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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Feb 25. 2019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 압도적인 힘의 존재론


*스포있음


빌런의 본질 상실

영화의 빌런의 '빌런다움'이라는 것은 투박하게는 선을 위협한다는 데에, 현실적으로는 인류를 위협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은 이제 우리에게는 식상하다. 그 이유는 그 힘의 무게를 우리가 체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빌런이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이미 영화라는 장르 안에서는 '파괴'와 '재앙'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과포화 되어 있다. 빌런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당연히 건물 몇 채가 부서져야 하고, 혹은 하나의 도시 전체가 파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스펙터클은 '미션 임파서블'같은 첩보영화에서도 볼 수 있고, 재난 영화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파괴 인플레이션은 죽는 인간의 수와 터지는 자동차와 붕괴되는 건물의 수의 압도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든다.

매력적인 빌런의 존재론

이제 빌런들은 그들의 본업인 순수한 파괴력을 통해서는 우리에게 그 매력을 어필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파괴의 '과정'이 참신해야 한다. 그들 각자는 독특한 매력을 뽐낸다. 그러한 매력의 어필은 빌런의 힘의 강도에 상관없이 그들을 '좋은 빌런'으로 만든다. '로키'가 그렇다. 장난의 신인 그는 늘 죽은 것 같아도 다시 살아 돌아오고, 자신의 형인 토르의 믿음을 늘 져버리고 배반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뽐낸다. 그의 힘은 인류를 위협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꾸며내는 꾀는 영화 속 히어로를 성가시게 함으로써 관객에게 어필한다.

또 다른 방식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 빌런에 감정을 이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들 각자의 사연을 소개해 보여준다. 관객과 빌런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외계물질의 밀거래를 선택한 아버지가 빌런으로 나온다. <블랙 펜서>에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와칸다에 배신감을 품은 탕아가 빌런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관객과의 공감대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영화 속 히어로와도 그 관계를 형성한다. 스파이더맨에게 있어서 그가 제압해야 할 적은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의 아버지다. 블랙 펜서에서의 악당은 실은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고아가 되어버린 자이다. 이러한 가운데 갈등이 발생하고, 이들은 대단한 힘이 없어도 쉽게 제압하기 어려운 빌런이 된다.

소름끼치는 빌런의 존재론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영화를 흥미로운 서사로 만들 수는 있어도, 빌런의 본업에 있어서는 충실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장르가 '히어로물'이라면 특히 더 그렇다. 그렇기에 영화는 다시 빌런을 '압도적인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그 압도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공포감'을 조장하는 것이다. 가령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그렇다. 무슨 짓을 할 줄 모르는 미친놈을 제시한다. 그는 단순히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자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유희를 위한 체계적인 무질서를 야기하고자 한다. 이와 유사한 것이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이다. 그는 대단히 지성적인 사이코패스다. 어떠한 짓을 할지 모른다. 그것은 조커의 의도된 '카오스'와 유사하지만, 그것보다 헤어 나오기 힘든 지성적 존재라는 것도 한몫한다. 우리가 그를 예측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사이코패스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대단히 지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를 예측하는 게임에서 우리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관객은 이러한 독특한 빌런을 통해서 소름 끼치는 '공포'를 마주한다.

이러한 '공포'의 빌런은 '연출'과 '연기'에 기댄다. 그래왔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양들의 침묵과는 달리) '히어로물'이라는 장르에서는 결국 히어로가 승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승리하는 히어로 앞에서 빌런의 힘은 무용지물이 되겠기에, 감독은 성 여러 채를 동시에 부술 수 있는 거대한 용을 사용하는 대신에, 독거미 같은 소름 끼치는 빌런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빌런은 관객을 공포에 몰아넣고 관객을 압도했어야만 하는 저 자신의 체면치레를 간신히 이어왔다.

압도적인 빌런의 존재론

그런데 이러한 '공포'의 빌런은 여전히 '압도'의 빌런이 아니다. 빌런의 핵심은 인류를 아포칼립스의 지경에까지 몰아넣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공포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힘의 문제다. 우리는 조커의 외면의 모습과 연기로부터 쫄아서 도망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공포의 빌런이었다. 우리를 쫄게 만드는 빌런 앞에서 용기만 내면, 그리고 그 용기가 잠재된 힘을 깨우기만 하면 이길 수 있는 존재였다. 

<인피니티 워>는 다르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다. 그것은 종말이 도래하는 방식이다. 히어로물의 핵심은 '힘 앞에서는 더 큰 힘으로 누르면 된다'라는 힘의 진실을 몰래 감춘다. 정의로운 마음과 악에 맞서는 용기만 있다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더욱 강조한다. 그리고 그들은 늘 그러한 방식으로 이겨왔다. 최후의 순간에 용기를 내면 이긴다. 응원을 받으면 이긴다. 용기와 응원이 없다면 갑작스러운 기지와 꾀를 발휘해서 이긴다. 갑작스러운 꾀조차 떠오르지 않을 때는 동료가 등장해서 이긴다. 그러나 압도적인 힘의 빌런은, 용기가 있고, 응원도 있고, 지혜도 있으며, 동료까지 있는데도 진다. 타노스다. 

히어로물의 역설은 빌런이 가장 빌런 다운 순간에 히어로물이 응당 드러내야 할 승리를 보여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빌런을 그저 매력 있는 악당으로, 혹은 연민의 대상으로, 그렇지 않으면 소름 끼치는 공포를 선사하는 대상이 된다. 그들이 얼마나 매력 있건, 감정이 이입되건, 공포스럽건, 히어로가 조금만 더 강하면 이길 수 있는 것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타노스는 한 개의 인피니티 스톤을 가지고도 헐크를 때려눕힌다. 바로 그것이 압도적인 힘이고, 빌런들이 추구했어야만 했던 본연의 미덕이다. 

압도적인 힘의 존재방식은 '무력감'을 선사하는 것으로서 이루어진다. 관객들은 타노스의 폭력 앞에서 공포를 넘어선 무력감을 느낀다. 히어로들은 용기를 냈고, 정의로운 마음도 가지고 있고, 사랑도 하며, 동료와 함께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이미 충분한 것 같은데, 이길 수가 없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계산하고 난 뒤에도 어쨌든 더 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패배한다. 히어로의 절반이 사망하고, 우주의 생명 절반이 재가 되어 날아간다. 무력감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힘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는 빌런 본연의 압도적인 힘의 존재 방식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관객들의 무력감을 통해서 증명된다. 타노스는 우리가 보지 못한 빌런이다. 진정한 빌런이라면 으레 그러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지 못했던 이유는 두 시간 남짓의 시간을 통해서 모든 영화가 갈등과 해소를 동시에 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배트맨을 궁지로까지 몰아넣었던 압도적인 빌런 '베인'역시도 결국 용기를 낸 배트맨 앞에서는 결국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압도성은 종국에 가 휘발된다.

그러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다르다. 그러한 프로젝트 자체가 이미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마블 시네마는 이제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들은 알고 있고 관객도 알고 있다. 속편이 제작될 것이고 또 제작되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타노스를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었고, 히어로를 그렇게까지 패배하도록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관객이 느낀 무력감과 충격은 또한 바로 그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압도적인 힘 때문이다. 우리는 그간 봐온 개개의 영화들을 통해서 히어로의 승리에 익숙해져 왔고, 그들 각자에게 감정을 이입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패배는 한층 더 큰 상실로 다가온다. 

누군가는 이를 속편을 위한 "예고편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반대다. 이 영화는 속편이 있기 때문에야 진정으로 빌런 다운 빌런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히어로는 결국 지지 않을 것이다. 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일단.잠정적으로. 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잠정적인 패배가 절대적인 패배로 드러났던 이유는 영화 한편 안에 그 빌런의 압도성과 히어로의 무력함만을 처절하게 보여준 뒤 엔딩 크래딧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에 무력감을 실감하면서도 동시에 열광한다. 무력감의 이유는 아포리아의 결말 때문이고, 열광의 이유는 속편의 존재 때문이다. <인피니티 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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