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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y 14. 2021

아빠의 첫 비행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며

  아빠는 52년생이다. 일흔의 평생,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다. 그런 아빠가 2019년 5월, 딸의 재촉에 못 이겨 새벽의 김포공항에 발을 디뎠다.       

    

  아빠가 쉰둘이 되던 해에, 강원도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다. 고모가 계시는 목동 어딘가에 1톤 트럭이 다였던 짐을 내렸다. 1년 후 아빠는 택배 일을 시작했다. 아빠는 자꾸만 ‘행랑’ 일이라고 했으나, 갓 스무 살이 넘은 나는 행상이나 택배나 거기서 거기였다. 차를 타고 물건을 옮기는 일은 다 비슷해 보였다. 나는 내 몫의 스무 살을 사느라 바빴던 시절이었다.

  아빠는 마트에서 물건을 빼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인천공항까지 가서 짐을 실어왔다. 어느 날은 새벽 일찍 수원에서 물건을 받아온다 했고 한동안은 일이 없다며 집에 있기도 했다. 명절에는 잠도 줄이고 일을 나갔다. 강원도에 있을 때는 미용학원을 운영하며 집에만 계시다가, 서울 와서 차 타고 여기저기 다니시는 게 즐거우셨나 보다. 지친 얼굴보다는 신나게 일을 하는 표정이 더 많이 보였다. 아빠가 택배 일을 한다는 게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일이 없는 것보다야 나았고 무엇보다 아빠가 좋아 보였다. 그거면 되었다 싶었다.

  택배 일을 하면서 딸과 아들을 시집, 장가보냈다. 여전히 쉬는 날은 불규칙적이었고 많지 않았다. 나이는 자꾸 들어가고 보수는 줄어들었다. 서울과 경기권은 지도도 안 보고 다닐 수 있는 아빠이지만, 자꾸만 젊은이들에게 일이 넘어가는 걸 보기만 해야 했다. 시집간 딸이 가끔 전화하면, ‘그냥 집이야, 오늘은 쉬어’라고 대답하는 아빠가 안쓰러워지는 날이 많아지고 있었다.

           

  2019년은 엄마가 60번째 생일을 맞는 해였다. 엄마에게 무슨 생일선물을 해줄까 하다가 문득 ‘제주도’가 떠올랐다. 그래, 제주도다. 엄마보단 아빠에게 더 좋을 것 같은 엄마의 생일선물이었다. 엄마는 몇 번 중국과 제주도를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아빠는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거의 50여 년 전 배를 타고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를 다녀오시고는 제주도도 가본 적이 없었다. 엄마와 아빠에게 동시에 효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3일을 연속으로 쉴 수 없는 아빠의 일이었지만, 거의 한 달을 매일 전화해서 여행 가는 3일간은 일을 하지 마라고 다그쳤다. 자꾸만 아빠와 떠나는 마지막 비행 여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의 재촉에 아빠는 강제 휴가에 들어갔다.           






  스승의 날이 지난 어느 새벽, 다섯 살, 세 살 두 딸과 남편과 막내를 임신 중이던 나는 김포공항에서 엄마와 아빠를 만났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 아빠의 얼굴은 조금은 상기되어 있었다.

  “비행기도 안 타본, 서울 촌 할아버지네.”

  하고 놀리니 비행기 그까짓 거 티브이로 수백 번도 더 타봤다고 너스레를 떠는 아빠가, 그날따라 조금 더 늙어 보였다. 이륙할 때 귀가 먹먹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아빠 나이 쉰이 넘어 딸아이의 첫 출국을 지켜보던 그 마음으로, 거의 20년이 지나 내 나이 마흔이 되어 아빠의 첫 비행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아빠에게 창가 자리를 양보했다. 아빠는 1시간 정도의 비행 내내 창밖을 보았다. 아빠에게 땅에 붙어사는 것의 의미를, 그 삶이 하늘에서 바라보았을 때 얼마나 작아질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고 싶었다. 아빠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다가, 짧은 비행을 마치고 제주공항에 내렸다.      


  제주에서는 마치 수학여행처럼 유명한 곳만 돌아다녔다. 용두암을 보고 금능해변에서 바다를 보았다. 주상절리를 보고 에코랜드를 갔다. 천지연폭포에서 사진을 찍고는, 아빠에게 고등학교 때 와봤냐고 물어봤다. 아빠는 와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을뿐더러 그 당시는 이렇게 길이 잘 닦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라도가 보이는 카페에서 한참 있었고, 식사는 대부분 유명하다는 맛집을 갔다. 흑돼지 삼겹살, 갈치조림, 해물칼국수는 맛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쌌다. 아빠는 ‘몸국’이라는 음식을 가장 좋아했다. 돼지육수에 해초를 넣은 제주도 해장국. 비싼 음식들을 두고 그것만 연거푸 세 번을 드셨다. 가는 곳마다 ‘이래서 제주도, 제주도 하는구나’, ‘이야, 참 좋다!’를 연신 내뱉는 아빠 덕에 효도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몸국

  이동하는 차 안에서 정신없이 잠만 자는 아빠를 보며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아빠는 밤늦게까지, 그리고 새벽부터 호텔 창밖을 그렇게 바라보았다고 한다. 제주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아서, 아빠의 방에서는 비행기가 내리고 뜨는 것이 잘 보였다. 별말 없이 그렇게 한두 시간을 창밖의 비행기를 보았다는 아빠. 끊임없이 이륙하고 착륙하는 그 비행기들 사이에서, 그 뜨고 지는 여러 사연과 시간의 간격에서 아빠는 무얼 그리 본 걸까.          


  늘 일은 마지막에 터지고야 만다. 비 오는 제주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었다. 임신 6개월의 몸으로 2박 3일 내내 일정과 식사와 아이들을 맡았다. 엄마와 아빠를 위한 여행이었지만, 마지막 식사만큼은 나를 위해 먹고 싶었다. 성산일출봉 근처, 수제버거와 감바스가 유명하다는 카페를 갔다. 엄마와 아빠는 임신 중인 딸 먹으라고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맛은 있었다. 아빠는 태어나 처음으로 감바스를 먹어 보았다. 처음 먹고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은근 손이 가는 맛’이라며 몇 번을 더 먹었다. 그렇게 마지막 식사를 하고,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제주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에 거의 도착해서야 남편이 핸드폰을 카페에 두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페 충전기에 꽂아두고 출발한 것이다. 그때부터는 정신이 없었다. 비행기 시간에 빠듯하게 도착하여 렌터카를 반납하고는 정신없이 공항을 뛰어다녔다. 나는 그 와중에 카페에 계속 전화하고 문자 하며 남편의 핸드폰을 최대한 빨리 택배로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두 딸은 뛰다가 지쳐 엄마와 아빠에게 매달렸고, 공항은 유난히 더 북적여 게이트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가 이상했다. 얼굴이 붉고 식은땀을 흘리시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빠에게 전화 걸었더니, 한참 만에 전화를 받고는 화장실이라고 했다.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나 바쁘고 정신없는 때에 화장실이라니! 임신으로 배가 부른 딸은 남자 화장실 앞에서 ‘아빠, 빨리 나와’를 외쳐댔다. 사람들이 흘끗거렸지만 알 바 아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아빠는 줄곧 미안하다고만 했다.

  겨우 시간 맞춰 게이트를 찾았는데, 비행기 이륙이 지연되었다는 방송이 나왔다. 비가 오락가락했던 날씨 탓에 비행기가 정시에 뜰 수 없었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금방 나올게.”

  또다시 화장실로 가는 아빠의 뒷모습에서, 그제야 감바스가 떠올랐다. 딸이 먹고 싶어 한 이유로, 옆에서 맞장구쳐주며 먹어준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먹어 보는 매콤한 맛에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공항으로 오는 내내 말도 못 한 아빠였다. 몸국이나 먹을걸, 서울 가면 다시 먹기 힘들 텐데 몸국이나 실컷 더 먹을걸. 갑자기 눈에서 물이 왈칵 흘렀다. 손으로 훔치고 있는데, 아빠가 왔다. 정말 금방 왔다.

  “아빠 괜찮아?”

  “응, 이제는 괜찮아졌어. 이 서방 핸드폰은 어떻게 됐나?”

  괜히 남편의 핸드폰만 묻는 아빠였다.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도 아빠는 창밖만 바라봤다. 얼굴은 계속 붉었고 식은땀이 났으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냐는 물음에 그저 괜찮다고만 대답했다. 수제버거와 감바스, 남편의 핸드폰, 비 오는 날씨, 그리고 남자 화장실 앞에서 짜증 내듯 소리 지른 딸 모든 것이 미웠다. 아빠에게 제주도의 좋은 기억만 남겨주고 싶었다. 이러려고 아빠 일까지 쉬게 하며 택한 제주행이 아니었다. 다행히 나는 아빠의 앞자리에 앉아서, 후회와 미안함의 눈물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고 있는데, 곧 김포공항에 이륙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감바스






  다음 날 아빠에게 전화했다. 아빠는 덕분에 좋은 여행 했다고 말해주었다. 여행 중 언제가 가장 좋았냐고 물었다.

  “첫째 날 바다 보러 갔잖아.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는 손녀딸이랑 같이 손잡고 다녔거든. 그때가 참 좋았어. 내가 언제 또 손녀랑 그렇게 손을 잡고 제주도 바닷가를 걸어보겠어.”


금능해변

 

  그때 나는 아이들을 아빠에게 맡기고 남편과 오랜만에 단둘이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둘만의 사진도 찍고 바닷바람에 취해있었다. 아빠가 아이들을 잘 돌보고 있는지 멀찍이서 그저 보기만 했다. 그 순간이 아빠에게 더없이 행복했던 시간이었음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빠에게 이번 여행이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행이었다. 미안함이 조금은 가셨다. 미안함이 가신 자리에 아빠의 말이 자꾸 되뇌어졌다. 아빠가 손녀딸과 다시 제주도 바닷가를 다시 걸을 수 있을까. 그런 날이 또 올 수 있을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의 아빠의 식은땀만 자꾸 생각났다.           



  3일 후 남편은 핸드폰을 택배로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일상으로 빠르게 파묻혀갔다. 이따금 비행기를 보게 되면, 아침저녁으로 비행기를 바라봤을 아빠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아빠의 생은 남았고, 그 시간 동안 우리가 함께 비행기를 더 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조금 더 자란 나의 딸이 조금 더 늙은 나의 아빠와 다시 바닷가를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빠의 마지막 비행이 남아 있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엄마와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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