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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Jun 05. 2019

<기생충> : 그래서 우리는 영악한가 비굴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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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은 단지 하나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비관적 전망이 어떠한 그림으로 그려질 수 있고 또 드러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알려준다. 그때의 가난한 사람의 삶은 하나의 기생충이 된다. 부유한 자의 등에 빌붙어 살면서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다. 그리고 마침내 숙주의 몸을 온통 잠식하더니, 마침내 숙주를 죽인다. 그리고 숙주가 죽으면 함께 몰락한다. 혹은 다른 숙주를 찾아 나서야 한다.


<설국열차>에서는 조금 더 희망이 있었다. 열차 안에서 모두 결정되어 있고, 하나의 세계의 균형을 위해서는 가난한 자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제 앞에서 "열차 밖에 눈이 녹고 있다"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제3의 길이 있으리라는 점을 영화는 시사했다. 어떤 점에서 <설국열차>는 구조 전체를 조망한다는 차원에서는 더 답답하지만, 그 구조 밖에 다른 길이 있다는 점을 보인다는 점에서는 더 희망적이다. 


그러나 <기생충>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기우와 그 가족들이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충분히 생각한다. 기우는 엄청난 부자인 박 사장 댁의 과외 일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피자집에서 일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학력 위조를 하지 않았어도 될 것이다. 기우는 자신의 누이를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공부를 한 유학파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거짓말의 크기를 조금 작게 만들어서 소소한 돈벌이 정도에 만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나중에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 집의 운전기사로 소개하더니, 원래 일하던 가정부도 모략을 써서 쫓아내고 그의 엄마를 그 자리에 앉힌다. 그렇게 거짓을 통해 부잣집 댁에 빌붙은 그 가족들은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에 만족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집주인과 그 가족들이 캠핑장에 간 사이, 그 집에 함께 모여 술판을 벌인다. 그리고 영화의 주요한 갈등은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만큼, 그들이 달리 살 수도 있었을 것을 암시하지만, 그만큼 그들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아주 설득력 있게 돌진한다.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불편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 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선택에 설득당한다. 와이파이 하나를 쓰기도 힘든 판에, 순식간에 들어오는 돈다발을 보면 우리도 그것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거짓말을 하기는 했지만, 우선 자신의 맡음 바는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생은 사실 '공생'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나씩 그들의 행동을 관객도 함께 정당화를 하고, 그렇게 점차 기생충은 숙주의 몸을 잠식한다. 어느새 그것이 자신의 것인 줄 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불편한 영화는 설득력 있게 우리가 도달하고 싶지 않은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영화이다. 우리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고, 또 그것에 설득되어 버려 함께 그곳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 불편함을 보기 힘들어서, 차라리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구조의 문제를 다룬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다. 서사가 주는 구체적 설득력은, 이미 한 개인의 이야기일 뿐, 그것을 섣불리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설득당한 그 서사들 사이에서,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를 복기하고, 내가 쥘 수 있는 논리를 쥘 수밖에는 없다. 우리가 만약 스스로 생각하기를 원한다면,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사이에 생각할 수 있는 인간론을 하나씩 검토해보고 무엇을 취택할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부유한 사람은 악의적이다."


자본은 인간을 악으로 물들이고, 자본은 인간을 비열하게 속이고, 그래서 영악한 그들의 손아귀에 약한 사람들은 놀아난다. 사람들은 이명박이 검찰에 출두하고, 이재용이 청문회에서 참석한다. 그때 우리는 부유한 사람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부패했으며 모두 썩어빠졌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미 흔한 계급적인 담론이고, 도 얼마간 사실일 수도 있다. 유아인이 <베테랑>에서 "어이가 없네"라고 말하며 운송노동자를 흠씬 두들겨 팰 때, 우리는 <1>의 논의를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


2. "부유한 사람들은 순진하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기생충 어디에서도 <1>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부유한 자들은 순진하고, 착하고, 속이 넓고, 잘 베푼다. 기우와 그 가족들은 부잣집 사모님이 참 잘 속는다고 말하며 조소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특별히 더 잘 속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 없이 자랐기에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기우의 어머니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내가 돈이 많았으면 더 착했겠지." 그리고 우리가 그녀의 말에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 우리는 그만큼 이 영화에서 다루지 않는, 그러나 우리가 뉴스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차는 <1>의 논의는 잊고 있다.


3. "가난한 사람들은 영악하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요새는 인기 없어서 잊힌 또 하나의 담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은 산전수전 다 겪어봐서 더 영악하고, 돈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한다는 생각이다. 그들이 순진한 사모님을 속이기 위해서 그저 순진성을 이용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학력을 위조하고, 사기를 계획하고, 가짜를 연기한다. 이것은 다분히 <기생충>적이다. 생물학적으로 기생충들이야말로 그 숙주에 대해서 숙주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더 적절히 기생할 수 있게 기생 천외 한 방식으로 그들의 몸에 여러 항원물들을 뚫고 들어간다. 이러한 논의가 잊힌 것은 아마도 <3>의 논의에 의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순진하고, 약하며, 늘 속으며 산다는 말이 유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4. "가난한 사람들은 비굴하다" 


기우네 가족들은 박 사장네 가족들이 캠핑을 간 사이 그 저택에서 술판을 벌인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캠핑이 취소되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그들은 바퀴벌레처럼 여기저기로 숨는다. 그들은 숨어서 박 사장과 그 부인이 소파 위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도 숨어서 듣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냄새가 난다는 것도 그저 듣고만 있다. 그리고 그들이 잠든 새 그들은 기생충이 숙주로부터 제거되는 것을 피하기라도 하듯 유유히 빠져나간다. 그러나 그만큼 기생충이 아무리 영악하다 한들, 그들은 숙주를 거스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숙주의 죽음은 기생충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이 부잣집 사람들을 순진하다고 비웃고 또 속아넘겼다고 통쾌하다고 한들, 자신의 속에서 끓어오르는 비굴함과, 그것에 분노하는 자존심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그 자존심이 서서의 절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은 착한가 나쁜가, 가난한 사람은 영악한가 비굴한가?


생각하지 않는 인간들은 결국 남들이 떠먹여주는 대로 생각하고, 또 남들이 해석해주는 대로 해석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명박을 보면서 부자들이 나쁜 새끼들이라고 욕하고, 또 션-정혜영 부부가 기부할 때에는 역시 부족함 없이 없어서 기부도 한다고 말한다(실제로 그들이 어떠한 배경에서 자라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찾아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부자들은 순진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시장 바닥에서 자란 사람들이 현실을 왕자와 공주처럼 자란 인간들보다 더 직시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논리만을 취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기생충>조차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선택권이 있다. 나는 착할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나는 비굴할 수도 있고, 영악할 수도 있다. 어쩌면 비굴해서 영악하거나 영악해서 비굴할 수도 있다. 부유해서 순진하거나 순진해서 가난할 수도 있다. 부유해서 악의적일 수도 있고, 악의적이어서 부유할 수도 있다. 가난해서 악의적이거나 악의적이어서 가난할 수도 있다. 


말로만 보면 모순적인 논의들이 너무나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기생충>은 그저 하나의 그림이다. "아 역시 내가 돈이 더 많았더라면 더 착하게 살고, 베풀며 살았을 것을." 이따위 생각이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의 결론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위로의 영화가 아니라 불편함을 안겨주는 그런 영화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계획대로 되지 않으려니 계획조차 세우지 말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기우의 아버지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결국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그 자격지심에 사람을 죽인다. 어디까지 존재하는 훌륭한 서사를 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생각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너도 사람을 죽일 것인가? 사기를 칠 것인가? 착하게 살 것인가? 돈만 있다면? 돈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1>이 되는가, 아니면 <2>가 되는가? 그렇다면 돈이 없는 너는 <3>인가? <4>인가? 


우리는 영악한가 비굴한가. 어떤 점에서는 '기생충'이라는 것 자체의 존재 방식이 바로 영악하고 비굴하다. 그러나 또 어느 한 세게에서 누군가는 가난한 사람들은 순진하고 선량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상이한 논리 사이에서, 결국 나의 행로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불편하다. 그 어려움은 논리적 어려움이 아니다. 이것은 의지적 어려움이다. 부유하지만 착한 사람 부유하지만 악한 사람은 이미 널려 있다. 가난해서 죽이는 사람과 가난해도 나누는 사람도 우리는 찾을 수 있다. 그런 상이한 세계 안에서, 그리고 한 개인 안에 존재하는 모순되고도 다양한 측면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인간을 고집하고 또 그런 사람이 되기를 계획하기가 두렵고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두렵고 어렵다는 이유로 내가 편할 때에만 꺼내보는 어떤 논리가 있다면, 우선 그 논리는 그저 틀렸다. 그것을 인식하고 난 뒤에 내 삶 앞에 놓인 진짜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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