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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May 12. 2019

<논픽션> : 아이러니 속의 낙관적 전망


이 영화 <논픽션>은 어떤 점에서는 타란티노의 영화를 닮기도 했다. 이 영화는 끊임없는 대화와 수다를 통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 서사는 크게 복잡하지 않다. 첨예한 갈등도 없고, 특수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들은 토론하고 논쟁한다. 각자는 서로를 속이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은 논쟁을 벌이지만, 영화는 그에 대해서 특별한 대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논쟁이 오가는 과정에서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위선적이고 또 모순적인 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이 큰 악덕으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그 과정이 충분히 설득력 있고 흥미롭게 드러난다. 대화에 의존하여 이어지는 내용을 잘 따라갈 수 있다면 이 영화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르시시즘


이야기의 시작은 편집장 알랭과 새로운 원고를 가지고 온 레오나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레오나르는 요즘 사람들이 글을 가볍게 인터넷에 쓰는 시대에 대해서 좋게 보지 않는 모양이다. 이에 알랭은 그만큼 사람들이 글을 많이 쓰는 시대도 없고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닐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에 레오나르는 사람들이 그저 나르시시즘에 물들어 있을 뿐 그 이야기는 그 어떤 중요한 가치도 함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에 알랭은 그 누구도 나르시시즘에서 자유롭지 않으리라고 응수한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진실의 위협, 그것은 나르시시즘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떠들지만, 그것은 무언가를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스스로를 드높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 같다. 텍스트의 르네상스는 사실상 자의식의 르네상스, 과잉이다. 사람들은 읽지 않고 차라리 쓰는 쪽을 선택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소설가 레오나르의 불만은 사람들이 가볍게 쓰고 그 안에서 진지한 무엇도 찾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알랭은 지적하고 있다. 레오나르 너의 글은 어떠한가? 그것은 나르시시즘에서 자유로운가?



픽션


레오나르는 소설가 중에서도 자신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소설 속 주인공이 누구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지를 알아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경험을 서사화하여 드러내는 레오나르는 그만큼 모순적이다. 그는 사람들이 나르시시즘에 있다고 비난하면서 사실상 자신의 삶을 소설로 만든다. 그리고 그는 그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의 비난에 그는 다음처럼 응수한다 : "모든 소설은 자전적이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적극적으로 어떤 한 인간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결국 허구의 세계를 그려낼 뿐인 그 소설을 통해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가?



탈 진실


레오나르의 아내인 발레리는 한 정치가의 선거운동을 돕고 있다. 그러나 남편 레오나르와 그의 친구들은 그 정치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가 내세우는 것들이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회의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짜 뉴스 판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뉴스 기사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치인들이 제시하는 가치와 정책들은 그저 당선되기 위한 하나의 쇼맨십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그들은 모든 진실은 구성된 것이고 사람들은 결코 진정한 의미로의 진실이라는 것에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사실을 말해야만 하는 정치인과 언론은 믿지 않으면서 레오나르의 소설은 비난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뉴스 기사를 불신하면서, 오히려 소설이라는 장르를 내세우는 레오나르의 글에서는 어떤 특정인의 삶을 발견하고,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을 적극적인 현실의 반영이라 믿으며 레오나르를 부도덕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하다. 뉴스 기사는 현실의 왜곡이고,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뉴스 기사가 아무리 왜곡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소설을 통해서 사실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크고 작은 왜곡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어떻게든 이미 진실이라는 것을 소설에서조차 찾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만큼 반대로 '탈진실'이라는 테제에 대해서도 적극 수용한다. 모순이다. 이 모순은 아마도 평균적 일상성 안에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마간 처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서를 읽으며 역사가의 역할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역사를 단순히 이긴 자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서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 여자가 되어서 환웅과 결혼한다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태어난 아이가 단군왕검이 되어서 조선을 건국했다는 신화로부터는 어떤 사실을 추론하고 싶어 한다. 가령 곰 부족과 환웅 부족이 연합하여 조선을 세웠다는 식으로. 이렇게 신화를 해석하는 인간이, 더 이상 뉴스 기사는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자책


한편 편집장 알랭은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를 어떻게 변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새로운 시대에 사람들은 오디오 북과 전자책에 열광하고 있다. 전통적인 종이책을 보고 자란 알랭은 그런 변화가 과연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진다. 그러나 결국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출판사는 유지될 수 없다. 여기에 도전받는 것은 진리의 항상성이다. 시대는 변한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더불어 그 변화가 항상 달가운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차분히 책을 읽는 대신에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는다. 알랭은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 변화를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는다.


한편 이러한 알랭은 전자책의 시대로 넘어가는 데에 발맞추기 위해서, 이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로르라는 여성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전자책의 시대를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확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텍스트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려는 데에 있다. 어떤 점에서는 책을 종이로 만들어진 사물로 남겨두려고 하는 태도야 말로 더 물질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서 급격한 발전의 거부 또한 전통이라는 맥락 하에 형성된 물질들을 놓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문인이었고, 그녀는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어떤 변화는 여전히 중요한 것을 보존하고 또 더욱 확대하는 데에 기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떤 변화는 중요한 것들을 소리 소문 없이 갈취해서 사라지기도 한다. 사람들의 논쟁은 그 대답이 오리무중이고 확정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그만큼 확고히 믿고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알랭에게 전자책의 시대란,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것이며, 활자를 확대시켜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활자의 종말에 접어드는 과정이다. 전자 책보다 오디오북이 더 인기가 많고, 사람들은 이제 글이 아니라 유튜브를 본다. 그러나 로르에게 전자책의 확대, 활자의 민주화는 오히려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에 대한 형식적 논의와는 별개로 결국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고, 출판사 역시 그에 대해서 자유롭지 않다. 또한 논의는 기이한 방식으로 오염된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처럼 보이다, 결국 무엇이 가장 이익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전회한다. 



불륜


그러한 알랭과 로르는 불륜 관계이다. 알랭은 이미 부인과 아이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알랭이 외도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부인 또한 짐작하고 있다. 그녀는 그것을 용인하면서 자신도 불륜을 저지른다. 그 불륜의 상대는 다름 아닌 소설가 레오나르다. 그들은 마치 뱀꼬리처럼 물고 물리는 불륜 관계로 얽혀 있는 것이다. 불륜이라는 것조차도 진실의 위협이라는 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흥미를 잃은 부부관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인가, 아니면 다시 불타오르는 진정한 사랑의 발견인가.


알랭의 부인 셀레나는 배우다. 그녀는 몇 차례 연장된 시즌으로 이어지는 드라마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녀는 말한다. 더 이상 그 배역에 열정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그 연기를 더는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재미있는 것은 연기를 할 수 없는 이유가 그 연기에 대한 진정한 어떤 마음의 부재 때문이라고 서술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흥미를 잃은 사랑은 지속시키고, 그러면서도 불륜 관계는 이어진다. 진짜여야 할 사랑은 거짓으로 이어지고, 이미 거짓인 연기는 진정한 마음의 부재로 중단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이어지고 또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끊임없는 진실에 대한 논의, 가치에 대한 논쟁 안에서 속고 속이는 관계는 이미 이어지고 있고,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완전히 은폐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상대가 그러리라는 생각에 나의 죄책감을 덜며, 그러면서도 그 불륜 관계가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결국 진실 자체의 위력이 부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방황하지만 혼란스러워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혼돈은 진실과 진리의 부재이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할지언정, 이미 모순된 그 형태일지언정 진실과 진짜의 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도 실수하고 위반한다. 그러면서 찾아나간다.


로르는 알랭을 떠난다. 왜냐하면 알랭이 그의 가족을 버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직을 준비한다. 알랭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면서 담담하게 그 관계를 정리한다. 불륜의 행위는 과연 관계를 위협한다. 그러나 그것을 중단하는 이유는 여전히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랭은 돌아간다. 셀레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레오나르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그녀가 레오나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에 반영하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그녀에게 수치심과 양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만두는 관계이며, 그래서 숨기고 싶은 관계이다. 그리고 그 길로 레오나르 역시도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이 외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녀는 레오나르를 용서한다.


사람들은 실수하고 유혹받고 시험받는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고 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제야 실수하고 유혹받고 또 흔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흔들리는 그 순간 이미 시험에 응하고 있고 그들은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오답을 제시한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것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불륜과 거짓으로 점철된 관계를 그저 뉘우친다고 해서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다시 흥미를 잃은 부부관계를 되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한들 상대가 나를 받아들여준다는 보장은 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왜 발레리는 레오나르의 사과를 받아줘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셀레나도, 알랭도 시의 적절하게 다시 서로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그저 한낱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진실에 대한 믿음이 있다. 중요한 것에 대하 신념이 있다. 그리고 실수한다 하더라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한다. 상대에게 밝히지 않은 거짓이 있다면 고백하고 고해한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태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맞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우연과 아이러니와, 타이밍과, 내 의지와는 관련 없는 상대의 대답이 필요하다. 그것은 나의 손을 떠나 있는 일이다. 우리를 유지시키는 것은 그래서 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또한 우연과 운에 기대 있다. 이것이 진실이다.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이 흔들리다 제대로 맞물려 가듯이 끝나는 그 결말조차도 그저 한낱 운에 지나지 않는 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술 더 떠서 마지막에 발레리는 레오나르에게 하나의 소식을 전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좀처럼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그녀가 드디어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너무나 분명하게 훅 하고 다가오는 좋은 소식과 같은 것들. 아무리 구성된 진실과 은폐된 부정과 변화하는 시대와, 중요한 가치의 상실로 점철된 시대를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과대평가하는 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진실은 여전히 진실이고 그것은 기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미 우리 가까운 곳을 파고드는 너무니 직접적인 그런 사실들은 명징하게 있다. 그것에 의해 새로운 바람이 불고 사람들의 삶은 다시 활기를 얻는다. 


삶은 그런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서 끊임없이 비-허구의 부재에 대해서 논한 그런 영화는 사실상 하나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논-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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