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시 필사를 하다가, '핥'자를 쓰고는 한참을 보았다. 아, 이 글자 오랜만에 써 본다. 핥, 자를 쓴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글자를 적잖이 봐 왔고, -그래, 핥, 자는 ㄾ 겹받침 글자 중에서도 꽤 많이 쓰이는 글자다. - 적잖이 타이핑해 봤지만, 손으로 써 볼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이들을 다 재우고 '핥'자가 들어가는 시를 필사하는 내가 꽤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허수경 시인의 '빙하기의 역' 중에서
그러다 오늘 낮에 들은 테드가 생각났다. John Koenig의 'Beautiful new words to describe obscure emotions(이름 없는 감정들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신조어)'였다. 참신한 내용이었지만 엄청 와 닿지는 않았다.('3분 낭독'용이 아닌 테드는 가볍게 자막 보며 듣는다) 내용보다 차라리 연설가의 목소리가 맘에 든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부분은, '자신을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독일어 단어로 자신이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질츠 어쩌고 그런 발음이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 나 그거 뭔지 알아. 기자가 되고 난 후에 공허에 빠질까 봐 두려워했었지. 그런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 은근히 많을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유의미한 수확은 없었던 것 같다. 테드에서도, 핥에서도. 이 모든 게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별 쓸데없는 신조어, 많이 보지만 손으로 써 볼 일 없는 글자에 대한 감상. 이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밀린 시를 필사를 다 했으면 잠이나 잘 일이지, 오랜만에 아이들이 잠들고 잠이 오지 않는다고 책을 폈다. 유의미한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유의미를 찾기에 독서보다 좋은 것은 없지.
붓다는 사람의 생각이 '정글 속 원숭이' 같다고 말했다.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왔다 갔다 날뛴다는 것이다. 나의 서재, 안방 화장실에서의 나는 한 마리 정글 속 원숭이가 되었다. 책을 세 줄을 읽고 인스타를 보고는, 책을 다섯 줄을 읽고 브런치를 보았다. 아직 내 댓글에 답글을 안 달으셨네. 다시 책을 읽고는 자꾸만 낮의 쓸데없는 테드 내용이 떠오른다.
결국, 노트북에 졌다. 별 쓸데없는 글이 쓰고 싶었던 것이다. 글을 쓰지 않고 잠이 들면 몸에도 좋고 정신건강에도 좋을 텐데, 쓸데없는 글이 쓰고 싶어서 잠들지도 못한 것이다. 노트북을 열었으면, 한글파일을 열면 될 텐데 관종 기를 무시하지 못한 나는 굳이 브런치의 글쓰기를 열었다. 발행을 하고 안 하고는 다 쓰고 난 후의 문제다. 일단은 쓰는 게 중요하다. 뭐라도 써야 한다. 쓰지 않으면 오늘 밤은 잠들지 못할 것이다.
누나에 대해 늘 객관적인 김 동생
동생이 누나에게 일갈했다. 나의 글은 '자본주의적 글쓰기'라고. 어쭈, 잘 아네 요놈, 역시 내 동생. 그럼 그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적 글쓰기를 해야지, 그럼 공산주의적 글쓰기를 해야겠니. 상금 걸린 공모전만 도전한다고 동생 놈이 누나한테 아주 그냥 맞는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지금까지 줄곧 내 글쓰기의 '화두'가 되었다. 나는 돈이 되는 글을 쓰는 것인가, 돈이랑 상관없는 글을 쓰는 것인가. 물론 전적으로 후자다. 돈이 되는 글을 쓴다면, 브런치에서 이렇게 일기나 쓰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돈이 되는 글쓰기를 한다면? 아마 나는 글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돈값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타자 위의 손가락이 천근만근일 것이다. 지금의 글쓰기가 좋다. 원하는 만큼의 즐거움을 준다. 쓰고 싶은 글을 원할 때 쓰고(물론 쓰고 싶은 글이 시간에 비해 압도적이긴 하다),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는다. 순수하게 그 과정이 즐겁다. 돈이나 실용성으로 따지자면, 이 행위들은 오히려 죄악에 가깝다. 시간 쓰고 기운 쓰고 머리 아프고 전기 잡아먹고 도대체가 돈과는 1도 관련이 없는 행위들이다. 동네 문집은 돈을 내면서까지 글을 쓰고 제출하고 있다! 이런 바보짓을 골라골라 하는 내게 자본주의적 글쓰기라니, 건방진 동생 놈 같으니라고!
공모전으로 떼돈을 벌었다면 당당하게 '자본주의적 글쓰기의 결정체'라며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지만, 기껏 용돈벌이 정도였다.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어 자랑한 결과 고스란히 생활비에 보태진 나의 상금. 이러니 더더욱 자본주의적 글쓰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나의 글쓰기의 어느 구석이 자본주의적이란 말인가. 미래의 어느 날?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조금 행복해진다. 글로 돈을 벌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로 돈을 벌면? 글이 돈값을 해야 하고, 그럼 그거 행복한 거 맞나? 글이 업이 되는 순간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차라리 공산주의적 글쓰기가 더 즐거운 거 아닐까? 공리주의적 글쓰기? 흠, 사회주의적 글쓰기라고 부르는 게 더 나에게 어울리려나? 정치학에 미련이 남은 건가? 망상은 자유이라지만, 그래도 잠을 줄여 쓰는 글인데, 아무리 영양가 없는 내용이라 해도 여기까지 해야겠다.
누군가 말했다, 독서의 종착역은 글쓰기라고. 그럼 나의 글은 뭐지, 독서라곤 1도 없는 내게 글쓰기는...... 갑자기 추전역이 떠올랐다. 해발 855미터에 있는, 남한 해발 최고 높이에 있는 기차역. 기차는 서지 않고 이제는 관광지로만 존재하는 역. 그러니까, 기차역으로서는 존재 가치가 없는 역. 글로서는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는, 독서 없는 나의 글. 나의 글의 존재 가치는 어떻게 증명될 수 있을까. 내 안의 것들을 끄집어내는 행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당연히, 엄청난 의미가 있다. '나'에게. 내가 '나'로서 가치 있게 존재함을 인정하는, 행위와 결과물로서의 글인 것이다. 내 존재의 가치로움을 인정하는 주체조차 '나'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의미 있기에, 독서는 어쩌면 2차 또는 3차적인 것이다. 독서를 통해 좀 더 확대되고 고급진 어휘를 건지거나 아름다운 문장을 수집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러기 위해 독서를 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독서의 욕망보다 쓰기의 욕망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다. 세상은 넓고 읽고 배울 것은 많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나, 시간은 한정적이기에 일단은 내 안의 것들을 꺼내고 봐야겠다. 너무 꽉 차 있어서 꺼내지 않고 집어넣으면 안에서 터질 것만 같다.
문제는 꺼내고 꺼내도 자꾸만 생겨난다는 것이다. 하나를 꺼내니 네 개가 생겨난다. 이럴 수가. 왓어매직. 도대체 책은 언제 읽지. 사둔 책, 빌린 책이 저렇게나 쌓여 있는데. 책을 옆에 두고 노트북을 연다. 글을 쓰다 지치면 책을 봐야지. 글을 쓰고 나면 아이들이 올 시간이다. 밤에도 마찬가지다. 원래 글은 낮보다 밤에 잘 써지지, 책은 아침에 보자.(나는 올빼미형 인간이다. 미라클 모닝과는 연관이 없는 사람이다.) 글과 책은 어쩌면 양립불가의 항목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정신 승리하고는 인스타를 펼친다. 역시나 많은 'booklover'들이 예쁜 배경을 바탕으로 사진을 찍어 감상을 올려두었다. 읽지도 않고 하트를 누른다. 책 포스팅을 한 그들에 대한 경외와 수고에의 보답을 표해야 한다. 그리고 내 안의 못난 감정이 꼬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많으니 이렇게 많고 두꺼운 책들을 읽고 올리는 거겠지. 자랑하는 건가. 나 시간 많아요, 책도 많이 봐요, 지식인이자 문명인, 문화인이에요. 책을 안 읽어 속이 좁고 뒤틀린 티가 팍팍 난다. 어쩌겠는가, 내가 이리도 부족한 사람인 것을. 그러고는 그들의 팔로워를 확인하고는, 금세 연민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 아직 좀 더 노력하셔야겠어요. 인플루언서가 되기에는 부족한 숫자예요.
나의 브런치도 마찬가지다.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재능에 비해 구독자 수와 라이킷은 과분하다. 어쩌다 운이 좋아 구독자 수가 늘었다. 나라는 사람, 나라는 글 쓰는 이보다는 특정 글 하나가 맘에 들어 구독한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구독자 수는 허수이다. 구독자 수가 줄어드는 일도 잦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지만, 모두를 만족시키고 싶은 욕심이 앞서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나, 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지. 구독자 수를 늘리려 글을 쓰는 건가. 글을 쓰면서 이미 독자들의 댓글을 예상하는 건가. 이런 제목을 쓰면 혹하겠지, 이런 생각으로 제목을 쓰는 건가. 주객전도는 나를 위해 만들어진 사자성어였군.
브런치 역시 일종의 '장르'이다. 브런치가 좋아하는 글이 있다 보니, 브런치에 맞게 브런치에 어울리게 글을 쓰고 있다. 그런 글이 아니라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쓸 때에도 활성화되는 뇌가 다르다는 것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브런치 글, 공모전 글, 동인지 글을 쓸 때마다 뇌의 불이 켜지는 지점이 다르다. 브런치의 글쓰기 화면과, 한글파일 화면에 쓰는 글은 어쩐지 냄새도 다를 것만 같다. 이 정도면 글의 갈래를 '문학, 비문학, 브런치'로 나누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장 인정받고 싶은 이에게, '쓸데없는 글이나 쓰느라'라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글이나 쓰느라 잠도 안 자고, 소중한 댓글에 답글도 못 달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문장을 마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나는 내가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글이, 나 자신에게 결코 쓸데없지 않음을 글로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 안의 것을 꺼내야 내가 살 수 있음을,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알고 있기에 글로서 보이고 싶은 까닭이다.
글에 대해 잡소리를 토해 냈다. 한 번은 쓰고 싶었다. 쓸데없는 글이 얼마나 나를 살리고 있는지를, 쓸데없는 글을 쓰기 때문에 내가 그 힘으로 일상을 살아낼 수 있음을.
아침이 되면 분명히 발행을 후회할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글을 쓰고 나서야 숨 들어오고 나가는 구멍이 넓어지는 나라는 존재가 있음을 기록해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