순수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 위험성이라는 것은 그 아이의 존재 자체가 삶의 부담으로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끊임없이 아이의 존재 자체가 과연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인지를 의심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그 아이의 존재를 소홀히 하고, 아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다. 부담 지워진 것은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며, 그 부담을 스스로 버리고 난 뒤에 남는 마음이 죄책감이다. 


거울 : 죄책감이 드러내는 것


흥미로운 점은, 보기왕이 싫어하는 것이 바로 '거울'이라는 점이다. 보기왕은 히데키를 살해하기 위해서 퇴마사인 코토코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집 안에 있는 모든 거울을 부숴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또한 칼날을 싫어해서 칼들을 모두 숨기게 만들도록 한다. 그에 깜박 속은 히데키는 거울을 부수고 칼날을 숨겨서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학대하거나 방치하는 부모들은 모두 자신의 죄책감을 숨기고 있다. 그러며 아이를 짐짝 취급하고 아이를 내다 버린다. 보기왕이 찾아오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버린 부모를 복수하기 위함이다. 보기왕이 히데키에게 거울을 깨버리라고 한 이유는 히데키가 자기 자신을 자각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아이를 지키는 하나의 방법과, 보기왕이 아이를 데려가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마코토는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돼라'라고 조언한다. 이에 되려 히데키는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자기 자신의 죄의식을 덮어 가리고 싶기 때문이다.


아이를 공포스럽고 끔찍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자기 자신도 어린아이였던 시절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학대받았던 것이 괴로웠다는 것을 잊고 싶은 어른들의 자기 망각이다. 그러며 실제로 자기 자신이 어떻게 아이에게 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싶지 않고 끊임없이 책임감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바로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이유 자체가 그 책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 책임을 지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므라이스 : 아이는 아이다


카나와 히데키가 퇴마를 부탁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아이 치사와 퇴마사 동생인 마코토는 유독 친해지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든 이 아이를 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강력한 퇴마사인 그녀의 언니 코토코는 이 아이가 너무나 오랜 기간 보기왕과 어울려 놀았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치사 역시도 보기왕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코토는 언니에게 말한다 : 


"이 아이는 그저 함께 놀고 싶었을 뿐이야." 


결국 우리는 멋대로 아이들을 공포스러운 존재로 묘사하고, 짐 덩어리로 묘사하며, 또한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죄의식의 대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심지어 아이들이 보살핌을 받아야 되는 존재라고 묘사할 때에도 그 모든 시선은 결국 어른들의 시선으로부터 묘사된 것이다. 아이들은 제멋대로이고, 음식도 흘리며, 가끔 나쁜 짓도 하고, 거짓말을 배운 뒤에는 혼날까 봐 사실을 숨기기도 한다. 그런 그들은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고, 어른들의 기분이나 상황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어른들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떠올리고, 아이가 그 일에 방해가 될 때 그들을 장애물로 묘사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아이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왜 엄마와 아빠를 불러 세워 그들을 귀찮게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들이 놀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심하다.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엄마 앞에서 부르고 싶고, 크레파스가 있으면 그림을 그리고 싶고, 그것을 그려서 칭찬받고 싶다. 하지만 아이들은 방치된다. 그 안에서 어울려 놀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부모를 찾고, 고된 생활 때문에 아이와 놀아줄 수 없는 부모는 아이의 순수한 이유와 성향들을 점차 보지 못하게 된다. 버려진 아이들의 집약체인 보기왕 또한,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에 대한 하나의 복수이면서도, 동시에 아이를 데려가는 이유는 함께 어울려 놀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살아남은 아이 치사의 꿈. 그 꿈은 오므라이스의 세계에서 오므라이스를 먹고 오므라이스와 함께 살아가는 귀여운 상상력이다. 어른들은 아이를 공포로 묘사하고, 짐으로 묘사하고, 죄책감으로 묘사하며, 그때 그것은 보기왕의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아이의 시선에서 보는 세계는 그런 오므라이스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러한 장면을 중반부에 등장하는 치사의 생떼와 비교한다면 그 의미가 더 극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치사는 스파게티를 하느라 바쁘고 정신없는 엄마 옆에서 '오므라이스'가 먹고 싶다면서 노래를 부른다. 그때 카나는 자신의 아이에게 소리치고 집안의 사물들을 집어던져 버린다. 그때 드러나는 그 오므라이스는 어른의 눈으로 본 짐짝 같은 아이의 모습을 상징한다. 


결국 아이는 아이다. 아이는 오므라이스 꿈을 꾼다. 그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놀고 싶다. 어른들은 그러한 아이들의 세계를 보존해내면서도 그들이 천천히 자신의 순수를 벗고 세상을 배워갈 수 있도록 인도한다. 아이는 결코 짐짝이 아니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존재이다. 아이가 만약 짐짝이라면,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짐짝으로 살았고, 또 살아내며 힘들게 이것저것을 배워내며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오므라이스 꿈을 꾸었고, 어른들은 그것을 생떼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결국 아이일 뿐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오므라이스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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