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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Aug 17. 2021

그러니까, 글쓰기가

공백과 여백에서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정말 그냥 쓰고 있어.

좀... 별로지? 그냥 글을 쓴다니.

그런데 진짜야. 그냥, 사실 별생각 없이 써. 이거 써야겠다, 하면 그냥 쓰는 거야. 앉은자리에서 지금처럼.


  작년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시작하게 되면서는 쏟아낼 것이 많아서 썼어. 어느 정도 쏟아내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책을 읽으면서 써야지 했어. 슬럼프라는 것도 올 테고 글쓰기가 힘들어지는 때가 있을 테니, 그럴 때를 위해 책을 읽어야지 했어. 마치 슬럼프에 미리 대비하는 기분이랄까?

  고작 채 일 년이 되지 않아서인가 봐. 아직 그렇다 할 슬럼프나 고비 같은 건 없어. 다행이지. 글을 대하기 힘들 때가 있었으나, 그건 글의 내용을 풀기가 두려웠던 감정이지 글 자체로 쓰기 힘들거나 난감한 경험은 없었어.

  그러니까, 그게 문제인 거지. 나름 1년을 쉬지 않고 쓰면서, 어쩜 이리 염치없게도 책을 읽지 않고 쓸 수가 있는 거지? 뭔가... 뭔가가 있는 게야.


  나는, 어떤 것이든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다고 생각해.(당연한 걸...) 외국어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관계도 그렇고. 글쓰기도 그렇겠지. 그래서 말인데, 고백하자면 좀... 불안해. 그래, 이거 불안 맞아. 어쩜 이리도 책을 잃지 않고 막 써대는지, 지금까진 버틴 기분이랄까? 앞으로는 인풋이 너무 없어서 글을 못 쓰는 날이 오게 될까 봐, 그게 불안한 거야.

  뭐 예전에 읽어둔 것들도 있고, 나름 브런치 글들도 읽고 하니 핑계를 대자면 댈 수 있기는 해. 그런데 내가 말하는 독서는, 뭔가 종이책 특유의 찐한 독서 있지, 그거 말하는 거야. 책에 빠져서 밤새고 목이랑 허리랑 눈 아픈 거 생각도 못하는, 몰입의 독서. 이런 독서에서 진정한 사유와 영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하는 독서는 기껏해야 하루 10분, 브런치 읽기가 다야. 이래선 멋진 글을 쓰지 못해. 내가 원하는 수준의 글을 써내지 못해. 아쉽고 불안하고 속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써내. 솔직히 말하면, 쓰는 건 여전히 어렵지 않아. 쉬워, 한 시간이면 다 써. 고칠 것도 거의 없어. 그래서 더 난감해. 인풋이 없는데, 이 아웃풋의 정체는 도대체 뭐지? 이렇게 써내도 되는 건가? 자기 검열의 플레이 버튼이 내 안에서 눌렸어. 누른 주체는... 아마도 나겠지?

  브런치나 인스타에서 끊임없이 리뷰를 써내는 분들을 보면, 막 부럽고 심통 나고 그래. 어쩜 저렇게 읽으시는 걸까. 나도 저렇게 책을 먹어 치우듯이 독서하고 싶다. 이제 저런 독서를 바탕으로 멋지게 써내실 일만 남은 거겠지? 그리고 진짜 그런 분들은 확실히 글이 다르긴 해. 문장이나 구성, 표현 모든 면에서. 나는 뭘까? 뭘 믿고 이렇게 읽지도 않고 막 써내는 걸까? 이게 배설이 아니고 뭐겠어?

  나는 읽지 않고 쓰는 행위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을 갖고 있었던 거야, 쓰는 내내 줄곧. 여전히 내 마음속 쓰기의 우물에서 끊임없이 솟는 그게 무엇인지, 아니 우물의 위치도 몰라서 불안하고 난감했던 거지.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작가님이 댓글에서 조용히, 무심하게 실마리를 남겨 주셨어.


어린 시절 몽글몽글하게 피어났던 그때의 기억들, 감정들이 훗날 그 아이가 자라 살아가는 훌륭한 감정적 자산이 된다고 생각해요. 물질의 풍족함과는 분명히 차원이 다른 그 감정적 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과 작가님의 글에서, 매번 그렇게 느껴져요.


  애니메이션보다 보면, 전기 찌릿 신호 있지? 이 댓글을 읽고 그게 머릿속에 팍 꽂혔어. 어렴풋하게나마 우물의 위치는 찾은 것 같은 기분. '어린 시절의 기억과 감정들'에 빚진 감정적 자산. 여전히 막연하지만, 이게 지금 내 글샘의 발원점인 것 같아.

  나의 유년시절. 생각만 해도 웃음밖에 안 나와. 어린 시절에 뭘 그리 많이 했냐고? 아니야, 정반대야. 어린 시절에, 뭘 한 게 없어. 너무 휑해. 그저, 정말 너무나도 심심했어. 중요한 건 그 거였더라고, 지극한 심심, 텅 빈 유년, 경험의 빈곤, 공백으로 가득 채워진 여백.


  학교 가기 전엔 아빠를 따라 기원을 가고 오고 했어. 거기에 뭐했냐면, 하늘 보기, 땅 보기, 개미 보기, 바둑알 세기. 이거로 다섯 시간 이상을 버티는 거지. 정말 너무 심심했어. 같이 놀만한 친구도 없고, 아빠는 바둑만 두고. 나 혼자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돌을 쌓고, 요즘 말로 '멍 때리다' 다시 하늘을 보고 바둑알을 세고 개미를 세고.

https://brunch.co.kr/@1kmhkmh1/109


  학교에 가서는 글자를 깨우쳐서 책을 읽었어. 책을 어느 정도로 읽었냐면, 책을 읽다 심심해질 때까지 읽었어. 너무 심심해서 책을 읽었는데, 책을 읽다가 심심해지는 지경인 거지. 학원도 안 다닌 나는 소파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어. 창밖을 한참 보고, 그 풍경이 지겨우면 옥상으로 올라갔어. 옥상에서 앞산과 뒷산을 차례로 보며 누가 더 푸른색인지 비교했어. 오늘은 앞산이 이겼네, 하고 다음 날 또 올라가 보고.

  이렇게 심심했던 날들이 참 많았어, 아니 거의 대부분이었어. 숙제하고 책 읽고, 나머지 시간은 그냥 심심했던 거지. 멍 때리고 이런저런 별 거 아닌 생각을 했어. 지금 돌이켜 보면, '공백 혹은 여백'만 존재했던 시간이야. 그저 투명하기만 했던 그 시간들에, 나도 모르게 무언갈 - 무엇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 순수나 영감 이런 비슷한 것 아닐까 싶어 - 채우고 있었나 봐. 지금 내 글들이 그때의 공백, 여백에서 솟아나는 것 같아. 이게 내가 가장 수긍할만한 답이야. 출처가 애매한, 내 글쓰기의 시작점에 대한 답.



  음... 파블로 네루다의 '시(詩)'라는 시 알아? 좋아하는 시야, 자주 떠오르는 시이기도 하고.                                                            

<시>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 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이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 이하 생략 -                                                                      

  

  

  봐도 봐도 멋진 시야.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이나 시에 대한 영감을, 문자로 표현한 것 작품 중에 이 시가 단연 최고라고 생각해. 이렇게 시나 글이 갑자기 찾아왔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그릇이 있어야 하잖아. 그 그릇이 어렸을 때 '심심' 속에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 그릇이 하얀색처럼 느껴지는 거지. 그릇을 채우면, 어느새 글 한 편이 나오는 거지.

  유년의 여백, 그중 가장 선명한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는 경험에 대해 써 보았어. 감히, 건방지게 '문학(文學)'이란 단어를 들먹여보기도 하면서. 그런데 정말이야, 그 순간들만큼은 문학에 가까웠어. 그 시간들에 빚져서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문학이 비의 형태로 나를 찾아온,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건드리더군.


 http://ch.yes24.com/Article/View/45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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