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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Jun 07. 2019

<기생충> 2 : 냄새에 관한 실존적 독해


<기생충>에서 박사장이 말한다 : 


"아 있어, 지하철에 타면 나는 냄새"


박 사장은 기택의 냄새에 대해서 위와 같이 묘사한다.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지하철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순간, 대다수의 관객은 자신이 어디에 이입할지를 안다"(네이버 한 줄 평) 고 말한다. 그러면서 기택이 느끼는 굴욕감은 지하철을 이용하는 대다수의 승객을 하나로 묶는 메타포가 된다. 이어서 어떤 사람들은 "지하철을 안 타본 지 하도 오래돼서 잘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박 사장의 사모의 말에 계급적 시기심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지하철이라는 이동 수단으로 한데 묶이는가? 그리고 냄새라는 것은 위계를 가름 짓는 것이기는 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냄새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고 있는가?


영화에 이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아마도 계급적인 독해는 영화에서 가름되는 양분된 계급 사이에서 우리를 어느 쪽에 위치시켜야 하는 게임인지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냄새에 대해서는 더 많은 상상력이 요구되고, 우리는 평소에 스스로 맡아대는 그 냄새에 대해서 내가 도대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반응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에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접근 방식은 계급적인 독해를 넘어서는 주체적인 독해 방식이 될 것이다. 




사례 1) 


가뜩이나 가득 찬 지하철이 승강장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유독 내가 타려고 서 있는 칸은 한적해 보인다. 운이 좋다고 느끼며 승강장 안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갑자기 코를 찌르는듯한 냄새가 나를 엄습한다. 암모니아 냄새 같기도 하고, 무엇이 썩는 냄새 같기도 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은 노숙자가 구석에 앉아 있다. 사람들은 옆 칸으로 바퀴벌레 흩어지듯 도망간다. 


사례 2)


대학교 휴게실에 들어간다. 어디서 알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 아랍계 유학생이 노트북을 하고 있다. 그에게서 나는 특유의 향료 냄새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람들은 텅텅 빈자리에 앉으려다가 망설인다. 앉더라도 그의 주변은 기피한다.


사례 3)


한국에서는 유독 다른 나라보다 많은 마늘을 먹는다. 그리고 마늘을 먹으면 입에서뿐만 아니라, 땀에서도 특유의 냄새가 배어 나온다. 한국의 마늘 섭취량은 같은 동양권 국가 내에서도 두드러진다. 그래서 일본인들조차도 한국인의 체취에서 마늘 냄새를 맡는다. 하나의 예시로 이종범 선수가 일본에서 선수 활동을 할 때에 주변 선수들이 그에게서 마늘 냄새가 난다고 기피했던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차별인 줄 알았는데, 마늘을 끊고 나니 그런 지적이 없어졌다고 한다.





어떤 점에서는 마늘은 수평적인, 그러나 단순한 문화적 차이 때문에 유발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계급적 위계를 상징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지하철 내부에서조차 사람들은 저 스스로 위계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냄새'의 성질이다. 냄새라는 것이 감출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는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이질적인 냄새에 당연히 불쾌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를 보고 '냄새가 주는 불편함'이라는 것을 통해서 지하철 승객들이 대동단결하는 것은 단순한 사유법이다.


오히려 우리가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이질적인 그 냄새를 느끼는 나 자신이다. 우리가 정말로 기택의 굴욕감과 같은 것을 느끼고, 그와 동질감을 느끼고자 할 때에는, 실제로  나 자신이 정말로 어떠한 위치에서 어떠한 냄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에서 굳이 읽어낼 수 있는 계급적인 메타포를 그저 고상한 차원에서 누리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기생충>의 서사가 계급을 투박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 영화가 드러내는 냄새의 메타포를 통해서 손쉽게 분노하고, 자신을 하나의 계급 공동체에 하나로 묶이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투박하다. 그리고 그것을 투박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영화가 주는 불편함을 직면하지 못하고, 자신을 그 영화가 가름 짓는 선량하고 불상한 위치에 자신을 우선 이입함으로써 불편함을 외면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나 냄새는 어디에나 있고, 나와 다른 그 냄새에 불쾌는 언제나 시도 때도 없이 유발한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사람들은 한데 묶일 수 없고 또 앞으로도 묶이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서 기택의 가족들은 주인이 돌아오자 바퀴벌레처럼 숨지만, 지하철 안에서는 노숙자의 냄새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바퀴벌레처럼 숨는다. 지하철을 통한 대동단결은 상상력과 자기반성적 기억력의 부재로 일어난다.


그 냄새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가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냄새라는 것의 차이를 없앨 수 있기는 한 것인가? 없앨 수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없애야 하는가? 그리고 만약 그 냄새의 차이라는 것을 없앨 수 없다면 그것은 그저 관용의 대상이어야 할까? 그리고 그것이 정녕 관용의 대상이라면 그 관용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관용이라는 것은 내가 애초에 불쾌감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사회적인 객관적인 기준을 세우는 것은 어렵다. 이것에 대해서 쉽게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불편함이다. 


우선 내 스스로라도 대답해보아야 한다. 나는 도대체 냄새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대우해야 할까. 타인의 냄새에 내가 정말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간편하게 내 몸에 나는 냄새에 타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만을 생각할 때, 자기 부재의 텅 빈 사유가 완성된다. 그 텅 빈 사유는 손쉽게 영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촌스러운 위로를 얻는다. 그 영화가 주는 불편함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떠안아야 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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