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샤 Apr 15. 2021

인간 병기와의 달리기 시합

알고 보면 놀이터의 파수꾼들

  작긴 하지만 어쨌든 신도시다. 약 4킬로미터가 안 되는, 깔끔하게 정비된 둘레길 산책이란! 조금은 숨 가쁘게 걷다가 몸이 가벼우면 뛰기도 하고 파란 하늘을 보기도 하고 천변의 오리 떼가 헤엄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이런 여유를 만끽하기 위해 나는 지난 6년을 가득 채워 아이와 내 안의 우울을 같이 키워 왔나 보다. 폐 깊숙이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아침햇살을 즐기는데, 누군가 나를 스쳐 뛰어 지나간다. 딱 봐도 우리나라 최고의 전사다. 어깨에서 팔로 이어지는 근육들, 단단한 등과 허벅지와 종아리, 무엇보다 내 폐를 가득 채운 산소만큼 가볍게 느껴지는 뜀박질. 

  갑자기 내 안의 이상한 오기가 솟아오른다. 그래, 이겨 보자. 이기는 게 안 되면 같이 뛰자. 우리나라 최고의 군인이 내 달리기의 페이스 메이커라니! 운동 중에 이러한 영광을 안다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최대한 같은 동작으로 달리려고 해본다. 흔드는 팔의 높이, 딱 벌린 어깨, 다리를 들어 올리는 각도. 어쩐지 나의 달리기가 좋은 선생님을 만나 올바른 자세를 취하게 된 것만 같다.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근육이 괜히 더 긴장하는 것을 느낀다. 특전사와 달리기 보폭을 맞추다니, 군인 가족 8년 만에 나도 이런 지경에 이르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시점부터 조금씩 그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100미터는 같이 달렸을까. 조금씩 멀어지던 그는 이내 빠른 속도로 작아지더니 나의 풍경에서 소실점으로 사라졌다. 

 

아아 님은 저 풍경 너머로 갔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특수전사령부 숙소, 그러니까 특전사 아파트이다. 특전사 사령부와 707 부대, 특전사 제3여단의 군인들이 가족을 이룬 곳이다. 800여 세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아빠 혹은 엄마 또는 아빠 엄마들은, 미군도 인정하는 전투력을 자랑하는 특전사 군인들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산책이나 조깅 중에 저런 경쾌한 리듬으로 달리기를 하는 군인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은 둘레길을 몇 바퀴씩 돌면서도 자세 하나 흐트러짐이 없고 오히려 속도는 빨라진다. 내가 애셋을 낳은 아줌마답게 천천히 한 바퀴 도는 동안 그들은 최소 세 바퀴를 돈다. 내가 집으로 향하는 동안 그들은 네 바퀴째에 들어선다. 탈지구급 체력이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유시진 대위가 하는 일들을, 나의 이웃들이 하고 있다. 물론 유시진 대위는 판타지이고, 유시진 대위와 동급의 외모를 가진 장교 및 부사관은 본 적이 없다.(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못 봤다) 나와 짜장면을 앞에 두고 애 키우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의 남편은, 707 부대 저격수이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스나이퍼인 것이다. 교회에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커피를 타 주시는 집사님의 남편은, 미국에서 15,000피트 강하 훈련을 1,000회 이상한 특전사령부 가족이다. 나의 인스타 군인가족 친구들 피드에는, 아빠들이 아이를 안고 스콰트를 100개 이상 하는 영상을 올린다. 그런 것을 보는 데 익숙하다. 남편만 볼 것도 없다. 나와 매일 아침 어린이집에서 인사를 나누는 엄마는, 3 여단 특전사 상사이다.   

  나의 남편은 어떠한가. 지금은 타부대에 있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거의 매달 강하 훈련을 하고 초코파이와 생명수당을 받아온 707 부대원이었다. 그 전에는 사령부에서 미군과의 연락을 주고받으며 근무했다. 내가 아이 키우며 체력 때문에 허덕일 때마다 남편은 운동을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너덜거리는 손목과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한 뼈들 때문에, 2시간마다 젖 달라고 울어대는 아이 때문에 운동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덕분에 날마다 비루한 몸뚱이와 더 비루한 체력을 갱신하긴 했다. 매일 특전사 체력 단련을 하는 남편이 보기에는 그저 답답하고 한심했을 테지만, 직업으로서 운동을 해야 하는 남편과 달리 엄마라는 직업으로 인해 운동을 하지 못하는 나 역시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군인가족의 남모를 애환 중 하나이다.



  언젠가 남편에게 물었다. 

  "특전사는 전쟁이 나면 어떤 역할을 해요?"

  "부대마다 다르긴 하지만, 게릴라전을 펼치기도 하고 일단은 적의 원수에 접근해 목을 따는 임무를 수행하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목소리와 표정이었지만, 그 내용만큼은 살벌했다. 내가 매일 피엑스와 아파트 단지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아빠들은, 적의 어디를 찌르면 즉사시킬 수 있는지 공부하고 그러기 위해 매일 훈련하고 단련하는 사람들이었다. 비슷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헬기에서 목숨 걸고 뛰어내리고 천리행군을 가고 적을 단번에 제압하기 위해 체력을 증진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면 조금 무서워지기도 한다. 말 그대로 인간 병기,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인간 병기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특전사 훈련과 707 특임대





  국가대표급 체력과 전투력을 자랑하는 그들이지만, 정작 내가 매일 보는 그들의 주된 역할은 '놀이터의 파수꾼들'이다. 일찍 끝나는 날은 여지없이 놀이터를 지킨다. 우람한 팔뚝과 튼실한 허벅지로 아이들을 목마를 태우고 함께 배드민턴을 치며 그네를 밀어주고 시소를 타고 있다. 아빠의 넓은 어깨 위에 올라탄 3살 딸이 머리를 잡아당기면 '아아-' 하며, 팔뚝의 근육만 울락 불락 해질 뿐 딸아이를 어찌하지 못한 채 머리카락을 잡히고 만다. 적은 이겨도 딸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어린이집 차량을 기다리며 진급과 연금과 다음 발령지와 자동차보험과 대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다 아이들이 오면 함께 피엑스로 가서 아이스크림을 그들의 자식 손에 쥐어주는 아빠인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고는,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전략과 전술 회의를 하고 대테러 훈련과 미군과의 연합 훈련을 하며 헬기에서 뛰어내리고 검술을 연마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가장은 가족을 지키지만, 우리의 이웃은 가족과 더불어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나의 가족과 나의 이웃을 조금 더 자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이유이다. 







  산책에서 다녀왔다. 1층 집 앞이지만, 마지막 운동 코스가 남아 있다. 우리 동의 꼭대기층은 23층. 모델 한혜진이 그랬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운동은 계단 오르기라고. 매일 오르고 있다. 7층 즈음부터는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후회하기 시작하고, 18층부터는 입에서 18, 18이 연신 나오지만 결국 오르고야 만다. 군인가족이니 군인 언저리의 운동이라도 해보자, 라는 생각 하나 붙들고 있다. 인생 뭐 있어, 오르면 내려오는 거지. 자, 한 발 내딛는다. 10분 후면 나는 땀에 젖어 23층에 올라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출산지원금, 그것이 알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