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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Jun 14. 2019

<갤버스턴> : 우리는 어떤 희망을 발견하고자 하는가

영화 <갤버스턴>을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시사회로 관람했다.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관람을 추천하고 싶다. 영화의 내용은 이제는 조금 흔해진 소재인 것처럼 보인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 많은 아저씨와, 내밀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어린 여자 아이의 이야기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우리는 이 소재를 다루고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떠올릴 수 있다. <마틸다>가 그랬고, <아저씨>가 그랬고, 울버린 최후의 이야기인 <로건>이 그랬다. 아이는 보호를 받고, 어른은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고 조력하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는다. 그 결말은 해피앤딩일 수도 있고, 늙은이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뒷 세대에게 희망을 주며 씁쓸하게 끝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제는 케케묵은 소재로 미루어 <갤버스턴> 역시도 그 클리셰를 답습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나는 그런 흔해빠진 이야기이겠거니 하고 이 영화를 관람했다가 충격을 받았다. 생각보다 이 이야기는 더 어둡다. 소위 말하는 "꿈도 희망도 없는"이야기의 전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만큼 심지어 비현실적으로 묘사되기까지 한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그런 불행의 리얼리즘이고, 보편적이기를 거부하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실제 삶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단지 비관적인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파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픔과 안타까움은 도대체 우리의 어떤 심성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이것을 지적함으로써, 나는 실제 그 어떤 꿈도 희망도 없는 삶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정표로 삼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둘러 그러한 희망을 캐묻기 전에 먼저는 이 영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클리셰이기를 거부하고, 또 어떤 삶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음미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이하로는 스포일러가 있을 것이다. 이하의 내용을 읽기 전에 나는 먼저 관람을 권한다. 이 영화는 7월 4일에 개봉한다. 먼저 개봉하는 <존 윅 3>와 <스파이더맨 홈 커밍>이 우선순위로 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 영화는 관람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과 아이


이야기는 40대를 넘어가고 있는 남자 로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남자는 병원에서 폐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않고 병원을 박차고 나간다. 그는 차에 타서 담배 피우기를 망설이다 곧 다시 연초에 불을 붙인다. 관객은 의사의 진단과 담뱃불을 쉽게 연결시킬 수 있다. 폐암이다. 이야기는 그런 클리셰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떨지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조금 더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 <로건>을 떠올린다.  노쇠한 울버린은 예전 같지 않은 재생능력과 슈퍼파워를 가지고 있다. 그는 늙었고 이제는 죽어간다. 모든 뮤턴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자비에는 치매에 걸린 노인에 불과하다. 그가 발작을 일으킬 때에는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영화의 결말을 떠올리며 우리는 <갤버스턴>의 결말 역시도 쉽게 점쳐볼 수 있다. 울버린이 어린 뮤턴트를 만나 그들을 구원하고, 희생하며 죽음 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불우하게 자란 어린 세대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세대는 교체된다.


이러한 우리의 예상에 맞장구라도 치듯이, 로이는 한 여자아이를 만난다. 그가 그녀를 만난 것은 로이의 사장이 청소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 청소라는 것은 일종의 살인 청부다. 로이는 자신의 사장의 더러운 일을 처리해주는 일종의 행동대장이다.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는 한 밤 중에 그 집으로 잠입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그 집으로 몰래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습격받고 정신을 잃을 뻔한다. 그러나 그는 극적으로 죽음을 피하고, 그 집에 묶여있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록키다. 


록키는 일자리를 알아 봐 준다는 말에 속에 끌려온 불쌍한 열아홉의 소녀다. 로이는 그녀를 구출해서 함께 도망친다. 그러면서 이 함정이 결국 자기를 죽이려고 계획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와 함께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도망친다.


클리셰


그리고 우리가 자연스럽게 기대하는 것은, 어린 소녀에 불과한 록키가 구원되는 것이며, 그녀를 구원함으로써 함께 구원되는 산전수전 다 겪은 로이의 마음이다. 로이는 폐암으로 아마도 죽겠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 눈물바다를 기꺼이 감수하겠지만, 오로지 그것만이 이 영화의 결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드러나는 것은 록키의 아픈 과거다. 그녀는 새아버지에게 강간당해서 아이를 임신했고, 그 아이를 새아버지의 집에 두고 도망쳤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그녀는 또 죽을 위기에 처해서 감금되어 있었던 것이다. 록키는 로이와 함께 도주하며 그녀의 고향에 잠깐 방문한다. 거기서 그녀는 자신의 새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딸을 안고서 도망친다. 


그 이후의 전개 역시도 우리가 늘 알던 그런 과정이다. 록키는 끔찍한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점차 무뚝뚝하고 마음 쓸 줄 모르는 로이의 마음도 점차 움직인다. 그 과정까지는 분명히 무심한 로이와 어두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밝게 살고자 하는 록키의 실랑이가 있어야 헀을 것이다. 


록키는 로이에게 묻는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에 대해서 자신의 죽을 운명을 알고 있는 로이는, '너는 어리니까 살아도 몇 번을 다시 고쳐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아마도 이것이 늙은 사람이 아파하는 젊은이에게 제시해줄 수 있는 하나의 희망일 것이다. 그들은 이미 고쳐 살기에는 늦었고, 심지어 곧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어린아이의 고통이라는 것은 종종 평가절하 되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어떠한 과거가 있건 간에 여전히 고쳐 살 수 있을만한 많은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틀어지는 클리셰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조금 못 입고 못 먹고 산 정도의 과거를 견뎌낸 이의 삶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는 몸을 파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한 소녀의 삶이다. 그리고 그러한 끔찍한 삶은 자석처럼 끔찍한 것들을 끌어당긴다. 그녀가 로이를 만나서 구사일생한 것도 어쩌면 행운이지만, 그런 로이는 이미 더러운 일을 하다 함정에 빠져 암살당할 뻔한 현실에 놓인 사람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둘은 쫓기고 있고 또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점차 서로에게 의지하고, 또 서로를 구원하고자 하지만, 여전히 그렇게 유보된 삶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얼마나 어떻게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로이는 록키에게 돈을 지원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녀더러 학교에 다시 돌아가라고 조언해준다. 과거를 벗어나서 보통 사람처럼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트라우마는 쉽게 치유되지 않고, 또 수렁에 빠진 삶은 다른 더러운 것들을 끌어들인다. 그들을 여전히 추적해 죽이려고 하는 로이의 사장처럼. 


그리고 그 둘이 마침내 유대를 이루었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을 때, 그들을 추적하는 자들을 조우한다. 그리고 록키는 강간당하고 살해당한다.


잔인한 리얼리즘


록키의 시신을 보고 로이는 절규한다. 그리고 얻어맞아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이끌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로이는 도주하는 와중에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으로 호송된다. 그때 그는 차라리 자신의 죽음을 희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의사가 하는 말은 그의 폐 질환이 치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죽음을 대비하고 죽음을 각오했다. 그리고 그 죽을 각오로 희생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앞에 놓인 것은 말끔한 치료 가능성이고, 끔찍하게 펼쳐져 있는 지루한 삶이다.


잔인한 리얼리즘, 그것은 클리셰를 부숴버리면서도 여전히 설득력 있는 충격으로 다가올 때 이루어진다. 상이한 두 가지 삶이 있다. 곧 죽을 것 같은 늙은 남자와, 아픈 과거와 동시에 가능성을 가진 어린 아이다. 그러나 삶은 늙은 사람에게 희생할 권리도, 어린아이에게 가능성을 실현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삶이 어떠한 의도성을 가진 잔인함을 내재하고 있어서는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삶이라는 것이 무차별적으로 우리에게 덮쳐오기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을 다 가진 그 삶을 세상은 앗아가기도 하고, 또 여전히 너절한 방식으로 권태롭게 부여하기도 한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그런 점에서 리얼하다. 이 리얼함은 모든 삶이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리얼한 것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로이와 록키의 삶은 너무나 다르다. 로이는 권태롭게 살아남았고, 록키는 끔찍하게 죽었다. 삶의 내용도 다르고 삶의 길이도 다르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리얼하다. 그 충격의 내용은 보편적이지 않지만, 바로 그 구체적인 방식으로 드러난 삶이 리얼하다.


그러고 나서 로이는 자신이 한 살해 행위와 더러운 일들로 인해 감옥에 들어간다. 그리고 20년이 흐른다. 그는 이제 정말로 노쇠했고, 그러나 몸 건강하게 출소한다. 그런 뒤에 출소한 그 세상은 도대체 어떤 빛깔인가. 갤버스턴에 허리케인이 상륙한다. 음산한 날씨는 삶의 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프고 끔찍하게 끝난 어린 소녀의 삶과 더욱 대조되는 그의 삶은 아름다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끔찍하지만, 드라마틱하게 끔찍한 것도 아니고, 지루하고 권태롭게 끔찍하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방황하듯 남아있는 삶은, 예전에 사라져버린 들꽃 같던 한 아이의 가능성과 대조되어 우리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한다.



우리의 희망에 대하여


그렇게 로이의 출소 날이자 허리케인이 상륙하는 날, 그의 거처에 누군가 찾아온다. 그녀는 록키가 사망하고 로이가 도주하던 날에 두고 온 로이의 딸이다. 유일한 과거의 끈인 로이를 추적한 끝에 그녀는 마침내 그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녀는 이제 시간이 흘러 이십 대가 되었고,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제 전혀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묻는다. 그녀는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로이는 말한다. 이제 곧 허리케인이 올 것이다. 나는 네 과거에 대해서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너는 떠나라. 너는 버려지지 않았다. 너의 누이는 사실 네 누이가 아니라 네 어머니였다. 그녀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너를 구하기 위해서 뭐든지 다 했다. 그녀는 너를 사랑했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라도 한 줄기의 희망을 찾아내고 싶다. 그녀의 삶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녀가 새아버지를 살해하면서까지 구하고자 했던 그녀의 딸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건강하게 자라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삶은 조금은 의미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물음이 집착적으로 우리에게 밀려오는 까닭이 무엇인가. 결국 그 어린 날에 끔찍한 삶에 대한 기억만을 가지고 또 가장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던 그녀의 삶이 의미 있었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나의 이 집착적인 욕구의 근저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의미가 있었다고 한들, 그녀의 삶이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것일 수는 없는데 말이다.


그것은 로이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과 허무함과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삶에 이입해버려서는 이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을 다 해 주고 싶다. 사실은 우리가 바랐던 것은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너무 아픈 그 삶이 아프지 않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회를 삶은 당연하다는 듯이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보편적인 욕구의 의미도 알게 된다. 그것은 그 혹은 그녀가 행복하게 산다고 한들, 내 삶에 희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타인의 삶이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해서, 그것이 내 삶에 어떤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말인가? 나는 여전히 이 삶에 내던져져 있는데 말이다. 단지 우리는 누군가에게 마음 쓰게 되고 그 삶에 이입하게 되고, 그 삶이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실제로 저 삶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하기도 한다. 아마도 로이가 록키에게 그랬고, 로이가 자신의 딸에게 그리 했다. 그럼에도 삶은 노력의 대가를 계산한 뒤에 정산해 돌려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래서 슬픈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인물의 흥망성쇠를 통해서 보장되거나 기각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가 추구한다는 것이고, 도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줄 알고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서 누군가를 위하고, 또 그 삶이 실제로도 잘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는 음산한 결말과 치명적인 방식으로 쳐들어 오는 잔인한 리얼리즘에 상처 받는 것이다. 잔인한 삶은 그 어떤 의도도 가지지 않고서 덮쳐오는데, 우리는 어째서 그것을 '잔인함'이라고 명명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잔인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며, 그것은 그 안에 의미를 은닉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최후에 그 허리케인 안으로 걸어가는 로이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그는 이제야 자신의 삶을 버리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너무 일찍 끝났던 어린 여자 아이의 삶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은 너무나 쓸모없이 길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무쓸모의 삶이라는 생각은, 그가 무언가를 추구했고, 또 무언가를 사랑해버렸기 때문에야 드러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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