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삼인칭으로, 더 나아가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가령,
지구의 한복판에서 어떤 이가 말했다 :
"너도 내 생각을 할까."
그는 혼자 길을 걷다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며 그 해 넘어간 반대편에 있는 이를 생각하며 그리 말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구의 반대편에서 어떤 이는 빨래를 개면서 생각했다.
"너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우리는 이 전체 지구를 내려다보는 하나의 시점을 선택해 그 둘을 연결하고 있다. 그 둘은 결코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그러며 우리는 이제 저 둘의 이야기를 그저 하나의 소설로 만들고 싶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정녕 그런 시점으로 전체를 내려다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상을 알 수 없다고 한들 그것을 왜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그 이유는 우리가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야의 저변에 깔린 두려움을 발견한다. 우리는 외로운 것이다. 오직 나만이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사실에 외로워져버리는 것이다. 오직 나 홀로만이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져서는, 어두운 밤을 걸어가고 또 빨래를 개며 문득 떠오르는 사람에 대한 상상력을 그저 거부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그러한 외로움조차도 이미 전지적인 시점의 서술 때문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이 세계에 홀로 동떨어져 있고, 또한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고독하게 생존해 있다는 그 외로움조차도 이미 우리가 이 세계를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에야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선 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때문에 또 누군가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며, 지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와의 어려운 연결 대신, 손쉽고 간단한 연결을 선택한다. 그는 전화를 걸어 술을 마신다. 그는 전지적인 관점에서 떠올릴 수 있는 신비한 연결 대신에, 간단하고 직접적인 연결을 선택한다. 그때 그는 다시 일인칭 시점으로 내려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연결을 선택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전지적 시점은 유효하고, 우리의 이러한 서술들이 한낱 허구에 불과하다 하여도, 우리는 이미 그러한 시점 위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전지적인 시점을 선택한 이상, 우리는 결코 저 아래에 있는 두 사람에게 직접적인 개입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둘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그러며 우리는 정말로 그들에게 귀띔을 해주고 싶다. 너희들은 정말로, 아주 우연히, 일치된 바로 그 순간에 서로가 서로를 떠올렸다고. 어쩌면 우리는 말하고 싶다. 그러한 우연의 일치는 존재하며, 이제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말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 말은 들릴 리 없고, 어두운 밤을 걸어가던 이는 친구를 불러 자신이 문득 떠올린 전지적인 시점의 연결을 간신히 지워린다. 노란 등이 은은하게 퍼져오는 술집 안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지구 반대편에 있던 이 역시도 빨래를 마저 개 버린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 채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잠시 그들을 사로잡은 생각에 의해 그 둘은 이러한 우리의 신비로운 서술들을 사용해서 계속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이어가고 있다 :
'정말로 우리가 동시에 서로를 생각한다 해도,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이 세상에 어떤 이들이 동전을 가지고 던지고 받는 게임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다른 어떤 이들은 정확히 같은 그람의 동전을, 그러나 다른 나라의 화폐인 바로 그 동전을 자판기에 넣어 담배를 꺼냈다. 그 일들은 정확히 같은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그보다 더 절묘하고 우아하게 대응하는 사건들은 이미 너무나 많을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사실은 그 두 개의 독립적 사건의 조합이 그래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들 그 둘은 그러한 일이 어디의 누군가와 동시에 일어난 줄도 모를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 조차 그 둘에게 이미 동시에 일어나는 사유의 저항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또한 모르고 있다. 그 둘은 동시에 서로를 생각한 뒤 서로를 포기하려 한다. 그들은 우연히 비일비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연결성을 확보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 즉시 그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한 우연이 되어버렸으므로 다시금 사소한 것으로 전락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나는 내가 가진 서술의 특권을 사용해 하나를 더 지적하고 싶다. 문득 떠오른 서로의 모습들은 도대체 왜 하필 그 순간에 떠올랐던 것이며, 또한 왜 그들은 그 사실로 말미암아 상대가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일까. 그러며 섣부르게 우리의 시점을 빌려 그 둘의 생각이 일치했다는 생각이 스치자마자, 다시금 그럴 리 없다고 쉬이 단정 짓고 말았던 것일까.
아마도 어둔 밤을 걷던 이는 밤공기에 흘러드는 계절 냄새에 반응했던 것이리라. 냄새라는 것은 종종 아주 치명적인 것이며, 그러나 종종 아주 쉬이 잊히는 것이다. 그리고 쉬이 잊히며 또한 재빨리 그 냄새와 연결된 것을 상기하도록 하기 때문에 치명적일 따름이다. 계절이 전환하는 이 순간에, 그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와 함께 걷던 밤길을 떠올렸다. 함께 걷던 밤길이 떠오르자, 함께 잡던 손이 떠오르고, 그 손에서 손으로 연결된 감각이 되살아난다. 아마도 그날 밤에 그는 자신이 손잡은 사람의 살겉을 느끼는지, 아니면 내 손으로 이어져 온 그 감각을 느끼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러한 질문은 겉모습이 철학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기는 해도, 사실 그가 아주 긴장했다는 사실만을 알려줄 뿐이었다. 그 긴장감에 어두운 밤길을 쉬이 누리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더욱 그때 그 순간이 간절하게 기억되고 있었던 것이다. 계절이 순환하는 그 순간의 밤공기는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도록 했지만, 사실 그때 그 순간에 그는 밤공기는커녕 맞잡은 손의 긴장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고, 사실은 그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지난날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순간으로 다시 한번 날아가 다시 그 순간을 체험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기억을 되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그리움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지난날들을 그리워할 때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순간을 지금으로 당겨버리는 것이고, 당겨진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다. 누군가 추억을 그저 하나의 추억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체념 조로 말할 때, 그는 당겨진 기억 속에서 여전히 내 흉중에 있는 그 사람과, 달라져버린 실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 사람 사이의 불일치를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기억과 그리움이라는 것이 그저 한낱 과거이고 바로 그 순간으로 우리가 돌아갈 뿐이라면, 우리는 사랑했던 사람의 변화조차 시간의 흐름 속에서 쉬이 인정해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을 쉬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둘은 저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어떠한 여전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그 중에 하나는 아마도 서로가 서로를 잊지 않고 가끔은 떠올려 주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에 이른 우리의 모험은 결국 끝나야만 할 것이고, 이제 그는 자기 자신 안에 여남은 마음은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상상력을 포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 놀이는 아주 위험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술을 따르며 삼인칭의 화법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양 신선놀음을 하고 있지만, 그 놀이가 나를 되려 외롭게 만든다. 내가 오로지 홀로 그리워할 뿐이라면 나는 그리움을 포기할 것이고 전지적인 시점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정된 상황을 지워버릴 것이다. 그러며 우리의 신비한 놀이를 마치 하나의 미신적 행위인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나의 손으로 술을 따르고 나의 손으로 술을 마신다. 나의 손으로 할 수 없는 미신을 포기하고, 오로지 나의 손으로만 짚어낼 수 있는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서도 망설여지는 마음. 그 순간에 사람들은 종교적인 인간이 될지, 현실적인 인간이 될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들이 연결을 믿을 때 그들은 전지적인 시점의 어떤 현상을 믿는다 말할 것이다. 그들이 연결을 믿지 않을 때 그들은 전지적인 시점의 어떤 순간이 가능하다고 한들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고, 가능하다 해도 무의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결을 우리가 기꺼이 믿어 종교적인 인간이 되건, 그러한 연결을 부정하고 현실적인 인간이 되건 우리의 서술은 이미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우리의 이 신비로운 놀이는, 고안된 것이 아니라 늘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놀이이며,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밤길을 걸었기 때문이고, 지금과 같은 이 밤공기를 가르던 순간을 여전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며 내가 너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시인할 수 있고, 또 여기에까지 이른 나의 상상력을 그저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내가 전지적인 시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면, 나는 이 놀이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연결이라는 것을 믿든, 믿지 않든 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여전히 너와의 연결을 믿는다 말하면 어떨까.
-타인의 일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