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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Jan 14. 2020

낯선 얼굴이 처음 짓는 표정

친구들과의 연말 모임. 사내놈들끼리의 모임이었지만 우리는 여느 때처럼 활기 넘쳤다. 녀석들은 술을 마셔라 부어라 했고, 나는 그에 질세라 마시고 부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노래방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저 각기 부르고 싶은 노래를 고르느라 바빴다. 저물어가는 이십 대. 우리는 그것을 붙잡으려는 듯이 철 지난 노래들을 골라서 불러 댔다. 이 작은 모임 안에서도 노래방 안에서의 사람들이 유형별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가장 큰 분류. 그것은 노래를 부르는 쪽과 부르지 않는 쪽이다. 그리고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 쪽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나를 뺀 나머지는 늘 경쟁하듯이 자기들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골라잡는다. 그렇게 골라잡는 녀석들 중에서도 여러 가지 유형이 나뉜다. 맨날 똑같은 것만 부르는 놈, 자기감정을 투영해서 들어줄 사람 아무도 없지만 여전히 사랑 고백을 하는 놈, 그리고 그런 놈들이 노래를 부를 때면 잔뜩 침체되는 분위기를 다시 띄우기 위해 노래하는 놈. 그리고 그 분위기를 띄우는 놈은, 그때 그 시절 우리가 부르던 노래보다 더 복고적인 노래를 선택했다. 나는 한 번이라도 '소방차'의 노래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정작 그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저기서 탬버린과 함께 궁둥이를 흔들어 대던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때문이었다.


그래도 음정 박자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이 단칸 방의 고성방가를 싫어한 적은 없었다. 그 안에서 나는 늘 우리가 몰래 가지고 들어온 맥주를 들이켜면서 담배를 피워댔다. 취기에 일렁이는 풍경과 탬버린 소리와, 자욱한 담배 연기와 같은 것들. 그것들이 느린 동작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그 작은 공간 안에서, 나는 또다시 시끄러운 소리를 피해서 나만의 공간으로 숨어들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미 깔린 취기 위에 맥주를 천천히 들이붓고, 담배를 더욱더 피워댄다. 나는 구석에서 조용히 끊임없이 나의 공간을 확보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그저 관조하고 지켜본다. 그러며 이 작은방 안에서 그들과 하나가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도 노래를 하나 예약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도 우선 예약으로. 


"뭐야, 누가 우선 예약했어." 


'소방차 친구'가 혼란 속에서도 들릴 정도로 크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녀석은 범인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또 너냐?" 


그는 고약하다는 듯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내 옆에 와서 덥석 어깨동무를 하고 내 옆에 앉았다. 녀석들은 나의 우선 예약에 대해서 별로 뭐라고 한 적이 없었다. 나의 노래는 언제나 노래방의 모든 서비스와 추가시간을 합치고 난 뒤에도 늘 그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근데 저건 제목이 뭐 저러냐. 처음 보는 노랜데." 


"그냥. 생각나는 사람 있어서." 


나는 대충 대답했다. 


"오올- 누군데 누군데." 


절대 대답 안 해줄 거 알면서 귀찮게 구는 새끼. 나는 취기에 사람 간의 평균적 거리를 무시하고 나를 덥석 안은 놈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피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꺼버린다. 대답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전주가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오랜만에 들어보는 기타 소리. 그러나 막상 부르려고 하니 정작 가사와 멜로디조차 생각나지 않아서 걱정이 밀려왔다. 눈은 재빠르게 화면에 떠오르는 가사를 훑는다.


<그대여 잠시 멈추어 주오>


그래, 그렇게 시작했다. 


<내가 도망갈 수 있게>


처음 들은 이후로, 한 번도 불러보지 않은 노래. 


<그대여 거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나의 도망을 바라만 봐주오> 





그날 너는 내게 이 노래를 불러 주었다.


우리는 고깃집에서 일을 하다가 만났다. 나는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장은 군 말없이 따박따박 제시간에 나와 말없이 일을 하는 나를 많이 아꼈다. 나는 필요 이상의 것들을 하는 것은 결코 좋아하지 않았지만,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꽤나 해박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게 싫어서 미연에 이것저것을 방지하는 편이었다. 


너는 그곳에서 나보다 먼저 일을 하고 있었다. 이미 일을 한 지는 꽤 된 것 같았는데, 나보다 일은 드럽게 못했다. 주문한 것을 잘못 듣는 것은 물론이고, 술병 개수도 잘못 세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건 뭐랄까. 마치 육지거북이 대서양을 건너는 것처럼 보였다. 허우적허우적. 그 누구보다도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승선에 빠르게 도달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너는 늘 증명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한심하다가, 나중에는 그게 불쌍해서. 나는 늘 테이블을 닦으면서도 네가 주문을 받을 때면 예의주시했다.


"삼촌 사 인분 아니고 삼 인분이에요." 


나는 지켜보다가 그렇게 네가 받은 주문을 수정했다. 그때 너는 매우 미안해하면서 늘 쩔쩔맸지만, 나는 그게 더 귀찮았다.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내 앞에서 쩔쩔매기까지 하는 건 더 성가셨다. 그래서 가는 그냥 괜찮다며 일축해 버리고는 그 자리를 떠 버리곤 했다.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배려할 여지는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중요한 것은 당장의 생계였으며, 학자금 대출 없이 졸업하는 것만이 나의 목표였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가 버린 대학교 3학년의 여름방학. 학기가 시작해 일을 그만둔다는 나의 말에 사장은 아쉬워하면서 회식이라도 하자고 말했다. 이제 고기 냄새라면 토할 것 같은데, 이 짠돌이는 회식을 그 가게에서 하자고 했다. 우리가 수없이 팔아댔던 삼겹살에 소주. 나는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거절하면 더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냥 한잔하기로 했다. 맨날 보던 거라 그런지 차라리 고기보다 차라리 소주가 맛있을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날은 모두가 다 취해버렸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사장은 소리쳤다.


"그래, 역시 노래방이다!" 


이제 정말로 귀찮아서, 나는 남은 식구들끼리 가라며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네가 나를 붙잡았다. 그래도 마지막인데 아쉽다고.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표정으로. 


그래서 우리는 결국 노래방에 갔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노래를 부르는 쪽과 노래를 부르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그 작은방을 메웠다. 그날도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 쪽. 그리고 너도 노래를 부르지 않는 쪽. 그리고 사장은 <남행열차>를 불렀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소방차의 <어쟀밤이야기>를 불렀다. 나는 그냥 담배를 피웠다. 사장은 맥주를 몇 캔 시키더니, 자기 품속에서 양주를 한 병 꺼냈다. 그간 이 양반이 회식을 못해서 얼마나 안달이 나 있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은 맥주 캔마다 그 싸구려 양주를 따라서 섞어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그 분위기는 꽤 우스꽝스러웠다. 얼마 남지도 않은 땔감 위에 휘발유를 부어버린 사람들처럼. 싸구려 폭탄주에 그 열기는 순식간에 뜨거워졌다가 마치 모든 것들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노래를 부르던 인간들은 한두 명씩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장은 마이크를 잡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지 않는 부류의 사람 둘만이 남았다.


나는 그때를 틈 타 일어나려는데, 네가 노래를 예약했다. 


<그대여 마음은 잠시 거두고 나의 외면을 바라만 봐주오> 


그래 그 노래. 모두가 잠들어 있는 와중에 예약했던 그 노래. 늘 내 앞에서 쩔쩔매던 네가 취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 안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마음으로 예약했던 그 노래.


<난 부서진 나뭇조각 같아서 그대가 다가올수록 그대가 아플 것 같아서.>


그 노래는 부르고 싶은 노래도, 그때 그 시절의 노래도,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도, 분위기를 띄우는 노래도 아니었다. 너는 가사를 놓치지 않으려고 화면에 띄워진 노래를 눈으로 열심히 좇으면서도, 그 노랫말을 기억하는 한에서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처음 들어보는 그 노래가, 네게도 역시 처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눌어붙은 맥주 찌꺼기 같은 냄새. 우리가 피워 댄 매캐한 담배 냄새. 사장의 코 고는 소리와 직원들의 잠꼬대와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안을 가르며 너의 목소리가 스며들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마이크 소리보다도 너의 목소리를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이크 소리와 너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그 낯선 노래가, 오늘 네게도 처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오늘 처음 보는 그 너의 표정이, 낯선 그 표정이, 너 스스로에게 역시 낯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면을 간신히 좇으며 흔들리는 눈동자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신이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고자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그 노랫말은 마치 어떤 사랑을 거절하는 노래 같았고, 그러나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노래 같았고, 자신의 겁을 고백하는 노래 같았다. 그 노래는 어쩌면 아주 너 같았다. 지레 겁먹고 부정하는 노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이미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열심인 것만 같은 그런 노래. 


<조금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꽃이 필 적에 그때도 그대의 마음이 내게 숨 쉰다면> 


그러나 그 노래는 포기하는 노래가 아니었다.


<내 손 잡아 주오> 


그 노래는 고백하는 노래였다.



시큰둥한 분위기. 녀석들은 내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관심도 없다. 오늘의 내가 부르는 노래는 그냥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 그래서 누가 신경을 쓰건 말건 상관없는 그런 노래. 그래서 분위기를 침체시키는 그냥 그런 노래. 그래, 이 노래였다.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 노래. 그 안에 일렁이는 마음과 마이크 소리를 구분할 수 있을 것처럼 내게 흘러들어왔던 그 노래. 너는 연약하고 무해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리고 너 자신도 믿지 못하겠지만, 너는 충분히 호소력 있게 강한 사람이었다.


"너는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모를 거야." 


마지막을 말하던 날 밤. 너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날, 내가 네게 이 노래를 듣던 날의 경험을 소상히 풀어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네 마음 같은 것은 전혀 모른다는 너의 그 모진 말을 부정할 수 있었을까. 마이크의 소리에서 너의 목소리를 떼어 낸 뒤에, 그리고 그 목소리에서 너의 마음을 떼어낸 뒤에, 그리고 그 마음에서 겁을 지워낸 뒤에, 그 안에 바로 그 마음을 나는 그날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그때는 나도 너를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때 필요했던 것은 네 마음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확신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 확신이 너를 불안하게 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필요했던 것은 오히려 네 그 마음을 따라 부응해주었어야 할 나의 어떤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과, 내 말을 쓸 데 없이 확산 시키는 그 마이크 소리를 치우고, 그 모든 것과 나의 마음을 분리해서, 내 안에 있는 그 마음을 네게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네가 넘어지지 않을까 잡아주는 것이었고, 잘못 들어간 주문을 고쳐주는 것이었을 뿐.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하는 사랑의 전부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을 뿐. 


"내게 숨 쉰다면, 내 손 잡아 주오"


마지막 그 노랫말 하나를 부르고 싶어서 했던 우선 예약. 나는 네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왜 그런 후회가 드는 것일까. 그날에 나는 분명히 네 손을 잡았던 것 같은데. 다시 돌아간다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어떨까. 




"야 우선 예약 해놓고서는 존나 못 부르네?" 


그래. 생생히 기억한다고 해도, 그 안에 있었던 마음들을 소상히 떠올릴 수 있다고 해도, 그때 그 시절의 멜로디와 네 목소리를 여전히 기억한다고 해도, 한 번도 연습하지 않았던 노래를 잘 부를 수는 없을 거야. 아쉬운 날의 추억은, 그 노래를 다시 한번 듣고 싶다는 하나의 마음일 뿐, 그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노래를 부르지 않는 부류와, 노래를 부르는 부류. 분위기를 띄우는 노래와,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는 노래, 그리고 또 고백하는 노래와, 그 목소리를 되떠올리고 싶은 노래. 간주 점프와, 점수 제거와, 우선 예약과, 눌어붙은 맥주와 재떨이 냄새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이후에 손을 잡고 마지막일 뻔한 그 마지막을 한 번 더 연장해보았던 그 마지막. 그리고 또 어떤 처음과 그 이후의 수많은 과정과 다툼과, 연장된 마지막을 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지막. 그때를 잠시 떠올리게 해주는 노래. 우리의 작은방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잠든 뒤에 우리만이 공유하던 그 목소리와 눈빛 같은 것들. 정신없이 돌아가던 미러볼과, 더는 들리지 않는 잠든 탬버린 소리와 같은 것들. 


나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 했던 거야.



-타인의 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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