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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May 18. 2019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 미친 사람을 사랑할 때

*이 글은 브런피 무비패스를 통해 개봉 전 시사회 관람 후에 작성된 것입니다.


토비는 잘 나가는 CF 감독이다. 그러던 그는 기분 전환을 위해서 자신이 학생 때 영화를 찍었던 스페인의 작은 마을로 찾아간다. 그는 그리운 마음에 그곳을 다시 찾았지만 마을은 음산한 분위기로 뒤덮여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 마을에서 찍었던 영화에 의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찍었던 영화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그 영화에서 돈키호테 역할을 했던 것은 그 마을의 구둣장이였던 하비에르였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 다시 찾으니, 하비에르는 자신이 돈키호테라고 굳게 믿으며 그와 같은 광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토비를 그의 조수인 산초 판사라고 굳게 믿으며 그를 자신의 여행에 강제로 합류시킨다. 여러 우여곡절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토비는 스스로를 돈키호테라고 굳게 믿는 하비에르를 따라간다.


토비에게는 우선 죄책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찍은 영화 때문에, 그 마을의 아름답고 순수했던 소녀 안젤리카는 배우가 되겠다고 떠난 뒤에 망가진다. 그리고 그저 평범한 구둣방 할아버지였던 하비에르는 스스로를 돈키호테라고 믿는다. 하비에르는 소설 속 돈키호테가 그랬듯이, 거인의 환영으로 드러나는 풍차로 달려가 곤두박질친다. 그를 딱하게 여기면서도 말도 안 되는 환상으로부터 도망쳐야 된다는 생각들이 충돌한다. 그런 와중에 뒤죽박죽의 여행이 시작된다.



미친 사람을 대우하는 두 상이한 자세


그 여행의 과정에서 하비에르는 안젤리카를 만난다. 안젤리카는 러시아의 대부호 알렉세이의 여인이 되어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대부호 알렉세이의 취미는 너무나 독특해서, 하나의 궁전을 빌려 돈키호테가 살고 있던 시대처럼 모든 것들을 중세 풍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돈키호테라고 믿는 하비에르를 위해서 여러 가지 신비로운 장치들을 꾸며 놓는다. 그곳에서 안젤리카는 저주받아 수염이 난 공주로 나오고, 그 공주의 저주를 풀어달라며 그녀는 하비에르에게 호소한다. 자신이 한 명의 충직한 기사이며 사랑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믿는 하비에르는 그녀의 저주를 풀기 위해 말을 타고 달나라까지 날아가야 한다. 알렉세이는 그를 위해서 가짜 목마를 만들고 하비에르의 눈을 가린 뒤에 그를 그 위에 앉혀서 정말로 달나라로 가고 있는 것처럼 꾸민다. 하비에르는 그 모든 연극에 맞춰 스스로 주인공이 되고, 사람들은 그 광경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본다.


이를 보면서 토비는 분노를 느낀다. 그가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하비에르가 비웃음 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알렉세이야 말로 하비에르가 가장 원하던 것을 주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알렉세이는 넘쳐나는 돈을 사용해서, 그토록 돈키호테가 좋아할법한 모든 것들을 만들어 하비에르를 위해 충실한 연극을 꾸며주었다. 돈키호테의 최고 목적은 히로인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었고, 그 무대는 하비에르를 아끼는 마을 사람들이 제공한 것도, 점차 하비에르에게 동조하게 되는 토비가 제공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쇼를 구상한 것은 하이에르를 비웃고 유흥거리로 소비하고자 하는 알렉세이였던 것이다.


미친 사람들을 대우하는 두 가지 상이한 태도가 있다. 그를 조롱하고 비웃고 이용하려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미치광이의 말에 동조한다. 그리고 그를 관찰하며 즐거워하고, 그 행위를 통해서 이익을 얻는다. 그리고 그 사람을 걱정하고 우려하는 이들은 오히려 그 미친 사람들을 자신의 세계로 되돌려 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마음 쓰는 그 사람이 타인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더는 견디지 못한다.


우리가 미친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리는 다음을 물어야 한다 : "가만히 놔두면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는 돈키호테는 어떻게 여행을 떠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 여행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하인 산초 판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미치광이 곁에는 그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미치광이에게 장단을 맞추며 결국에는 비웃는 사람도 아니고, 그 미치광이에게 현실을 직시하라며 강제로 되돌려 오려는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미치지 않았음에도 그 사람을 비웃지 않고 그 사람의 세계에 장단을 맞춰 주는 그런 사람이다.


미친 사람의 그 세계는 너무나 뚜렷하고 거대해서, 그 세계를 부술 수 없다. 아마도 그 세계가 부서질 때에는 그가 죽은 목숨일 때일 뿐일 것이다. 그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를 비웃는 사람과 그를 질책하는 사람의 사잇길을 걷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견뎌내면서도, 그의 행동을 부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함께 걷는다. 그리고 그 미치광이를 죽도록 하지 않는다.


미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후원자가 되는 것과도 유사하다. 그 사람이 가는 길을 닦아주고, 지원해준다. 그러나 함께 미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무턱대고 가는 그 길을 함께 미쳐 걷게 된다면, 곤란에 빠졌을 때 그들을 도와줄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인 산초 판사는 돈키호테가 마차를 향해 달려가다 부상을 입었을 때에 그를 부축해야 하고, 돈키호테가 불나방처럼 들불에 뛰어들 때에는 그를 만류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부정하지도 않고, 또 그의 환상을 없는 것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제정신을 가지고서 그를 맞춰주고, 그러나 최후까지도 그를 비웃지 않느다.


미친 사람이 죽는 순간


그런 점에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누구인가. 어쩌면 그는 돈키호테가 만든 환상의 세계 곁에서 그저 장단을 맞춰주며 연기를 하다, 마침내 그 돈키호테와 함께 미쳐버리는 자가 될 것이다. 토비는 처음에는 하비에르의 세계를 부정하다, 점차 하비에르를 따라 미쳐간다. 그리고 마침내 하비에르와 함께 미쳐버렸을 때, 미친 사람을 일으켜 세울 제정신의 하인도 함께 사라진다. 미친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은 어떤 점에서는 그를 완전히 믿어버리는 그런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하비에르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그는 죽어가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자기가 돈키호테가 아니라 하비에르라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점에서 인간은 보호받을 수 있을 때에만 미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만의 몽상의 세계에 빠져 살게 된다면 언젠가 큰 코 다치기 때문이다. 풍차를 거인으로 보는 순간 우리는 부상을 입게 되고, 절벽 앞에서 내가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추락한다. 그리고 부상을 입고 추락하는 것을 스스로 막을 수 없을 때 우리는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그 미친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는 사람들이 그들을 부상과 죽음으로부터 지켜내고, 미치광이들은 그렇게 자신의 광기를 유지한다.


어린아이들이 순수한 이유, 그것은 그들이 부모의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공상과 몽상의 세계 속에서 연극을 하고 놀이를 한다. 그들은 영웅이 되기도 하고 신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의자에서 뛰어내리고, 넘어지기도 한다. 그들이 울 때 달려오는 것은 그들의 보호자이고, 그 보호자들은 아이를 꿈에서 당장 깨게 만드는 대신에 그들을 보살펴 여전히 그 꿈 안에서 가능성을 키워준다. 그러나 그러한 보호자가 없어지는 순간, 아이들은 꿈에서 깨어나고 현실주의자가 된다. 왜냐하면 현실주의자가 아니라면 더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미친 사람은 어른이 된 뒤에도 현실주의자로 살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고, 그들은 기꺼이 풍차로 뛰어든다. 그러나 그것을 막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미치광이의 현실을 부정하지도, 또 그 미치광이가 풍차로 뛰어들어 죽게 하지도 않는다. 그저 곁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사랑과도 비슷한 것이고, 후원자의 후원과도 비슷한 것이다. 부모는 아이의 상상력을 짓밟지 않지만, 아이의 상상력을 따라 함께 흠뻑 젖지도 않는다. 너무나 사랑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함께 믿고 그 사람이 보는 대로 세상을 보는 순간 광기는 그들을 하나로 묶고, 그 누구도 서로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함께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어떤 점에서는 바로 그 순간이 광인의 눈을 스스로 뜨게 하는 순간이며, 죽음의 순간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메서드 연기


토비는 하비에르의 죽음을 목격하고, 안젤리카와 함께 도망친다. 그런데 갑자기 토비는 자신이 돈키호테가 된 것처럼 헛소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세명의 거인들이 보인다. 토비는 그 거인들을 향해서 돌진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거인의 환영이 실재가 아니라 그저 풍차일 뿐이라는 것을. 토비는 하비에르의 광기에 전염되어 다시 또 한 명의 돈키호테가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역 시도 풍차에 매달려 끌려 올라간 뒤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죽어가는 토비 앞에서, 안젤리카는 자신이 산초 판사라고, 그 충직한 하인이 곁에 있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토비는 눈을 뜨고, 하인 행세를 하는 안젤리카와 함께 또다시 돈키호테의 모험을 이어가게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인간의 세계에 장단을 맞춰주며 함께 걷는다는 이야기다. 그 세계 속에서 우리가 타인의 세계를 부정도 해보고 어르고 달래며 돌아오라고도 말해보는 이유는, 한 사람은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살 수 없기 때문이며, 또 그 세계는 종종 위태로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세계를 존중하지 못하면 그와 함께할 수 없고, 또 그 세계에 너무 몰입하여 내 현실을 잊게 되면 그 둘은 견우와 직녀처럼 함께 자멸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과 함께 하기 위해 메서드 연기를 시작한다. 하나씩 그들의 세계를 배우고, 그들의 언어를 익힌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연기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 세계를 비웃는 사람들로부터 지켜내고, 그들이 이상한 곳으로 추락할까 걱정한다. 그 보호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그 연기가 심지어 메서드 연기라 할 지라도 나는 여전히 나로서 역할을 다 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만의 상이한 세계 안에서 각자만의 방식으로 미쳐 있다면, 사람들은 그 세계를 지켜내고 또 함께 하기 위해서 메서드 연기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모든 미치광이들 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이들 곁에는 부모가 있었고, 마르크스 곁에는 엥겔스가 있었으며, 돈키호테 곁에는 산초 판사가 있었다. 그들은 믿어주고 보호한다. 그러나 함께 미치지 않는다. 지키기 위해서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미쳐야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미친 사람과 같은 의미로 미쳐서는 안 된다. 매서드 연기다. 그를 죽을 때까지 이어가는 것조차 어떤 점에서는 미친 것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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