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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Nov 05. 2019

신에 관한 우리의 어떤 논쟁 하나

너는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죽은 뒤에도 다시 만나자."


그에 나는 네게 말했다.


"죽은 뒤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있어. 그 말은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뜻이야." 


그러자 너는 내게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 말은 고맙게 받을게. 분명히 그 말은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어떤 태도를 드러내고 있어. 그러나 그 말이 내가 너를 좋아할 때에만 네게 할 수 있는 그런 말이라는 사실이, 그 두 말을 같은 뜻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야. 내가 너를 좋아하기만 했다면, 나는 네게 술을 사줄 수도 있고, 그저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네가 죽은 뒤에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말할 거야. 그리고 그 말은 결코 다른 그림으로 대치될 수 없어. 나는 그 말을 선택했고, 그 말은 오직 그 말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그런 말이 되기 위해서 내뱉어진 것이지, 그것은 다른 말에 대한 은유도 시적인 표현도 아니야."


그 말은 나의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나는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혀 무의미해 보이는 식전 기도의 의미를 이해해야 했다. 그것은 많은 것들에 연결되어 있었다. 너의 금욕주의. 너를 동경하던 사람들을 기꺼이 거절하는 태도. 사람들과 거리두기. 그리고 나는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너를 지켜보았다.


"어디서는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니까."


나는 그 말을 번역했다. <어디서든 나는 내 스스로를 보고 있어>로. 


"하나님은 사랑이야." 


나는 그 말을 환원했다.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어라>로. 


나는 결코 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결코 그리스도와 같지는 않았다는 간디의 말처럼, 나는 그리스도와 다른 그리스도인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대체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한 트럭 쌓여 있다는 그 사실로부터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네가 떠오르는 아침햇살의 경이를 세계와 신에 대한 경이로 해석하며, 또 아프고 괴로운 것들을 어떤 징벌로 생각하며 괴로워하듯이, 나 역시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찮고 불경한 것들을 신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하며 신을 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신의 존재에 대한 나의 믿음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고,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눈앞에 있는 한 명의 그리스도 인의 반례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를 통해 결코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그칠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믿는다는 사실이 네게 불쾌한 것이 될 수 있을까?


따스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너의 눈망울 안에서 어떻게든 네 말을 환원하고 번역해서 나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나의 태도를 이해한다는 그 깊은 믿음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자신감이 있었고, 그것은 단지 신이 나의 뒤를 지키고 있으니 내게는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그런 태도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또한 내게 거대한 재산이 있으니 조금의 손실은 별것도 아니라는 그런 태도로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은 네 안에서 생득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강자의 너그러움인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신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는 어떠한 메시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까지 신을 믿는 자들의 태도를 나의 믿음 안에서 이해하고자 할 때, 여전히 나는 존재하는 모든 신에 대한 믿음과 현상들을 나의 방식으로 번역하고 환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왜 그래야만 했던 걸까? 나는 왜 너의 믿음들을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가능했을 것처럼, 그렇게 환원하고자 했던 걸까. 


그것은 내가 진실로 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 너의 모든 행위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네 안에 그 믿음으로 바삐 움직이는 너의 존재는 여전히 이 세계에 긍정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도대체 그때 내가 신을 그저 긍정해버리면 그만이었던 것은 아니었나. 지금에 와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런 나의 고민에 전혀 괘념하지 않았던 것 같다. 너는 그냥 보통 사람 중에 약간 더 특이하고, 약간 더 진중했을 뿐, 그저 보통 사람이기도 했다. "죽은 뒤에 다시 만나자" 그 말을 결코 건네고 싶지 않았을 경망스러운 사람들을 너는 분명히 알고 있었으니까. 너는 신에 대한 조롱과 부정은 참을 수 있었지만, 네 기준에 어긋나는 경거망동의 인간은 결코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런 너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안심했던 걸까, 아니면 아가페의 사랑과는 다른 나와의 특수한 친분에 만족했던 걸까.


그 해 가을. 우리는 오징어 낚시잡이 배를 타고 서해로 나갔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그때의 나는 아주 시니컬해서 성경을 비웃는 방법을 아주 많이 알고 있었고, 오징어를 먹지 말라는 말이 그에 적혀 있다는 것도 어디서 주워들어 알고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그리스도인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빈정거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낚시하러 가자고 말하는 네 취미가 너무 아저씨 같아서 그게 재미있었고, 둘째로 나는 낚시 같은 것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무서웠다.


예상했던 대로 갑오징어는 무서운 녀석이었다. 먹물을 쏴 대고 내 얼굴에 검은 먹이 튀었다. 너는 웃었고, 그걸 보면서 나도 웃었다. 그리고 흔들 흔들 거리는 배에 나는 멀미를 했고 실컷 토 했다. 바지에 튄 바닷물에 허벅지가 시렸고, 코 끝이 천천히 매워 올 무렵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매스꺼운 속이 조금은 익숙해져 잠잠해 들 무렵. 수평선에 닿을듯한 해는 어느 곳에 있을 때보다 더 커 보였고 그만큼 더 붉어져 있었다. 그것은 빛을 내뿜고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이제는 하늘에 존재하던 모든 빛을 서서히 흡수하며 모든 것을 데리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쓸쓸해 보이기도 했고, 또 경이로워 보여서.


"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때에도 나는 내가 존재하는 세계와 그로부터 느껴지는 이 세계관 안으로 너의 신을 포섭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너는 말했다.


"신은 자연과는 조금 달라. 나의 신은 인격을 가진 신이니까."


그리고 너는 또다시 한걸음 더 물러났다. 나는 우리 둘 사이에는 결국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주 깊은 심연이 그 사이를 메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갑자기 너는 쇠꼬챙이를 꺼냈다. 그리고 갑오징어의 머리와 다리 사이에 쇠꼬챙이를 푹하고 찔러 넣었다. 순간 갑오징어는 움찔하더니, 제 붉은빛을 잃고 하얗게 질려서 힘 없이 축 늘어졌다. 나는 네게 물었다.


"지금 뭐 한 거야?" 


"즉살한 거야. 신경을 끊어버린 거지."


너무 능숙하게 한 생물의 숨통을 끊어버린 광경을 보면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나는 다시 또 물었다. 


"이렇게 죽이면 덜 고통스러워서 그런 거야?" 


그러자 네가 답했다.


"바보야, 이렇게 해야 집까지 가져가서 회 떠먹어도 맛있는 거야."


그 말에 나는 허탈해져서. 그냥 막 웃어버렸다. 나는 너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스물셋의 초가을. 즉살된 갑오징어. 능숙한 너의 손놀림. 아이스박스. 비린내. 매스꺼움. 쓸쓸함과 허탈함. 그리고 안심과 위안. 너의 아파트. 초고추장과 소주. 오징어의 겉껍질을 벗겨내던 역시 능숙한 너의 손놀림과, 칼질과, 도마 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와, 종교인이 술을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과, 거짓 없이 내뱉어지던 여러 논쟁과, 그 논쟁을 무마하는 농담과, 결국 결론 없이 끝내버리던 우리의 대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저 먼 땅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인격신을 전도하겠다고 떠났던 네가 죽었다는 소식 하나.


나는 지금도 네가 무모하게 이도교의 땅에서 고집을 설파하려 간 것은 아니라며, 단지 한 명의 인간으로서 타인을 돕기 위해서 떠난 것이라며, 나의 믿음으로 너를 이해하기 위해 여전히 너의 행위를 번역하고 환원하고 있다. 


"죽은 뒤에도 다시 만나자."


그 말은 분명히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그런 말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단지 내가 너를 좋아했다는 그런 말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 사람의 사라짐은 그저 사라짐이었고, 나는 결코 믿을 수 없는 그 말을 여기에서 홀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너는 여전히 내 앞에서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내게 말할 것이다. 그 말은 그저 그 말일뿐이고, 너는 지금 내게 죽은 뒤에도 다시 만나자는 그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너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인가. 나의 이 모든 말은, 사랑과, 아쉬움과, 그리움과, 절망과, 슬픔과, 고통으로 번역되어야만 할까. 그냥 어디엔가 네가 살아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될까.


나는 틀린 걸까? 그런 걸까? 


그것을 홀로 물을 때 나는 감당해야 할 감정만이 그저 과제로 남아 있다고 느꼈고, 또 오직 그뿐이라고 느끼려다가. 


문득 네 옆에 앉아 턱을 괴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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