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서술해 나가기에 앞서서. 하나의 원칙에 관한 서술.
글은 내가 아니다. 글은 이를테면 생각을 담는 그릇이므로 마치 한 사람의 중요한 무엇을 담고 있다는 착각에 우리로 하여금 빠지도록 한다. 그러나 글은 내가 아니다. 글은 이를테면 내가 굽는 하나의 도자기이다. 만약에 글이 나의 무언가를 반영한다면 그것은 도자기가 도예가의 무엇을 반영하는 것만큼 반영하고 있을 뿐이며, 또한 그 도자기와 도예가가 독립적인 개체인 것만큼 독립적이다.
물론 글에는 나의 지문이 묻어 있고, 내가 만든 굴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 마음으로 매만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굴곡져 있다. 그러나 내가 만든 그 굴곡조차 나의 아주 일부분이 반영되어 있을 뿐이다. 뜨뜻 미지근한 강도로 쥐어서도 안 되고, 또한 최대의 힘을 사용하여 서툰 젓가락질이 두부를 부숴버리듯 파괴해서도 안 된다. 마음이 얼마나 강력하건, 나는 내 힘을 조절해야 한다. 도자기를 구워내는 것이 그렇듯, 글이라는 것은 내 최소의 반영도, 최대의 반영도 아닌 무엇이지만, 내 지문이 묻어 있듯이 나의 반영일 수밖에는 없다. 그러니 내 손길이 스친 모든 것이 내가 아니듯 오히려 그녀는 종종 나 아닌 완전한 타자였고, 글은 한 번도 나였던 적이 없었다.
이 역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이해하고 난 뒤에는 나와 글에 얽혀 있는 오랜 논쟁을 중단하고, 나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노력과 애처롭게 이해받으려는 마음에 선을 긋는다. 그런 뒤에 그 글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는 데 주목해 보는 것이다.
나의 목적은 단지 이해하는 데에 있고, 그것은 한편으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나는 결국 타인에 대해 서술하는 것에조차 나의 굴곡을 남겨 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칭찬과 칭송처럼 으쓱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아프고 괴로운 것으로 흉중에 박힐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있는 그대로여서가 아니라, 다름 아닌 나의 반영으로 그리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받아들일만한 그런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쓸 수 없을 때에는, 그것이 나의 목소리가 아닐 때이다. 나의 손은 바로 그곳에서 멈춘다. 내가 나의 역량 이상을 서술하고자 할 때에는 그것은 나도 무엇도 또한 타인이 받아들일만한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연스러워야 하고, 그것은 완전히 나 아닌 것에 대한 온전한 내 목소리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 목소리는 멈춰야 하고, 그러지 못할 때 그 글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 물론 그 거짓은 외부의 무엇과 비교함이 아니라, 나 자신과 비교함으로써 드러나는 거짓이다. 너는 그것을 더는 서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네가 몰라서가 아니라, 네 역량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그러면서도 그 글은 끈질기게 나와의 연관을 유지한다. 그것이 내 역량을 벗어난 허튼소리일 때조차, 그것은 스스로를 허튼소리임을 알리며 나 자신을 은밀하게 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해야 할 것은 자연스럽게 서술할 수 있을 때까지 천천히 대상을 응시해 보는 것이다. 완전히 나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못하는 그 글은, 그러면서도 타인의 마음에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그러나 본래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대신해서 서술하고자 원한다.
나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떤 순수한 몸짓은 되려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분석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기 때문이다. 순수한 관능은 철저히 자신에 대해서 무관심할 때에만 그렇게 드러나고, 그것은 오로지 타인의 욕구에 의한 해석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관능의 눈빛은 그러한 욕망에조차 무관심하지만,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는 더욱 무관심하다. 또한 어떤 순진한 영혼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배운 것조차 없이 늘 앞을 향해만 나아가고, 그래서 또 넘어지고 다친다. 그로부터 야기되는 눈물이라는 것은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없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어떤 경험도 자신이 서 있는 그 곤혹스러운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기에 나오는 것일 뿐이다. 아이는 겁쟁이여서 우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어서 운다. 나이를 곧잘 먹어 놓고도 우는 사람들은, 그 눈물이 야비하게 무언가를 거저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늘 상황을 새롭게 보는 영혼의 인간이다. 그들은 눈물을 감추는 방법을 가까스로 배운 뒤에도 늘 불안하다. 그런 이들 역시도 과거를 통해서 자신을 해석하지 못하고, 이러저러한 일들을 그러저러 방식으로 해결하면 될 것이라는 낙관을 결코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순진하다. 그러한 마음은 그 자신의 서술에 의해서는 온전히 드러나지 못한다. 농담이나 허영으로 스스로를 순진하다 말하는 인간은 있어도, 그것을 진지하게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오히려 그들은 종종 자신들을 지나치게 닳아버린 인간들로 서술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서술하는 인간들의 순진성조차 타인들의 해석을 은밀하게 기다리고 있다.
타인의 이해는 그때에 요청된다. 내가 나를 서술하는 순간 모순에 봉착하고, 기꺼이 그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 서술을 중단하는 힘겨운 영혼은 자신의 일기를 스스로 쓰지 않은 채 유보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자기 서술 불가능한 현상 앞에서, 우리를 이끄는 모습들이 있다. 나는 스스로를 파편화하여, 전혀 나 아닌 그 글의 화자를 '나'로 칭하며 그런 이야기들을 서술하고자 원한다.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그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는 내가 되어 하나의 관찰자로서 천천히 서술한다. 그러며 모르는 것을 여전히 모르는 것으로 두고, 나의 무지에 대해서 서술해보는 수밖에는 없다. 그런 뒤에도 나의 방법론은 분명한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그 한계는 결코 확장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평생 넓어질 것이라는 보장 또한 없다. 중요한 것은 내 서술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목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나 아닌 그 글이라는 것에 내 굴곡을 담아서, 그러나 오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천천히 서술하는 것이다.
내 목적은 어쩌면 좋은 글이 아니라, 좋은 이해에 있다. 쓰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던 어쩌면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허구의 어떤 사람에 대해서 서술한다. 서술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드러난다. 글에 실력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타인의 일기를 대필하는 중에, 그 '몰이해'가 글의 중단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그 '몰이해'가 글을 완결 지은 뒤에도 왜곡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오로지 나인 한에서 너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네가 스스로 할 수 없는 말을 대신해서 해줄 수는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그 어떤 위로도 자기 위로가 대신할 수 있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한다. 필요한 자리에 일기를 대필한다.
바라건대,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나는 내 역할을 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