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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y 03. 2021

가요톱텐이 심어준 것

'열정'의 씨앗을 심어준, 그 시절의 '덕질'

  누군가 90년대 가요 사전을 만든다고 한다면, 반드시 나를 편찬위원 내지 감수로 불러야 할 것이다. 나는 90년대 가요사의 살아있는 역사요, 증인이다. 수많은 녹화 비디오테이프가 그 증거가 될 수 있는데, 아쉽게도 서울로 이사 오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비디오테이프 안에는 ‘가요톱텐’으로 대변된, 90년대 가요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가요톱텐 최초의 기억은 손범수 씨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를 빼놓고 가요톱텐을 이야기할 수 없다.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그를 보기 위해 가요톱텐을 본 건 아니었지만 그를 피할 순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수많은 이들을 사랑했다.

이리도 후리(?!)한 스타일로 가요 프로그램 진행이라니요, 아나운서 님 이 때는 이리도 젊으셨습니다. 

  

  김원준이 시작이었다. 밤에 마이마이 안에 넣은 김원준 테이프를 돌려 감기, 되감기 하느라 ‘틱, 틱’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거슬린 엄마는 ‘자라’ 한 마디 했다. 한 면을 다 듣고 테이프를 돌려 넣지 못해 속상해하며 잠이 들었다. 그 후에 김정민의 걸걸한 목소리를 좋아했고, 김민종이나 임창정, 홍경민 같은 이름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2학년 봄소풍에서 룰라를 녹화해 돌려보며 엉덩이를 때리는 춤을 춘 후, 나는 녹화를 시작했다. 6학년 수학여행 때는 ‘노이즈’의 춤을 연습했는데, 춤은 문제 되지 않았으나 그에 어울리는 부채를 사는 것이 문제였다. 중학생 때는 터보나 쿨, 영턱스클럽은 나의 주요 녹화 고객이었다. 고등학교 축제 때는 클론의 비련을 추기 위해, 야광봉을 내내 손목에 걸고 연습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집 녹화 비디오테이프의 수많은 ‘멈춤, 되감기, 재생’의 반복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나의 댄스 역사를 거쳐간 화면들

  

  1998년 초, KBS는 황급히 가요톱텐 마지막 회를 방송했다. 국가부도 분위기 속에서 노래와 춤은 걸맞지 않았다. ‘외환위기’라는 말이 자주 들렸으나 나에게는 가요톱텐의 부재가 더 가슴 아팠다. 얼마 후 가요톱텐은 ‘뮤직뱅크’로 환골탈태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문제의 ‘신화’를 찾아냈다. 


  그들의 데뷔부터 나는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가요톱텐은 당연하고 다른 방송사의 음악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까지 모두 녹화했다. 라디오 방송 역시 테이프로 녹음했다. 하루가 다르게 비디오테이프와 녹음테이프가 늘어갔다. 내 방의 벽은 그들의 포스터로 도배되었다. 그들을 소재로 함께 릴레이 소설을 쓰는 친구들은 복도에서 만날 때마다 ‘산!’을 외쳐 댔다. 신화가 외쳐 대던 ‘산’은 우리에게도 일종의 암호이자 구호였다. 친구들과 함께 외쳐댄 '산' 속에서 나는 그들의 컨디션과 기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은 우리 우정의 다른 이름이었다.

  산골 동네여서 공개홀 방청은 불가능하던 내게, 신화가 강릉에 라디오 특별생방송을 온다는 소식을 들은 날은 기회로 다가왔다. 난생처음 월담을 해보았으나, 선생님의 손을 잡고 다시 교실로 돌아온 날은 야자고 뭐고 책상에서 울다 잠이 들었다. 신화가 처음으로 1위를 한 날, 나도 처음으로 ARS 투표를 했고 그들 6명이 운 것보다 더 많이 울었다. 가요톱텐 시절부터 조용히 길러온 나의 ‘덕력’은, 신화에서 폭발하여 진정한 빛을 낼 수 있었다.

이상한 영어 줄임말이 유난히도 많았던 곡, T.O.P


  그 시절의 덕질을 돌이켜 보면, 가장 미스터리한 것은 역시나 '엄마 아빠'이다. 엄마 아빠는 나의 '빠순이' 시절, 단 한순간도 말리거나 못하게 한 적이 없었다. 비디오 녹화를 보고 보고 또 보고 있으면 아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재밌나? 그게 뭐가 재밌나" 하며 물어보곤 했다. 나는 '어' 한 마디로 대답하곤 했지만, 그렇게 묻는 아빠를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민우의 표정과 춤 선이, 에릭의 스웩이, 동완의 눈웃음이 모두가 재미있는 데, 이 재미있는 걸 모르는 아빠가 더 이상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고3 때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오면 밤 11시였다. 나는 그 시간에 못 본 가요 프로그램을 보고 자곤 했다. 물론 그건 엄마가 녹화해 준 것이었다. 딸이 그냥 자면 좋을 걸, 굳이 그걸 보고 잔다고 해서 엄마는 언짢아하긴 했으나 못 보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음악 프로그램 앞부분을 녹화를 못 했다며 미안해하고는, '이번 주는 1위 못했네'하며 슬쩍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해주곤 했다. 

  방이 포스터로 도배가 되어 있어도 단 한 마디 하지 않는 엄마 아빠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싶다. 나는 당장 나의 딸(들)이, 그렇게나 '빠순이'짓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가요 프로그램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는 상상만으로도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도대체 나의 엄마 아빠는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었을까 아니 나아가 녹화를 해주면서까지 딸의 '덕질'을 도와줄 수 있었을까.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런 엄마 아빠 덕에 나의 '열정'은 10대부터 고스란히 내 몸 밖으로 거침없이 표출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픈 것을 내가 스스로 찾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나만의 방식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못하게 하거나 막아서는 것은 없었다. 10대에 '가요톱텐'을 보면서 '덕질'이라는 형태로 심었던 씨앗이, 20대가 되어 내 인생에 대한 나의 결정과 실행에 제대로 피어날 수 있었다. 그 뒤에 부모의 조용한 지지가 있었음을, 한참이 지난 후에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요즈음 너튜브에서 실시간으로 옛날 가요 방송을 스트리밍 해준다. 서울로 이사 오면서 잃어버리고 버렸던 수많은 녹화테이프의 장면들이, 나의 핸드폰 속에 그대로 살아 나온다. 춤과 화장, 노래는 어쩜 그리 일관되게 촌스러운지, 쓸데없는 규제는 왜 그리도 많았는지, 그 규제에 어떻게든 반항하려 일부러 드러낸 염색한 머리카락을 보다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게 멋있다고 쫓아다닌 나와 친구들은 왜 그런 유치한 찬란함에 사로잡혔었나.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다. 나의 10대를 가득 채웠던 좋아하는 가수들과 노래에 그 시절의 냄새와 바람도 함께 묻어 나오기 때문이다. 세상에 고민거리라곤 공부와 친구와 가요톱텐 순위뿐이었다. 아무 대가 없이 순수하게 좋아하는 대상만을 좋아하고 좇았던 시절, 그래서 실망이나 원망 없이 기뻐하고 열광하며 함께 발전했던 시절, 그 시간과 공간 속의 내가 한없이 사랑스럽다. 나의 10대를 가요톱텐과 신화가 가득 채우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더불어 가요톱텐과 신화를 향한 뜨거웠던 마음 뒤에, 그런 딸에 대한 믿음을 가득 품고 있었던 나의 부모가 있어 더욱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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