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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Apr 25. 2019

<클로저> : 사랑의 비관적 전망

정복과 소유

댄은 엘리스라는 여자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녀가 댄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은 "안녕 낯선 사람" 이다. 미국에서부터 건너온 그녀는, 어떤 신비로운 매력을 가지고 있다. 엘리스는 스트리퍼로 일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녀의 산전 수전을 다 겪은 과거사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지도 모른다. 댄은 여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끌리는 마음을 감추지 않고, 둘은 사랑하게 된다.

댄의 사랑은 정복하고 소유하려는 사랑이다. 어떤 남자의 사랑은 종종 그런 모습을 띈다. 그러나 그 두 사랑의 축은 불온하다. 정복의 목적은 소유이지만, 소유하게 되면 정복의 요구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소유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다른 사냥감으로 눈을 돌린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지려고 하지만, 가진 뒤에는 낯선 것에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런 점에서 댄의 불륜은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댄은 글을 쓴다. 정확히는 기자다. 그가 기자라는 사실은 그가 상상력보다는 사실을 서술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원래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재능의 부족으로 기자가 되었고, 그의 무능으로 지방으로 밀려난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런 그가 엘리스의 독특한 삶에 끌렸던 것은, 그녀의 이야기를 소유하려는 그러한 욕구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출판까지 하게 된다.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지조차 못하는 빈약한 상상력은, 대상을 서술하고 손에 넣으려 함으로써 충족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녀를 가지고 싶다. 그리하여 그녀의 이야기를 책에 담고, 그 책을 가짐으로써 그녀를 가졌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엘리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완성되는 순간, 그는 그녀를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완전히 소유했다고 믿고, 그 애정은 이내 사라진다. 그런 후에 그가 눈을 돌리는 것은, 출간을 위해 자신의 사진을 찍어주기로 한 사진작가 안나이다. 그는 그녀와 불륜을 저지른다. 

섹스와 사랑

그러나 댄과 안나의 사랑도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결혼까지 해버린 안나는 남편 래리에게 댄과 사랑하고 있으니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 달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래리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관계를 가져 달라고 말한다. 그러면 깨끗하게 도장을 찍어주겠다는 거다. 안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부탁을 수긍하고, 이를 댄은 알아챈다. 그리고 그에 분개한다.

소유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영혼은, 마음을 묻지 않고 섹스를 묻는다. 그리고 남편과 마지막 잠자리를 했다는 안나의 말은 자신의 사랑이 타인에게 빼앗겼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안나로부터 버려진 신세가 된 래리 역시도 불쌍한 사람 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로직은 동일하다. 그는 댄에게 안나를 빼앗기기 싫어서 영역 표시라도 해두려는 양 마지막 잠자리를 요구했던 것이고,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안나는 그 로직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로직은 보기 좋게 댄에게 작동한 것이다.

욕망과 절제

래리가 댄 보다 더 나은 점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는 새로운 정복을 갈구하는 대신에, 꾸준한 소유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결국 안나는 래리에게 돌아가고, 그 둘은 결혼생활을 이어가며, 함께 침대 위에서 평화롭게 잠이 든다. 끊임없이 마음이 옮겨 다니는 댄의 태도를 보면서 사랑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전망보다 래리와 안나의 결말이 잔잔하지만 더 암울한 이유는 바로 그것에 있다.

남자는 낯선 사람을 정복하고 소유한 뒤에,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 나서려 하고, 여자는 자신에게 질린 남자로부터 떠나서 다시 자신을 특별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그것을 막는 방법은 영원한 어떤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욕구로부터 상호 절제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는 바로 그 제목대로 "눈을 질끈 감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끊임없는 유혹과 욕망들 사이에서 그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평온한 일상을 쟁취하는 것.

영화의 초반부에 댄은 담배를 끊었다고 엘리스에가 이야기 해 주지만, 그는 결국 담배를 다시 피운다. 반면 래리는 담배를 피울까 말까 끊임없이 고민하다가 결국 관둔다. 둘의 드러나는 행위는 다르지만 내면에서 작동하는 기제는 유사하다. 이러한 관점은 순수한 사랑이 있고, 또 흔들리지 않는 무결한 마음으로 하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에 대한 하나의 반론이다.

사실과 진심

어떤 점에서 무결한 한 사람이 있다면, 담배를 피우다가 결국에는 단번에 끊어버린 엘리스일 것이다. 댄은 결국 비굴하게도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엘리스에게로 돌아간다. 하지만 거기서도 댄은 엘리스에게 댄과 잤는지를 집착적으로 물어본다. 이것 또한 래리의 끈질긴 복수의 결과물이다. 안나에게 버림받고 댄은 엘리스가 일하는 스트립 클럽으로 그녀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던 것이다. 안나와 잤다는 것이 댄에게 치명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래리는, 엘리스와도 관계를 가졌음을 폭로했던 것이다.

그녀의 모든 과거를 팔아서 책으로 만들고, 그녀의 모든 이야기를 자신이 소유함으로써 그 사랑을 가졌다고 믿는 댄은, 역시 그녀의 마음이 아니라 그녀가 관계를 가졌는지의 여부에 집착한다. 그러면서 그가 보지 못한 것은 여전히 사실로는 드러나지 않는 꾸준한 엘리스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사실이 알려진다 하여도, 그녀의 진심이 그를 통해서 드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사로운 관계, 스트립 클럽에서 그녀를 더듬는 남자들이 시선 따위는 엘리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댄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진심이 아니라 사실만을 파헤치려 했던 소유로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렇게 종말 한다. 

엘리스는 그 순간 더 이상 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마음의 논리를 댄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늘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사랑이 무엇인지 서술할 수가 없다. 그는 작가가 아니라 기자이고, 기자 중에서도 오로지 남의 이야기와 사실을 받아쓰는 것이 아니면 그 무엇도 독창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어디 있냐고 표현해보라는 엘리스의 요구에 댄은 제대로 된 대답 하나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소유와 정복으로 사랑한 자의 종말이고, 진심으로서의 사랑 아닌 사실로서의 섹스에 집착한 남자의 종말이다. 

가명과 실명

그 사실과 진심은 엘리스의 이름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묘사된다. 스트립 클럽에 찾아갔었던 날 래리는 엘리스에게 돈을 쥐여주며 이름을 묻는다. 이에 엘리스는 대답한다 : "제인 존스" 라고. 그러나 래리는 그건 네 이름이 아니라 가명일 뿐이라며 다시 이름을 묻는다. 이에 대해서 엘리스는 여전히 "제인 존스"라고 대답한다. 래리는 이에 그녀가 자신에게 진실된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고, 자신을 그저 스트립 클럽에 찾아온 고객으로만 대우한다고 분노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서 엘리스의 이름은 그녀가 댄을 처음 만났던 날 길에 쓰여 있던 이름을 보고 즉흥적으로 지어냈던 것임이 밝혀진다. 그녀의 여권에는 "제인 존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결국 사실에 집착했던 댄은 그녀의 진짜 이름을 한 번도 알지 못하고 그녀와 사랑했던 것이다. 한편 스트립 클럽에서 그저 고객에 불과했던 래리는 결코 엘리스의 마음을 가져본 적조차 없지만, 그녀의 실명을 몇 번이고 들었던 것이다. 

사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런 진심이라는 것. 섹스와 무관한 그런 사랑이라는 것. 엘리스는 댄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건 관계를 가지건 그를 사랑했다. 엘리스는 그 가명으로도 사랑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내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다.

익숙함과 낯설음

결국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그녀는, 한 번도 소유될 수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댄이 그렇게 믿었던 것뿐이다. 그러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익숙해서 언제든 꺼내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녀는 다시 낯선 사람이 된다. 그리고 낯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후회하는 남자의 마음이라는 것은, 자신을 반성조차 하지 못하는 하나의 치졸함이다. 낯선 여자가 되었을 때에 다시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그 마음이라는 것은, 여전히 소유와 정복의 로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엘리스가 담배를 끊지 않는 것은,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고 정복하고자 하는 남자들에게로 쉬이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반면에 그녀가 담배를 끊어버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이 돌아섰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꺼이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어 남자를 떠나버리는 그 태도이다. 남자는 후회하겠지만, 그녀는 복수를 위해서 떠나는 것조차 아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원망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더 이상 후회하는지 아닌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다. 

이름조차 버리고 그녀는 왜 미국으로부터 런던까지 건너온 것일까? 댄은 이것을 물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와서,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진심을 다해서 사랑했을 뿐이다. 그리고 또다시 그녀는 자유롭다. 

운이 좋다면 우리가 서술한 모든 이분법에서 자유로운, 그런 사람을 만나서 다시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p.s

그래서 우리는 이 비관적인 사랑의 전망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로 사람들은 익숙함에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참고 사랑하는 척 하며 살아가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도전들은 분명히 위에서 제기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에 투사하는 사람들은 지독한 회의주의자 이거나, 자신의 아픈 기억들을 투사해서 일반화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사실 바로 그 점에서 매력적이다.

물론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비관적 전망이 보편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잘못했거나, 좋지 않은 상대를 잘못 만나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그저 운명이 그들을 그리 만들었던 것일 뿐이다. 

어떤 점에서 잘 사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잘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슬픈 사랑의 종말을 그저 나만의 종말로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나만이 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사랑도 떠오를 것이다. 어쩌면 엘리스가 했던 사랑이 그러한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왔던 사람. 그리고 앞만 보고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또 다시 자기 자신이 되어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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