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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Feb 25. 2019

<박하사탕>: 되감기와 되풀이



박하사탕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되감는다. 기차는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간다. 시간을 여러 번 되감아본 사람을 알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다만 되감을 때,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우리는 되풀이할 뿐이다. 나의 삶은 역사 없이는 되떠올릴 수 없고, 그때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우리의 역사가 달리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아니라, 이렇게 밖에 이를 수없었던 원인과 이유다.


스무 살의 영호는 들꽃을 바라보며 그를 사진 속에 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싶었던 영호의 손은 어떻게 되었는가. 첫사랑 순임이 제대 후 다시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순임을 비열한 방식으로 내팽개쳐 버린다. 자신의 손이 착하고 예뻤다는 그녀의 말에 이제 자신의 손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계엄령과 함께 군인의 신분으로 사람을 죽여야 했던 영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순진했기 때문에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용서할 수 없어서 더욱 몰아붙인다.

그것도 한때의 이야기다. 죄책감조차도 희석되어 사라져 버리고, 시대 안에서 사람은 괴물이 된다. 중요한 것은 순진했던 나날과 잔인한 역사가 괴물이 되어 버린 한 사람의 모습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다만, 도대체 그러한 변화의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다. 영호는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면서 산다. 정당화하기 위해서 경찰이 되고, 나라의 명령을 따르는 삶을 선택한다. 시대가 또 변화한다. 돈의 시대와 자본의 시대가 찾아온다. 사업을 해서 돈을 번다. 시대가 시키는 대로 살았던 그 삶 속에서, 영호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살았으나, 결국 그 누구도 그의 삶을 지지해주지 않고 위로해 주지 않는다.

시간을 되감는다. 역시 분명해지는 것은, 그를 아무리 되풀이해도 달리 될 수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조차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남용되어 이해될 것이다. 누군가는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역사 안에서 변모한 개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영호 그 자신은 누구보다 달리 되고 싶었다. 누구보다 순임과 함께 하고 싶었고, 사람을 때리는 손이 아니라, 아름다운 무언가를 담는 손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리려 하는 순간, 모든 것이 그저 되감아지는 것일 뿐이었고, 가장 돌아가고 싶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갔을 때, 다시 시작하려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모든 것이 그대로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한 개인으로 넘어설 수 없는 역사가 있고, 내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고 변해버릴 내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달리 될 수 없는 역사를 만든 것은 또한 나 자신이다. 더욱 의지적으로 순임을 그 자신의 삶으로부터 몰아냈고, 더욱 열심히 경찰 신분으로 잡아온 학생들을 패고 또 팼다. 

우리의 이야기를 여기서 마치고, 이제 따로 놓일 내일의 삶을 좋게 될 수 있도록 힘을 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영호의 삶은 너무 늦었다. 순임의 삶도 이미 끝났다. 그 끝에서, 어쩌지 못하는 그런 삶은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다. 그래서, 처음 그 소풍의 순간으로 돌아갔던 영호가 할 수 있는 것은 눈물이다. 역사를 어기고 단 하나의 왜곡이 허용되었을 때, 그가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눈물뿐이었다. 그 잠시의 허용을 끝으로, 거꾸로 가던 기차는 다시 우리가 그리 흐른 대로 삶을 흐르도록 만들 것이다. 되감아 보는 것은, 결국 너무 늦었다는 사실만을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영호도 알고 있었다. "삶이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냐?" , "니가 얼마나 잘나서 그렇게 버티냐" 이상을 위해서 버티던 학생들에게 그가 그렇게 소리쳤던 이유는,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되감아도 되풀이 되고, 삶은 여기 이곳에 이미 이렇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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