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샤 Jun 15. 2021

'합평'을 네 글자로 하면

너덜너덜

  반드시 동그랗게 앉았어야 했어요. 책상을 한쪽으로 치우고 의자를 동그랗게 모이도록 하면서부터 스트레스는 시작됐어요. 문예반이어서 책을 읽고 시를 쓰는 건 좋았지만, 자기 시를 낭독하는 것까지도 좋았지만 합평은 너무나도 싫었어요. 지겨워요. '잘 들었어요', '좋았어요', '특히 어느 부분이 좋았어요', '시작이 평범하지 않아요', '마무리가 인상적이에요' 뻔한 말들만 해야 하는 뻔한 시간. 별로였어도 좋다고 말해야 하는 거짓의 시간, 지겨운데 지겹다고 말하면 안 되는 시간.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문학동아리를 했던 건 '시'를 쓰는 게 좋아서였어요. 시만 쓰고 싶은데, 자꾸 다른 친구의 시를 듣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래요. 정말 이상한 시인데, 이상하다고 하면 친구가 상처 받을 거잖아요? 그래서 그냥 좋다고만 말해버려요. 정말 친구를 위한다면 '너의 시는 너무 뻔해', '시에 참신함이 없어', '너무 흔한 표현이야' 이런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나의 시에 대한 평가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누구 하나 '너무 심하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추상적이기만 하다', '와닿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해주는 이 하나 없었어요. 그래서 합평 시간이 너무나도 싫고 지겨웠어요. 고3이 되면서 동아리 시간은 사실상 자율학습 시간이 되었는데, 합평을 하지 않게 되어 속 시원하고 기분 좋았을 정도였어요.

그렇게 저에게 합평은 답답하고 지루한 기억뿐이었어요.







https://brunch.co.kr/@1kmhkmh1/40


  2020년 동서문학상 수상 이후 동서 문학회에 몸 담고 있어요. 회원이 되자마자 동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제출 날짜를 받게 되었어요. (원하지 않는 회원을 제외하곤 다 내야 해요)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던 주제를 써서 내었어요. '엄마'에 관한 이야기여서 여성 작가들만 모인 문학회에 더 어울리는 글이라고 생각했어요. 쓸 때도 술술, 다 쓰고 나서 읽어 봐도 술술. 이런 명필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싶었어요. 신입회원 필력과 패기가 대단하네, 선배 문우님들이 이런 생각을 하시면 어쩌지, 라는 건방진 생각이 끊임없이 나서 한동안 저 혼자 설레여서 힘들었어요.

  원고 마감 기한이 지나자 '합평'을 해야 한대요. 문우님들의 글을 보며 우와, 우와 했어요. 비판적인 관점으로 보려 해도 비판할 게 딱히 느껴지지 않은 글들이 많았어요. 대부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만 평을 남겼어요. 문우님 한 분께서 어휘 사용에 대한 수정본을 보내주셨기에 감사히 받아 수정했어요. 합평 마감 날짜가 다가오고, 내 첫 동인지가 이렇게 나오는구나 긴장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긴장의 정체는 '기쁨과 설렘'이었어요.

  합평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 날 어린이집 하원을 나가려고 신발을 신다가 멈춰 섰어요. 내 글에 달린 댓글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몰라요. 결론적으로는 '이 내용으로는 글을 실으면 안 된다'였어요. 물론 그분은 그렇게 쓰지 않으셨어요. 그저 이 부분, 이 부분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정도로만 지적해 주셨지만 사실상 글 전체에 수정이 필요하단 말씀을 해 주신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그저 화만 났어요. 아니, 내가 얼마나 오래 생각해 온 주제인데, 이거 진짜 이해 못하시는 건가, 글이 말하고자 하는 걸 감을 못 잡으신 건가. 글쓰시는 분이 이 정도도 알아채지 못하신단 말인가.

  그 밑에 다른 문우님도 '윗 분 의견에 동감합니다'라고 적으셨어요. 아니, 이 분들 글 쓰시는 분들 맞아? 이걸 이해를 못 하신다고?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 내내 얼굴이 빨개지는 기분이었어요. 도대체 내 글에 뭐가 문제가 있다는 거지? 그게 문제면 글을 아예 엎어야 하는데, 그 정도까지 글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나는 아무리 읽어도 문제없어 보이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더 명문인데?

  한동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내 글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내 글에 문제가 있는 것에 그저 낙담했어요. 그래서 원고 수정 기간 동안 모른 체하고 보냈어요. 브런치에나 글 쓰며 작가님들과 시시덕거리며 동인지 원고를 무시했어요.

  원고 수정 기간이 끝나갈 즈음에야 다시 펼쳐 보았어요. 어쩐지 불쌍하게 느껴지는 내 원고. 그분이 지적하신 부분을 대충 수정해서 따로 연락을 드렸어요. 이 정도면 됐겠지 하는 마음으로 한 번 더 봐주십사 부탁드렸어요. '매우 훌륭하네요'라고 바로 답이 올 줄 알았건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었어요.

  핸드폰이 진동했어요. 올 게 왔구나. 그분은 답은 이전과 같았어요. 글 전체에 흐르는 사유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글의 주제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부분을 수정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었던 거예요. 글의 흐름이 어떻게 나가야 할지 대략적으로 잡아주시더니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오랜만에 '절망'이라는 단어가 내 안 깊은 곳에서 떠올랐어요. 내 글이 이 것 밖에 되지 않는구나. 수정 기간도 거의 끝나가는데, 다시 글을 완전히 뒤집어서 쓸 자신은 없었어요. 그렇다고 새로 쓸 순 없고, 지금이라도 포기할까. 그래도 첫 동인지는 받아보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었어요. 글을 쓰며 처음으로 느낀 절망감이, 내 안에서부터가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 때문에 일어나다니. 그분이 미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분이 쓴 글을 다시 찾아 읽어봤어요.

  읽고 또 읽고 또 읽었어요. 그제야 답을 알게 되었어요. 그분이 원하신 것, 그건 바로 '품격'이었어요. 글이 마땅히 품어야 하는 품격.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글마다 지니고 있는 '글의 품격'이 있는 것이었어요. 그분의 글에서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글을 읽고 나면 '품격'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떠올랐어요. 이제는 내 글을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어요. 내 글을 완전히 뒤집지 않고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지우지 않고서 내 글이 '품격'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어요. 이틀 밤을 고민해서 수정을 하고 최종본을 제출했어요. 더 이상 그분께 보이지는 않았어요. 아주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지만, 글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품격'을 생각하며 고치고 고쳤어요.



  '최종본 제출합니다' 글을 올리고 나서 한참을 모니터를 바라보았어요. 글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것, 글이 마땅히 지녀야 할 것, 글이 마땅히 품어야 할 것. 저는 참으로 모자란 사람이어서, 그분이 기간을 두고 내내 가르쳐 주신 것을 '최종본을 제출'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품격, 그리고 '포용'이었어요.

  저는 제 글로 가득 차 있었어요. 제 글 밖에 몰랐어요. 제 글에 자만하고 있었어요. 나의 글을 읽는 이들이 공감하고 위로받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분은 나의 이런 모난 마음을 계속 깎아주고 계셨어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다른 쪽으로 모난 마음을 삐죽거렸어요. 그러면 또 이 쪽에서 조용히 문질러 주셨어요. 그러면서 글 쓰는 이가 어떠한 마음 자세로 글을 써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어요.






  글은 인생 전체로 보면 좀 더 나은 생을 위한 수단이고, 그 자체로서는 목적이어야 한다고 지금까지 생각해왔어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여겼어요. 치유를 위해, 자존감을 위해, 즐거움을 위해, 고통을 잊기 위해 또는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으나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써의 글은 분명 한계가 있었어요. 저는 그랬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글을 썼어요. 글 자체로서의 순수함을 위해. 제가 쓰는 모든 글은 그저 제가 좋아서 써요. 제가 좋아서 썼는데 읽으시는 분들이 좋아해 주셨어요. 그래서 더욱 제가 쓰고 싶은 글만 썼어요.


  줄곧 저는 제 글로 읽는 이들을 포용한다고 생각해 왔어요. 나의 글로 독자들을 감싸 안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분은 독자의 위치에서 제 글을 포용해 주셨어요. 글의 못난 부분을 받아주시고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까지 생각해서 방향을 잡아 주셨어요. 내 글을 읽는 독자가 글을, 그리고 글쓴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글. 이 것이 답이었어요. 내가 나서서 독자를 껴안는 것이 아닌, 독자가 마음을 열고 나를 안아줄 수 있는 글.

  그러니까 글은,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의 마음의 통로였어요. 작가가 써낸 글 위에 독자가 걷고 달리고 서고 앉아서 꽃을 보고 달을 보는 것이었어요. 그 독자들이 그렇게 행위하며 글을 받아들여 주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것을 모르고 그저 '내 창작물은 내 것'이라며, 저만큼이나 옹졸한 글을 세상에 내놓고 있었어요. 거의 매일 글을 쓰며 이해하려 애쓰면서, 이 간단한 이치를 헤아리지 못한 채 글 쓴다고 자판을 두드렸던 거예요.


  여전히 저는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라 앞으로도 이기적인 글을 쓰게 될지도 몰라요. 속 좁고 포용하지 못하는 글을 내놓고는 읽어 달라고 앵앵거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적어도 글을 쓰는 이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는 분명히 세워두려 해요. 글 는 이들이 포용해줄 수 있는, 품격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







  어쭙잖은 자만심과 어설픈 자신감이 가득해서 품격과 포용은 옆에 제쳐둔, 문자의 나열만 가득한 나의 글에 어느 날 세차게 내려친 사자후.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후 매만지고 다듬은 제 글이 동서문학 17집에 담겨 있어요. '걸레를 빨다가'.

  코로나 때문에 직접 모여 동그랗게 앉아보진 못했지만 온라인으로 오랜만에 합평의 시간을 가졌어요. 따끔한 합평으로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가르침이 너무나도 커서 글 쓰는 이들과 나누기 위해 또 이렇게 글로 남겨요. 저와는 격의 차원이 다른 작가님들의 포용의 마음이 담긴 시와 수필, 동시, 동화, 소설이 담겨 있어요. 책의 물성이 건네는 초록빛을 쥐고서 '풍경에 닿은 문학'을 안아주는 시간을 가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2235064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3557338




* 6월 16일 수요일, 동서 문학회 회장님께서 '유 퀴즈 온 더 블록'을 통해 편지로 온기를 전하는 이야기를 하시네요. 따뜻한 마음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글이나 써!그래서, 그저 쓰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