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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Sep 27. 2020

식기세척기와 압력솥과 검은색과 그리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길목이었지. 네 엄마 아직 나를 좋아하지 않았을 때였단다. 그 사람은 나를 외딴 굴다리 밑으로 나를 불렀어.


아니, 사실은 말야,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그냥 내가 수소문해 그리로 향했단다. 그곳은 너무 어두컴컴하고 음침했거든. 나는 작은 여자가 해 질 녘 그곳에서 혼자 있다는 게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했어. 네 엄마가 워낙 체구가 작잖니.


아주 이상한 풍경이었어. 학교 뒷산으로 길을 따라 따라가면 있는 그런 곳이었단다. 가는 길에 철길을 가로지르는 건널목을 건너야 했는데, 제법 운치가 있었어. 가을로 접어드는 그 계절에 풀냄새와 흙냄새가 나는 그런 곳이었지. 그 길을 지하철이 지나가기 전까지 깜박깜박 거리던 정지 등이 아직도 생각나는구나. 그걸 보면 괜히 바쁜 걸음이 아니라도, 왜인지 마음이 조급해지곤 했어. 지하철이 천천히 감속하며 지나갈 때, 계절의 냄새와 함께 녹이 슨 쇠 냄새와, 오일인지 윤활유인지 모를 기게 향이 한데 얽혀 하나의 풍경과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어.


차던 봉이 올라가고, 나는 발걸음을 옮겼단다. 그리 걷다 보면 인적이 드물어지고 점점 산으로 접어드는 그 길에, 굴다리가 하나 있었어. 낯선 곳은 아니었단다. 나와 내 친구들은 매번 술을 마신 뒤에 그곳에 가서 술을 마시곤 했었으니까. 그러나 술 없이 가거나, 해 없이 가거나, 사람 없이 가기에는 조금 꺼림직 한 그런 곳이기도 했어. 어쩌면 나만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때 네 엄마는 당당하게 혼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사실은 그냥 나는 네 엄마가 보고 싶어서 갔단다. 나는 그저 구실이 필요했던 거지.


점점 어둑어둑해지는데,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는 점점 발걸음이 빨라지고 말았단다. 내가 네 엄마를 보호하러 가는지, 내가 나를 보호받으러 가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야.


그곳에서 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한 손에는 처음 보는 페인트와 브러시를 들고서는 그 굴다리 벽을 온통 시커멓게 칠해 놓았지. 그 검은색은 내가 처음 보던 그런 색이었어. 이미 한창 어두웠지만, 어둑어둑 저물어가는 그 어둠에 비해 정말로 너무나 끔찍하게 어두웠거든.


그리고 그것을 등지고 네 엄마가 나를 돌아 보았단다.










아이랑 다투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오랜만에 달리기를 시작한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는 날이다.


오늘은 딸아이의 생일이었고, 나는 미역국을 태웠다. 요리에 서툰 아빠도 아니었고, 가사에 인색한 남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언제나 요리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고, 설거지를 하던 것은 아내였다. 우리 연애 시작하고 난 뒤에도 매해 미역국을 하던 것도 나였고, 아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에도 내가 끓였다.


홍두깨살 주사위 정도의 크기로 썰기.

자른 미역 십 그램 정도.

다진 마늘 작은 걸로 한 숟갈.

참기름 작은 걸로 두 숟갈.

국간장 적당히 내 맘대로.

물 두 컵.


그리고 압력솥에 40분.


아내는 항상 좋아했었다. 사실 그냥 다 압력솥에 때려 넣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래도 좋아했다. 요리의 완성은 설거지까지라고 매번 말했지만, 그래도 끝끝내 설거지는 자기가 해줬다.


설거지. 그래. 아이가 화낸 것은 미역국 때문은 아니었다.


어제 식기세척기를 주문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기사가 다녀갔다. 식기세척기라는 게 은근히 자리를 많이 차지해서, 기사가 직접 와서 설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어떻게 공사할지를 설계까지 해준다. 기사는 와서 스윽 둘러보더니, 싱크대와 냉장고 사이에 서랍을 드러내고 설치를 해주고 갔다. 그러고 나니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딱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는 몇 가지 주의사항과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식기세척기. 제법 비싼 물건이었다. 백만 원 남짓의 금액을 줬다. 팔십 도의 고온과 강력한 수압으로 타서 눌어붙은 것도 몽땅 제거한다는 말에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것은, 세척이 완료된 뒤에는 저절로 문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기능이 없었으면 나는 눌러 놓고도 까먹어서는 스팀으로 가득 찬 꿉꿉한 공간 안에 식기들을 방치해 놓고 또 딸아이한테 혼났을 게 분명하다.


츳츳츳 - 거리며 딸랑거리던 압력솥의 추가 심상찮았다. 처음에는 참기름 냄새와 소고기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던 게 어느 순간부터 탄내가 나기 시작했다. 놀라서 호들갑을 떨어대며 싱크대로 가서 찬물을 부으려다 손을 뎄다.


당연하게도, 탄 냄새가 나는 순간은 이미 늦은 것이다. 김을 모조리 빼고 나서, 뚜껑을 열었을 때에는, 소고기와 미역이 모두 바닥에 눌어붙은 뒤였다. 흘러든 수돗물이 차자, 물이 시커멓게 올라왔다. 숭늉 냄새가 났다.


어쩌면 이때다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마침 그날로 준비된 식기세척기를 시험해 볼 때가 너무나 빨리 도래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태워먹은 미역국이 눌어붙어 아주 악랄하게 도전적인 놈으로 말이다.


그리고 딸아이가 야자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온 것은, 방문 기사가 알려줬던 사용법을 떠올리려 열심히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설거지는 항상 내가 한다고 했잖아!"


그제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나는 아이가 화를 내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설거지는 앞으로 자기가 다 할 거라고 선언했던 게 벌써 작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는 그것이 자기의 몫이라고 믿었다.










"오지 말라니까 왜 왔어"


네 엄마는 굴다리 밑에서 내게 그렇게 말했지. 나는 어둑한 공간 안에서 실루엣과, 목소리만으로도 그 실루엣 안의 사람을 그려낼 수 있었단다. 무관심한 투로 퉁명스레 말하는 그 목소리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지 말이야. 그게 내심 서운해서 나는 볼멘소리로 대답하는 거야.


"이 시간에 거기 혼자 있으면 위험하니까 그렇지"


"그래? 내가 보기엔 네가 더 무서워하는 거 같은데?"


항상 그 사람은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단다. 어쩌면 그때 그렇게 무턱대고 찾아온 나를 필요 이상으로 더 성가셔 했던 것도,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아챘기 때문인지도 몰라. 가끔 사람은 나보다 남이 나를 더 잘 알 때가 있는 법이었고, 네 엄마는 늘 그에 능한 사람이었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말야.









압력솥의 문제는 지금 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처음 내가 아내에게 미역국을 끓이기까지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다. 우리가 만나고 나서 처음 맞는 그녀의 생일날, 나는 다섯 솥의 미역국을 태웠고, 세 솥의 미역국은 물이 너무 많았다.


요리하는 모든 이들이 음식을 태우려 불을 지피지 않듯, 아이에게도 그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종종 우리는 그 안에서 무엇이 어떻게 타고 있는지, 무엇이 어떻게 익어가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마치 압력솥으로 조리하는 것과 같다고 느꼈다. 가끔은 그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내가 아버지이고 내 아이가 딸아이여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좀 둔감하고, 아이는 섬세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로 어떻게 질책하는지, 그리고 또 방치하는지를 잘 모를 뿐이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아이에게 준 것이 충분한지, 내가 지핀 불이 적당한지를 잘 모를 뿐이다. 그래서 저 어두운 방 너머에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태우고 있는지를 알 수 없고, 또 그저 기다리면 굳게 닫힌 방 문에 제 스스로 열릴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그 문을 스스로 열어야 하는지, 또 언제 열어야 하는지, 아니면 열기는 해야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누군가 들여다 보아주지도 않는 그 어두운 공간 안에서, 스스로 태워가는 그것은, 우리가 아는 잿빛 보다 더 어두울 것이다. 가끔은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저 닫힌 방 너머에서 타들어가는 것이 있을까 봐 두려워, 나는 뚜껑조차 열어보기 싫은 것이다. 이미 탄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게 두렵다.












"맞네. 겁쟁이!"


네 엄마는 또 그렇게 나를 괜히 몰아세웠단다. 그래도 나는 그게 싫지는 않았어. 그렇게라도 나를 긁어야 나는 부정하든 시인하든 할 수 있었으니까. 바보처럼 멀뚱멀뚱 서 있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거든. 그 사람이 나를 놀릴 때, 나는 어쩔 줄 몰라서 말을 고르지만, 그리 골탕 먹이는 게 그 사람의 목적이었다는 게 사실 나를 안심시켰단다.


네 엄마는 항상 말이 많았어.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 이상한 상상력으로 가득해서는. 사실 나는 네 엄마가 하는 말 중에 반 정도 밖에는 이해하지 못했어. 엄마는 항상 그런 내가 공돌이라서 그렇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단다. 그냥 오히려 늘 더 이상한 건 네 엄마였으니까.


나는 멋쩍어서 물었어.


"저건 뭐야?"


그래피티라고 하기엔 그저 시커멓게 굴다리 벽을 가득 메워버린 특이한 페인트. 그 사람이 말했어.


"이번 졸업 작품으로 낼 거!"


"아니 물론 시기상으로는 그럴 텐데, 무얼 그리고 있는 거냐고."


네 엄마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오히려 내게 반문했어.


"글쎄, 뭐 같은데?"


항상 네 엄마는 자기가 그린 걸 내게 어떠냐고 묻곤 했지. 내가 그런 걸 가장 어려워하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말야.


"음... 까만색...?"


그러자 그 사람은 깔깔 웃었어. 그리고 말했지.


"하나도 안 틀린 말이네?"


"나는 이런 거 원래 잘 모른단 말야."


나는 괜히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게 투덜 거렸지.


"아냐. 딱 좋아. 내가 원하는 대답이야. 잘 보이려고 개소리나 지껄이는 사람이었으면 너는 바로 아웃이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항상 내려다보듯이 말하던 네 엄마의 눈빛은 항상 신나서 반짝 거렸단다. 그래도 내겐 좋은 찬스였어. 나는 네 엄마를 이겨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내심 그러한 구도가 우리 관계에 진전이 있게 만들 수 있는 하나의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단다.


"검은색은 색일까?"


네 엄마는 내게 그렇게 물었단다.











아내는 복잡하고 자세한 것은 하기 싫어했다. 가령 세세하게 하는 요리의 절차라든지, 뜨개질이라든지, 방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닦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들. 그래서 늘 세세한 일들은 나의 몫이었고, 내가 하나하나 복잡한 요리를 할 때에는, 대신해서 그녀가 설거지를 했다. 세제를 올바로 쓰는 법과, 그릇을 닦는 순서 같은 것들도 내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데 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대신해서 그녀는 늘 우리 집안을 밝혀주던 하나의 등불 같았다. 늘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내 삶에 갑작스런 변화를 주었던 그런 사람. 하나하나 저축하고 쌓아가야만 하는 내 인생에서,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던 그런 사람. 늘 의무로 살아가던 나를 가끔은 그저 즐거워서 웃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삶이라는 것이 즐거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삶이라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가끔은 믿을 수 있게 해주던 사람.


그리고 어느 날, 우리 집을 밝혀 주던 그 등불은 아주 서서히, 그러나 너무나 갑작스레 꺼져 버렸다.











“색이 뭔데?”


나는 물었단다.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그건 네 전공이니까.”


“색을 가장 많이 다루는 건 미술 하는 너 아냐?”


그러자 그 사람은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지.


“시끄러워, 대답해!”


“음... 색은 빛의 파장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거야.”


“알아듣기 쉽게 말해.”


“그러니까, 색은 우리 눈에 빛이 들어올 때 느껴지는 거야. 물감을 칠할 때에는 물감이 흡수하고 난 뒤에 남은 파장이..."


“됐고, 그럼 검은색은 뭐야? 검은 파장이 들어오는 거야?”


“음... 검은색은 원리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빛을 흡수해서 우리 눈에 되돌아오는 빛이 없다는 거야. 그래도 사실 어떻게든 빛은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 흡수율이 백 퍼센트인 건 없거든.”


“그래? 하지만 이게 등장한다면 어떨까? 짜잔! 이거 정말로 백 퍼센트에 가깝게 빛을 흡수한다는 그 페인트야. 신기하지, 신기하지.”


네 엄마는 내게 신나서 얘기했단다. 너도 본 적 있지? 거기에는 어떠한 빛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커멓단다. 마치 그 부분만 포토샵으로 뚫어 놓은 것처럼 말야. 네 엄마는 그러면서 내게 말했어.


“그러면 검은색은 색이 아냐? 빛이 눈에 안 들어 오는 거니까 말야.”


“음... 색이 빛의 파장이라고 말한다면... 그렇겠지?”


내가 이렇게 말하자, 네 엄마는 내게 소리쳤단다.


“바보야. 우리가 보는 건 빛이 아니야.”










비가 점점 더 많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라 몸이 삐걱거리고, 숨이 버겁게 치밀어 오른다.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달리는 것은 내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내게 있어 삶이라는 것은 망망대해같이 펼쳐진 바다 안에서 외딴 돚단배처럼 천천히 항해하는 것이다. 삶과 세계는 너무나 넓어서, 그 모두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단지 오늘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당장 내디뎌야 할 하나의 발걸음. 뜀박질. 그것이 중요했다. 학창 시절 때에는 학업에 힘을 쓰고, 대학에 간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취업을 하고, 취업을 한 뒤에는 결혼을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내 삶의 모델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망망대해를 천천히 헤엄치는 돛단배처럼.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좋았다. 그 안에서 나는 나의 계획대로 살며, 나의 계획 안에서 내 일 인분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달리는 것이 좋았다. 한창때는 꽤 많이 달렸었다. 달리는 것은 힘이 많이 된다. 몸을 적당히 혹사 시키면서 나를 끝까지 밀어붙여보고 싶었다. 그런 뒤에는 묘한 성취감이 몰려왔고, 그렇게 나는 나에게 적절한 벌과 보상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한창때에는 매일 그렇게 운동을 하곤 했다. 내가 이 짓을 멈춘 것은 아내가 죽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덮어두고 방치해 두었던 내 지난 모든 삶들이 비집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죽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그럼 뭔데? 우리가 색을 볼 때 무얼 보는데?”


나는 물었지. 그러자 네 엄마가 말했어.


“우리가 색을 볼 때 우리가 보는 건 색이지. 바보 아냐?”


“그게 무슨 말이야.”


“자 봐봐. 뭐가 보여?”


“검은색”


나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단다.









네 앞에서 긴장해 서 있던 내게 부족했던 것은 말이었을까 마음이었을까.


죽은 숨이 터져 나오고, 내 머리에 차곡차곡 스미던 빗물은 임계점을 지나, 주룩주룩 내 얼굴을 타고 흐른다. 손으로 몇 번을 빗물을 훔쳐내지만, 그는 끊임없이 내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몸은 후들거린다. 그러나 멈춰서는 안 된다. 내가 달린다면, 사람들은 나를 운동하는 사람으로 알 테지만, 내가 걷는다면 사람들은 빗속을 우산 하나 없이 걷는 측은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그게 중요한가?



달리다보 보면 숨이 부족할 때가 있고, 몸이 부족할 때가 있다. 어느 순간엔가는 숨이 가빠와서 달릴 수가 없고, 또 어느 순간에는 몸이 지쳐서 달릴 수가 없다. 완전히 지쳐 쓰러졌을 때, 폐와 근육이 그 이유를 서로의 책임으로 떠미는 것처럼 느껴졌다.


알고 있었다. 삶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오직 착실히 연습하고, 단련하고, 모으고 준비하면 될 것이라 믿었던 이유도,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망망대해 같은 삶 안에서 언제나 예측 불허의 일들은 하나의 폭풍우처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날씨처럼 그리 들이닥쳤던 것이다. 그러니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서 나는 준비하고 또 준비해야 했다.


네 앞에서 내가 해야 할 말들을 고민했고, 네 앞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연습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해답을 원했다. 내 죽은 숨이 터져 나올 때, 내 다리가 후들거려 멈춰 서고 싶을 때. 내게 부족한 것은 숨이었나 몸이었나. 숨은 내 몸을 따라잡지 못하고, 몸은 내 숨을 견디지 못한다. 나는 달리고 싶은 것인지 멈춰 서고 싶은 것인지를 알 수 없다. 그 모든 것이 엉켜 있단 이야기는, 내가 나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해답을 원했다. 내게 부족한 것은 마음이었나 말이었나.


나는 눌변가였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그러나 사랑한다 말하기엔 내 말주변이 너무나 부족해서. 그렇다면 내게 필요한 것은 말을 단련하는 것이었나.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서 네가 나를 좋아하도록 만들어야만 했나. 그러나 가끔은, 마음에 지쳐서 말이 따라오지 못하는 날도 있지 않았는가. 나를 짓궂게 놀리던 네게 그만 토라져 버려서는,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 나를 졸졸 따라오던 너를 밀쳐내던 그런 날에. 내게 필요했던 것은 말이었던가 마음이었던가.











“당황하지 마.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어. 그게 내 작업의 주제인걸?”


네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활짝 웃었단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열변을 토했지.


“색을 눈에 도달하는 빛으로 정의한 건 재밌었어. 그런데 그 말에 따르면 검은색은 색이 아니라 ‘빛의 부재’에 다름없겠지? 그런데 여전히 우리가 보는 건 검은색이야. 네가 틀린 게 아니라, 이게 바로 패러독스라고."


그렇게 그 사람은 생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렇게 빛 흡수율 백 퍼센트에 근접하다던 그 페인트를 벽에 마저 칠해 버리고서는, 그 위에 다른 물감들을 뿌렸어.


그때 그 사람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단다.


"왜 우리는 상상할 때 눈을 감는 걸까."


해 질 녘의 젖어들던 그 어둠. 그러나 그 어둠보다 더 어두웠던 그 검은색. 그 앞에 검은 옷을 입고서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던 사람. 손에 묻은 물감을 내 얼굴에 묻히던 그 손가의 느낌까지도. 그 순간 으슥했던 공기는 사라졌고, 나는 그 어둠으로 빠져들어갔어. 그때 내가 보던 것은 빛의 부재가 아니라, 거기에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지.


그때 나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고 느꼈단다. 그저 내 안에 있는 말을 쏟아내서 털어 내버리고야 말겠다는 그런 후련함이 아니라, 그저 모든 공기와 풍경과,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사람과, 그리고 내 마음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말이 따라나와야 한다고 말야.









-사랑한다 -


말하던 날에. 내 마음과 말이 일치되던 그런 날에. 내 숨과 몸이 함께 걷던 그런 날에. 나는 망망대해 같은 삶 안에서 무리하지 않아도 달릴 수 있던 순간을, 쥐어짜 내지 않아도 진심일 수 있던 그런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허우적허우적 애를 쓰다가. 어느새 세계와 내가 함께 걷는다. 숨은 몸을 앞서 달리려다가, 몸은 그에 맞춰 따라잡는다. 사랑해서 사랑한다 말하고, 그 말이 하나도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문득 삶의 의미를 알 것만 같았던, 내가 어째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었는지, 망망대해 같은 삶 안에서 그 의미를 문득 깨닫게 된다.


숨과 몸이 합치되던 순간. 내 몸이 가벼워지던 순간. 마음과 말이 일치하던 순간. 사랑한다 고백하던 순간. 내 마음을 감추지 않아도, 말이 저절로 새어 나와 거짓말처럼 화답 받던 순간.


망망대해 같은 삶 안에서, 그리 천천히 맞춰나갈 수 있으리라 나는 믿었다.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아프다.










"그러게, 그리고 우리는 입 맞출 때 눈을 감는 걸까"








그래서 다시, 몸이었나 숨이었나. 말이었나 마음이었나.


가볍게 달려가다가, 진심을 말할 수 있으려다가. 나는 삶을 느긋하게 달려가다 알게 되었다. 점점 더 빨라지고, 가벼워지고, 내 마음에 솔직해지며 또 능숙해진다고 해도, 결코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는데도 행복에 젖어버려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루빨리 도착하기 위해서는 하루 먼저 출발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치지 않는 속도로 달려간다 해도, 혹사하며 달려간다 해도, 결승선을 넘어선 곳에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완주한 뒤에도 결코 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떠나버린다면, 완주한 뒤에도 나는 결코 그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내게 부족했던 것은, 내가 너를 지키기 위해서 부족했던 것은 말이었나 몸이었나 숨이었나 마음이었나.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완주한 뒤에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었고, 나는 더는 달릴 수도, 달려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망망대해 같은 삶. 그리고 나를 기다려 주지 못한 사람.


더는 살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 빗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다시 어둠과 적막. 대상의 부재. 더는 망막에 그 무엇도 맺히지 않는 순간. 죽은 숨은 내 우울과 절망을 뚫고서 뒤늦게 터져 나오고, 몸은 그 숨을 견디지 못한다.


"너무 무리하지 마-"


그렇게 말하던 너는 내가 돌멩이를 줄 세우고 있을 때, 하늘의 구름을 가리켰다.


"나는 절대로 지지 않아"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하던 너는, 내 안에서 무엇이 어떻게 끓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내 안에서 무엇을 태우고 있는가. 나는 괜찮은 걸까.


그저 내 하루의 역할. 완전한 일상과 그 반복. 그리고 그 반복과 반복, 그리고 또다시 반복.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내 정상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나는 무너져가고, 영원히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왜 눈을 감는 걸까."









다시 집 앞으로 돌아온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과거가 아니라, 우리 집.


숨을 몰아쉬고 내쉰다. 나는 다시 말과 마음을 고민한다. 나는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 걸까. 확인할 수 없는 솥 안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싶다. 나는 좋은 남편이었는지, 좋은 아버지였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나는 괜찮은 걸까. 내 진심은 무엇인가. 나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가. 태우고 있는가. 내가 하는 것들은 과연 네게 좋은 걸까. 그것을 고민했다.


나는 설거지를 통해서 아내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네 엄마를 빈자리를 통해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내가 설거지를 하면서, 그리고 네가 설거지를 하면서, 그 사람이 늘 하던 일이었다는 식으로, 귀찮은 소일거리가 그 빈자리 때문에 하나 더 생겨난 것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단다.


하지만 나는 뿌듯했단다. 그 빈자리를 어떻게라도 네가 메우려 하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네가 다 컸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더 커갈 것을, 더 성숙해서 더 멋진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단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통해서 네 엄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어. 왜냐하면 네 엄마는 내가 요리한 뒤에, 우리가 식사를 마친 뒤에 설거지를 하던 사람으로 기억하기에는, 그 사람은 내게 있어 너무나 빛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 어두웠던 날의 어둠과, 어둠보다 더 어둡던, 일말의 빛마저 흡수해 버리고서는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붕 떠있던 검은색 직사각형과, 그 가운데에서 물감을 흩뿌리던 그 사람의 손과 손, 그 손의 마디와 마디, 사소한 제스처까지도.


그 모든 동작들은 나를 위해 존재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거든. 그냥 그 사람은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던 거야. 그 안에서 내가 끼어들 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고, 그 모습은 한 끼 식탁의 설거지 하나의 편리함 따위는 하나도 제공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 모습은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 메우고 또 대체하려 한 뒤에도,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모습일 거야.


그래서 아빠는, 더는 설거지로 네 엄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단다. 그런 건 지우고, 메우고, 대체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내 안에서 떠오를 거니까.









젖은 몸으로 현관에 들어설 때가 되어서야, 비가 잦아 들었고, 나는 내 그리움이 부재를 통해서 현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색을 볼 때 보는 것은 빛이 아니라 색을 보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할 때 내가 보는 것은 내가 그리워하는 것. 그것은 빈자리가 아니라, 우리 둘 곁에 머물다 갔던, 그 자체로 충만하던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있다.


아이의 방문을 연다.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나는 이불이 젖을 새라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서는 아이의 머리를 만진다. 아이가 자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 알아, 아빠. 괜찮아. 근데, 식기세척기도 눌어붙은 미역은 안 되나 보더라"


"그래도, 설거지할 시간에, 공부나 더 하렴. 곧 수능이니까."







- 타인의 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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