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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Feb 25. 2019

<퍼스트맨> : 대표자와 단독자



<퍼스트맨>을 보고자 했던 것은 데미언 셔젤(다미엔 차젤레)의 이전 작과의 연관성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위플래쉬>와 <라라랜드>는 그 연관성이 너무나 뚜렷했고, 그것에 대해서는 이전에 한번 글을 썼던 적이 있다. '위플래쉬'는 꿈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려가는 강박증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라라랜드'는 꿈을 이룬 자들이 놓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노래였다. 둘 모두 인간들이 정향하는 목표, 꿈이라는 것에 얽혀서 드러나는 서사다. 그런 점에서 <퍼스트맨>이라는 영화 역시도 위대한 위업을 이룬 자의 전기적 영화라는 점에서 어떻게든 이전작들과 연관성을 지닐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퍼트스맨>만이 드러내는 두드러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루는 자의 현실적인 '과정'이다.

이전 작들은 어떻게든 현실적인 '과정'들은 발견하기 어렵다. 가령 '위플래쉬'에서 앤드루는 최고가 되겠다는 강박증이다. 그를 호되게 교육하는 플래쳐와의 사제 구도 간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안에서는 분명히 피를 토하는 노력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대변하는 것은 그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그 노력의 이유다. 오로지 최고가 되겠다는 그 일념과 열정, 경쟁 안에서의 강박증, 폭군 같은 스승조차 관철시키는 투지 그 자체다. 그것이 노력을 야기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 과연 앤드루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알 수 없다.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 꿈을 쟁취하는 역사는 생략되어 있다. 

그 이후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라라랜드>다. 라라랜드에서 세바스찬과 미아는 서로 각자의 꿈을 가진 채 만난다. 세바스찬은 재즈바를 여는 것이 목표이고, 미아는 훌륭한 여배우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꿈을 가지고 만나 사랑하고, 또 꿈 때문에 이별한다. 그런 뒤에 모든 것을 다 이룬 그 둘은 다시 만나 예전에 꿈을 꾸며 사랑하던 자신들을 잠시 떠올리고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위플래쉬' 에서 보여주던 꿈을 위한 열정은 조금 더 경시되고, 그것을 마침내 이룬 후에 포기한 것들에 대한 감정들이 부각된다. 여기에 대해서도, 세바스찬과 미아가 서로 헤어져서 자신들의 꿈을 위해서 어떠한 것을 어떻게 잃었고 또 쟁취해야 할 것을 어떻게 쟁취했는지는 생략되어 있다. 

위플래쉬가 젊은 날에 꿈을 위해 달려가는 폭발적인 감수성이라면, 라라랜드는 다 이룬 자들의 회한이다. 그러나 그 젊은 날의 열정과 다 이룬 후의 회한 사이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놓치고 또 무엇을 가져가는가. 그것은 특별하고 아름다운가, 아니면 괴롭고 고통스러운가. 데미언 셔젤은 바로 그 공간에 대해서 물음표를 떼지 안은 채로 이전의 두 작품을 훌륭하게 마무리 지었고, 이제 <퍼스트맨>에서 그를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를 읽고 파악하는 평론가들 입장에서 <퍼스트맨>은 꽤 특별한 것으로인식될 것이고, 마침내 이전 작품을 보완하고 완성 시키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퍼스트맨>만 놓고 본다면 이는 꽤 지루하거나밋밋한 영화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젊은 날의 열정이나 다 이룬 후의 회한과 쓸쓸함과 같은 극적이고 낭만적인 요소가 많이 덜어졌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꿈을 이룬다는 것은 지루하고도 권태로우며, 오로지 열정으로 되는 것도 아닌 데다, 우연이 개입하고, 심지어 바로 그 우연이나 사소한 노력 부족, 혹은 재능의 한계로 말미암아 실패할 수도 있다. '위플래쉬'와 '라라랜드'는 그래서 낭만적이고 또 열정적이지만, <퍼스트맨>은 담담한 개인사를 담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또한 <퍼스트맨>은 순수한 픽션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닐 암스트롱의 '전기'를 다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닐 암스트롱의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확실히 '위플래시'에서 보여주었던 꿈에 대한 열정, 그 꿈을 이루어야 할 대단한 이유와 같은 것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달로 가고자 하는, 가야만 하는 이유는 미국과 소련의 선전 효과를 위해서다. 반드시 상대 진영보다 먼저 훌륭한 성과를 보여, 자본주의의 위력을 과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닐 암스트롱이라는 인간 자신이 달에 도대체 가야만 하는 이유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영화는 닐 암스트롱 그 자신이 달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인류를 위해서라고 표현하지도, 또 새로운 미지의 땅을 나 자신이 개척하겠다는 거대한 소명을 위해서 였다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는 초인도 아니었고, 인류의 대변자도 아니다. 

그가 싸워야 하는 것은 외부적인 것으로는, 어린 나이에 암으로 죽어 버린 자신의 딸에 대한 트라우마와, 끊임없이 위험한 일에 대해 도전하는 데에서 자신을 붙드는 가족들이다. 나아가 자신보다 먼저 도전했다가 죽어버린 동료에 대한 죄책감과, 나도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그러나 더 직접적으로 달에 간다는 것은 그러한 모든 외부에서 나를 파고드는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삶 안에서 내가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이다. 그것은 오로지 나만이 인류를 대변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로의 책임감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실수만 해도 나의 손끝에서 내 삶이 종결 될 수 있다는 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사실이다. 우주 공간에서 나를 대신해서 지켜줄 수 있는 것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암스트롱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제미니 호 안에서 정신을 놓지 않고 수많은 버튼과 장치들을 통제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으리라 상상하지만, 실제로 아주 극단적인 순간에서 인간은 종종 의지하고 싶은 마음과, 망설임, 나약해서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런 단독자가 우주 공간에서 해내는 것들은 주변에서 아무리 '정치적인 공작의 우주쇼'라고 떠들든, 혹은 '위대한 인류의 업적'이라고 칭송하든, 그와 하등의 관련도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1등만을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말하면서, '닐 암스트롱'의 이름은 기억해도, 두 번째로 발을 디딘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상은 사실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더 어렵다. 아폴로 11호가 뜨기 전에 죽어간 사람들을 우리는 영화를 보고서야 안다. 그들은 종종 '왜'를 묻는 것조차 사소할 정도로 어렵고 위험한 일을 하고도 기억되지 못한 채로 죽었다. <퍼스트맨>이라는 것은 세컨드맨을 종종 배제할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존재했던 다른 사람들의 존재조차도 지워버린다. 그러나, 바로 그 퍼스트맨이 가능했던 이유조차도 바로 그 모든 인간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며,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마땅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그리했던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힐난한다. 세금으로 더 좋은 데에 쓸 일이 많은데, 도대체 왜 인간을 쓸데없이 달에 보내야만 하는가. 그때 달로 향하는 이들은 인류의 대변자도 아니거니와, 어떤 특정한 국가의 대변자조차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스스로 살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위해서 노력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 안에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사랑하는 가족조차도 자신의 도전에 대해서 만류하고 우려하고, 비난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 때문이고, 종종 사랑이든 시샘이든, 정치적인 공격이든 그 어떤 것도 나를 지지해주지 않는다. 그런 모든 상황 안에서 또한 나의 실수 하나가 나를 좌초시키고, 그 무엇도 나를 대신해서 구원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감수했음에도 먼저 죽어갔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죽음조차도 무게가 되어 나를 짓누른다. 그들은 대변자가 아니라 한 명의 단독자가 된다. 

그러나 달 위에 선 닐 암스트롱은 그러나 다음처럼 말했다 :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 

그리고 이 말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된다. 미국에 있어서는 소련에게서 자존심을 회복한 역사적인 사건이고, 타국의 사람들은 미국이 어떻게 생각하건 인류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는 다시 그 한 명의 단독자를 대표자로 만들어 버리고, 그 단독자가 어떻게 그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또 물음표로 덮어버리고 잊어버린다. 우리는 1등만을 기억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1등으로서의 한 사람은 더 이상 단독자가 아니라 이미 대표자이다.

그러나 그 안의 한 명의 단독자로서의 인간은 어떠한가. 그리고 타인들이 대변자로서 기억하든 하지 않든, 역사의 한 날개는 훌륭한 단독자들의 피와 땀으로 발전해 왔다. 그것은 결코 대변자이기를 바랐거나, 어떠한 이념을 등에 업어서 그리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은 또한 그들답게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고 죽어 또 잊혀지기도 하였다. 그리 잊혀지는 자들이 삶을 옆에서 지켜봐 왔고, 또 바로 그런 인간을 보며 가슴을 졸이던 가족들이 있었다. 이것은 그저 또 하나의 진실일 뿐이다.

이는 결코 <위플래쉬>보다 치열한 이념에서 시작하지도, <라라랜드>보다 더 낭만적인 것도 아니지만, 하나의 현실이고 우리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런 뒤에 나의 삶은 어떠한가.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그를 위해서 어떠한 책임을 스스로 지고 행위 할 것인가. 그런 뒤에도 일이 성취되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꿈을 위한다는 열정보다 밋밋하고, 다 이룬 후에 놓친 사랑과 그 시절 낭만보다도 덜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보다 더 위험하고 중요한 것이다.
 
암스트롱이 그 일을 해내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그를 대표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제 그는 한 명의 대표자로 기억된다. 그 대표자에 대한 논의는 아직까지도 시끄럽다. 성조기를 꽂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닐 암스트롱을 미국의 '대표자'로 기억해야만 하겠다는 사람들은 여전히 말들이 많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성조기를 꽂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사실 그는 미국의 대표자가 아니라 인류의 대표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안심했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도 아니었고 오로지 스스로였으며, 그 주변의 많은 상황과 어려움과 함께 했던 그런 단독자였을 뿐이다. 그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아닌 그였을 뿐이며, 나 역시도 그 누구도 아닌 그저 나이다. 그런 나일 수 있었던 어떤 사람이 종국에 가서는 대표자로 기억된다. 그것은 결코 그 자체로 나쁜 것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는 그 자신이어야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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