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방. 하얀 방.
그래서 차갑고 하얀 방.
너는 그 차가운 하얀 방 안에서, 한줌 채 되지 않는 초콜릿을 조각칼로 파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네 곁으로 다가간다. 얼음장 같은 공기 속에서 나는 오들오들 떨었고, 그런 나는 네게 마음을 물었다.
"말에 속지 마. 그럴듯한 말에 속지 마."
너는 말한다.
"마음은 말야, 강렬하거나 지속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야.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니? 아무리 예쁘고 그럴듯하고 유려해도, 결국 짧고 약한 마음은 그저 쉽게 녹아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그럴듯한 말로 마음을 묘사하는 허튼수작에 결코 속지 말렴."
그런 너는 차가운 방 안에서, 한줌 채 되지 않는 초콜릿을 조각칼로 파내고 있었다. 확대경을 쓰고 장갑을 낀다. 아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순식간에 그것이 파괴될 수도 있을 것처럼. 조금이라도 오래 쥐고 있으면 그것이 스르르 녹아버릴 것처럼.
하얀 방의 그 찬 온도. 그것은 짧고 약한 우리 마음이 체온에도 쉽게 녹아 버리기 때문이다.
"좋아하고 있어."
너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천천히 말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야."
차분하고 침착한 비겁함으로, 그렇게 말한다.
"좋아한다는 것은, 아마도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너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는 거야. 무의미하게 걷던 거리가 갑자기 훤해지더니, 정처 없이 떠돌던 세상 안에서 나도 몰래 어떤 희망이라는 것이 조용히 생겨난다는 거야. 마치 이 길의 끝에 무언가가 있으리라 믿어버리는 거야. 매섭게 볼에 닿는 바람에도, 그것이 내 옷자락을 타고 슬금슬금 들어와 오들 오들 떠는 날에도, 여전히 살아가고 싶어지는 거야.
가슴이 두근두근. 세상은 일렁일렁. 지루하던 삶 앞에서 목적이 생겨나고, 어느새 어떤 노래를 흥얼거리는 거야. 갑자기 달려가고 싶은 거야. 다시 만나기 까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남았는데, 물리적인 거리를 하염없이 달린다면,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처럼. 지루한 주말을 지나서, 우리 약속한 날로 당장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이 터무니없는 줄을 알아서, 다시 천천히 내 가슴을 쓸어내리고, 호젓하게 걸어가고 싶은 거야. 너 걷는 속도보다 내 마음의 속도가 빠를세라, 마음을 다잡고 그리 걷고 싶은 거야.
그리고 문득, 즐거움과 설렘이 가시는 어느 날 저녁에, 문득 외롭고 불안해지는 거야. 갑자기 생겨난 희망과, 우리 삶의 목적과, 즐거움들이 사라지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무서워지는 거야. 삶은 순식간에 지루한 것으로 탈바꿈하고, 훤히 보이던 길들이 갑자기 어둠에 잠기고, 나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거야. 어느새 나를 견인한다 믿었던 마음은, 내 것이었던 그 마음은, 내 것이 아니게 되더니, 나는 그 감정들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는 거야.
그것에 다시 비참해져서는,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려서는, 추위보다 강하게 끓고 있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려서는, 내 안에 파고드는 바람이 소름 끼치도록 차가워서 옷깃을 여미고 여며서는, 길을 걷다 울컥 멈춰 서서는, 웅크려 앉아 그 코트를 내 무릎까지 꼭 덮어버려서는, 벌벌 떨고 마는 거야."
그렇게 말하던 너는, 그 작은 한 줌의 초콜릿 조각을 파고 또 판다. 멀리서 보면 아주 작은,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너무나 섬세한 그 마음이 결국 초라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 양. 그러나 그 작은 조각 안에서도 회전목마는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 짧고 약한 조각 안에서 회전목마는 빙글빙글 돌아간다.
너는 이제 그 작은 조각에 바람을 훅 불어 깎고 깎인 마음의 잔해들을 날린다. 그 광경을 유심히 보는 내게 너는 네 코트를 걸쳐 주더니, 난로를 켠다.
그 앞에 얇게 깐 종이 호일.
"하지만 말야."
그 위에 아주 작은 마음 하나. 아주 짧고 약한 마음 하나. 그것은 난로의 열기에 천천히 녹아버린다. 빙글빙글 돌아갈 것만 같던 회전목마는 어느새 끈적끈적. 벌벌 떨던 내 몸도 그와 함께 노곤 노곤.
"마음의 모양 따위는 별것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여전히 그 덩어리를 유지하는 작은 마음을 반으로 톡 쪼개서, 그 반은 네 입에 넣었고, 나머지 반은 내 입에 그리 넣어주었다.
그것은 달콤했고, 그러나 이내 스스로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봤지?"
그렇게 말하더니, 천천히 웃어 보였다.
-타인의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