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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Mar 17. 2019

<사바하> 가정되는 신, 요청되는 신

사바하를 관람한 지 2주가 넘게 흘렀다. 생각을 조금 정리하고 싶었으나, 그 사이에 이미 구체적인 스토리는 많이 잊어버렸다. 그만큼 신에 대한 나의 형이상학은 분명해졌고, 그래서 스토리를 해설하는 것보다는, 그 이야기가 함축할 수 있는 것들만을 서술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사바하>는 잘 만들어진 영화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그 이야기는 신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신을 믿는 사람 모두를 얼마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두 진영의 인간 모두를 어느 정도 불쾌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내가 이 영화를 초자연적인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 읽든 그렇지 않든, 상대편의 진영 역시도 나와 상반된 해석을 내리고 싶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불온한 속성이다. 그것은 반드시 현실과 일치하지 않아도 된다. 가령 다음의 진술은 무어가 이야기한 것이다 : 


"지금 비가 온다, 그러나 나는 비가 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위의 진술은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비가 온다는 사실판단을 말하면서도,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믿음이라는 것이 사실과 독립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이기 때문에 기괴하다. 지금 비가 온다는 사실판단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진술을 동시에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 사람은 정신분열을 일으키고 있거나, 아니면 농담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믿음이라는 것은 사실과 독립적이면서도, 한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신의 존재는 경험적으로 증명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사람들은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전쟁을 벌이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기도 한다. 신을 믿는 사람들이 대단한 희생을 할 때 그들은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가능했다고 이야기하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신을 "믿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가능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누가 무언가를 믿는다고 주장한다고 한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의 객관적 사실을 보장하지 않으면서도, 그러나 그 믿음은 분명히 신과 관련된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바로 이러한 믿음의 속성을 둘러싸고 영화 <사바하>는 진행되고 있다.

"단지 그들은 신을 믿었을 뿐이기에 그렇게 행동했다" 회의주의자들은 영화의 서사를 그렇게 설명한다. 이렇게 모든 이야기들은 매끄럽게 설명 가능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신에 대한 회의주의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어쨌든 그러한 믿음에 대해서 회의주의자들은 '거짓된 믿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겠지만, 실제로 영화에서 신의 이름을 통해 살인을 저지르는 이들은 그것이 거짓이라고 믿지 않아야만 행동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영화의 서사를 신을 가정하지 않고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영화는 신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신이 된 사나이라고 불렸던 '김재석'은 자신의 자식들을 자신의 영생을 위해서 명령을 내린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것으로 예정된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한다. 이러한 김재석에 대한 믿음, 그가 정말로 신이라는 믿음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들에 대한 무차별적이 살인은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김재석의 환생격으로 여겨지는 제자(유지태)가 최후에 불타죽는 장면이다. 다 늙어 죽어가고 있는 김재석은 자신의 제자와 육체를 교환한다. 그래서 그의 제자의 육체는 김재석의 영혼을 담지한 부활로써 이해된다. 그러나 김재석의 아들이자 충실한 행동대장이었던 김나한은 김재석이 저지른 일들이 신의 명령도, 선한 일도 아니라는 것을 종국에 깨닫고, 김재석의 영혼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의 제자를 불태워 죽인다.


중요한 것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김재석의 제자를 죽여야 할 동기가 없었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단지 종교에 미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제자는 김재석의 영혼을 받아들였다고 믿고 있을 뿐이고, 김재석 역시도 자신의 영혼을 젊은 제자에게 넘겨줬다고 맹신하고 있을 뿐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는 살인을 명령한 적이 없다. 그는 단지 자신이 김재석이라고 믿고 있는 미친 사람이고, 사실상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한 늙은 김재석은 이미 죽어서 사라져 버렸을 뿐이다. 그러나 그 제자가 김재석의 영혼을 담지하고 믿었던 김나한은 그를 김재석으로 간주하고 죽였으며, 불타 죽은 김재석의 제자 역시도 스스로를 김재석이라고 믿으며 죽였다. 그러한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혼의 전달'과 '영생의 삶'을 믿고, 또 김재석이 이미 신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에 의해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영화의 서사는 교묘하게 김재석의 제자가 이미 김재석의 영혼을 담지하고 있다고 믿도록 꾸며지고, 우리는 불타죽는 김재석의 제자의 몸부림을 보며 얼마간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우리의 증오의 화살은 자연스럽게 가능할리 없는 영혼의 양도를 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극장 문을 나설 때 우리는 다시 꿈에서 깨어나, 불타 죽은 것은 김재석이 아니라, 스스로를 김재석이라고 믿음 미친 제자라고 고쳐 생각할지도 모른다. 여전히 회의주의자들의 믿음은 영화적 서사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때마다 김재석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의 역사를 보면서 신을 요청한다. 박 목사는 생각한다. '도대체 이러한 학살이 신이라고 불릴만한 자가 저지를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인가?' 이러한 한탄은 신이라는 실체가 도대체 존재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어도, 아주 사악한 일들이 무엇인 줄 알고 있고, 여전히 우리가 그토록 믿고자 하는 선한 이상이라는 것들은 어떻게든 존재하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종교를 둘러싼 소동 속에서 우리가 찾게 되는 바로 그 무엇에 대한 요구가 있다는 것도 암시한다.

신, 당신이 계신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처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가정하는 신 모두를 회의주의자의 시선을 따라 모두 소거해 버린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나의 실존적 삶 앞에서 펼쳐지는 끔찍한 일들은, 바로 그에 대비되는 어떤 선한 이상을 요청하게 만든다. 만약 이러한 요청도 기꺼이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단지 인식적 믿음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절대로 절망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홀로 서는 사람이 가능하다면 어떨까. 진정으로 선한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한 명의 사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도대체 그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어쩌면 여전히 어떤 신성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거나, 가치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어떤 존재로 드러나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우리가 소거할 수 없는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논의가 참인지 거짓인지가 아니라, 신에 대한 가정과 요청, 소거와 기각이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흐름을 드러낸다. 믿고, 그 믿음으로 일들이 벌어진다. 부정하고, 마침내 벌어진 일들에 회의 감을 느낀다. 그 깊은 회의감과 고독 속에서 다시 요청하고자 하는 무엇이 있다. 그리고 그 무엇이 부정되고 기각된 다음에도 우리 존재의 향방은 결정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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