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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Dec 23. 2021

내년에 볼 수 있으면 또 봅시다

< 작당모의(作黨謨議) 12차 문제(文題): 크리스마스 >



- 이거 참 실례하게 됐소.

- ......

- 나는 안 믿어도 저 놈은 믿을 수밖에 없을 겝니다.

- 그러니까. 한국은 저런 순록이 없어요. 뿔 좀 봐, 한 5킬로는 되겠어. 서울 한복판에서는 볼 수 없다니까. 게다가 진짜 코에서 불이 나고 있으니, 원 참.

- 저 놈 봐서라도 믿으시오.

- 오늘 하루만 믿어 보지. 오늘은 아무래도 날이 날이니까. 한국말은 또 왜 이렇게 잘하신대.

- 가는 나라마다 그 나라말로 말할 수 있어요. 다국적 일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한국은 오랜만에 옵니다. 한 20년 만인가.. 그때도 이런 아파트에서 한 번 들통이 났었어요. 승질이 고약한 사람이라, 호루라기를 불어대고 경찰을 부른다고 고함을 질러대서 그 아파트는 결국 다시 와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마쳤지 뭡니까.

- 그럼 속는 셈 치고 물어나 볼게요. 슬슬 궁금해지긴 하네. 어디서 온 겁니까, 돈은 받고 일해요? 나이는 몇이요?

- 눈이 녹지 않는 곳에서 왔습니다. 나라라는 개념은 없어요. 그곳에는 우리 몇몇 밖에 없으니까. 돈이라니, 돈보다 더 큰 걸 받습니다. 아이들의 눈빛이지요. 아이들이 12월이 되면 행복해지는 만큼 우리도 행복해집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아이들 표정 덕분에. 나이는, 그런 건 사람에게 적용되는 개념 같아요. 보이는 대로 믿으시오, 그게 내 나이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경비실에 앉아 차를 얻어 마시다니. 200년 가까이 이 일 하면서 흔치 않은 경험입니다.

- 거 참. 이렇게 말하니 더 진짜 같긴 하네.

- 207동 8층에 할머니랑 사는 꼬맹이 있지요? 그 친구랑 216동 꼭대기층에 10살짜리 아십니까, 그 두 친구만 주면 돼요. 할머니랑 이모랑, 선물을 못 사줘서 애가 탑니다. 그런 친구들만 골라서 주는 겁니다. 다른 집에는 내가 안 가도 각자 그들만의 산타가 있으니까.

- 선물 못 받는 아이들에게만 간다는 겁니까.

- 한국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에요. 매일 폭탄 터지는 걸 보며 자라는 아이들도 있고, 굶어 죽는 시체를 자주 보는 아이들도 있어요. 그런데는 참 난감합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을 찾아가야 해요.

- 여기도 못 받는 아이들 많습니다. 그래, 그거 하나 물어봅시다. 나도 젊었을 때 일해도 일해도 늘 부족해서 크리스마스라고 제대로 선물 하나 못해 줬어요. 그래도 큰 아들놈은 속으로 삭였지만, 둘째 놈이 선물달라고 울고 불고 난리 치는 걸 못 보겠어서, 괜히 일 있다고 집에서 나오고. 그런 집도 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휴, 그때만 생각하면 새끼들한테 지금도 미안해. 내가 그래서 손주들 거는 꼭 챙기긴 합니다.

-  노래 가사 모르십니까.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알고 계신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하하. 우리라고 왜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그 놈들 마음이랑 부모 마음이랑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게 참 농담이고 쓸데없는 말 같지만, 그런 부모가 있고 울고불고하는 건강한 아이들이 있는 자체가 선물입니다. 지나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울고 불고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자랄 수 있는 환경과 추억을 지닐 수 있는 것, 갈수록 더 커지는 선물 아닙니까. 그런 것을 추억이라 부를 수도 없는 아이들, 그렇게 추억으로 가질 미래조차 생각해 볼 수 없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선물을 줍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선물은 '오늘'만이라도 기쁠 수 있는, 일종의 상징 같은 거예요. 오늘 내가 살아 있구나.

- 추억이라. 이 양반, 말을 잘하시네. 정치해도 되겠어, 킥킥.

- 손주들 선물은 무얼 주셨습니까.

- 큰 놈은 무슨 딱지를 사달랩니다. 딱지는 접는 거지, 했더니 영상통화로 뭘 보여주는데 무슨 알록달록 그런 게 딱지랍니다. 작은놈은 아직은 자동차 이런 거를 더 좋아해서, 매년 차 사주는 핼비 하고 있지요. 내년에 태어나는 둘째 놈 아기가 글쎄 딸이랍니다. 손녀는 또 처음이라 손녀 선물은 뭐가 좋을까, 그건 뭐 내후년쯤 생각해 보면 되겠지요. 아이고, 저 놈이 기어코 꾸벅꾸벅 조는구먼.

- 저 놈도 오래 일했어요. 요즘은 조금씩 쩔뚝거리기도 합니다. 예전에 한창 때는 시속 300킬로로 날기도 하고 했는데, 매년 속도가 떨어지더니 올핸 영 힘이 없어요. 뿔이 멋있고 코가 밝아서 오랫동안 같이 하고 싶은데.

- 내가 10년 전에 내 회사를 그만뒀어요. 작아도 실속은 있었는데, 나오면서 믿는 두 놈에게 맡겼더니, 얼마 전 두 개로 쪼개지더라고. 한 명은 그래도 나한테 묻기라도 했지, 한 놈은 전화도 안 받아. 뭐, 어쨌든, 자동차 바퀴 체인을 만들었어요. 한 30년 했지. 그냥 뭐 간단한, 스노우 체인. 그러고 보니 당신이랑 우리 회사랑 똑같네, 한 철 노리고 일하는 거, 하하. 그런데 일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겉보기에는 한 철이어도 그 한 철 위해 일 년 내내 고생 고생해야 한다는 거.

바퀴라는 게 말이에요, 오래되면 갈아야 돼. 어쩔 수 없어. 아무리 차가 쌩쌩해도 바퀴가 오래되면 차는 구를 수 없어요. 차의 본질이라는 게 뭐야, 굴러야지, 구르려면 바퀴가 있어야 돼. 바퀴는 그런 거예요, 차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바퀴가 아주 새 거야, 탄탄해, 차가 오래됐어, 엔진이 말을 안 들어. 그럼 어떻게 돼요. 또 구를 수가 없는 거야. 차를 구르게 하는 건 바퀴고, 그 바퀴를 움직이게 하는 건 엔진이에요. 세상 일이라는 게 그렇더라고. 무엇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고, 쉽게 보거나 빠트리거나 하면 안 되더라고.

친구 놈 하나가 트럭을 했어요. 연락은 자주 못해도 겨울만 되면 체인은 보내 줬지. 어느 해는 택배가 그냥 돌아왔어. 알고 보니 차가 오래 됐는데 제대로 관리도 않고 타다가 뭐 하나 잘못돼서 사고가 난 거야. 딸 하나만 있는데,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아빠 그렇게 되니까 병원 오고 집도 돌아보고 했나 봐요. 내가 뭣 하다가 이런 얘기까지. 아, 오래 쓸려면 계속 봐주고 갈 건 갈아주고 해야 한다고. 코는 저리도 밝고 좋은데, 영 비실해 보이네. 돌아가면 좋은 거 좀 먹이고 해요. 보기 영 딱하네.

-  내가 인간들에게 이런 이야기까진 안 하는데, 그쪽 얘기 듣고 나니 안 할 수가 없네요. 나는 이 나이에, 이 나이가 몇 인지 이제는 생각도 안 납니다, 죽었어야 했어요. 신에게 빌었죠, 영원히 살게 해 달라고. 신은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임무를 준 겁니다. 아이들에게 기쁨과 사랑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을 하라고.

나는 이 일이 좋습니다. 아이들의 예쁜 모습을 보고 작은 손으로 나에게 간절하게 기도하고 그 기도를 들어주는 일. 그러니까 당신이 어렸을 때도 당신이 아버지가 되었을 때도 손주를 둔 지금도 나는 그렇게 계속 아이들의 두 번째 할아버지로 살아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내가 없다고 하지만,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진짜예요. 아이들이 맞는 거지요. 아이들은 늘 진실 쪽에 있습니다.

내가 영원을 택하면서 얻은 것이 저 놈이에요. 그러니까 저 놈도 영원 쪽에 있는 거지요. 그런데 이건 좀 이상합니다. 나는 항상 같은데, 어째 저 놈은 마치 인간들 세상의 동물처럼 살아 있어요. 힘이 없어지고 자꾸 꾸벅꾸벅 졸기나 하고.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픕니다. 몇 년 전에는 신께 여쭈었습니다, 저 녀석이 왜 저러는 거냐고. 신의 대답이 무언지 아십니까. 인간은 언제나 상실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인간은 평생 사랑을 준 대상을 잃기만 하는 존재, 끊임없이 미워하던 존재를 상실했을 때 그때서야 사랑을 깨닫고 시작하는 존재, 그렇게 사랑과 상실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끝내 가장 사랑하던 자기 자신마저 상실하는 존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인간의 그런 마음을 저 녀석을 통해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내가 진짜 사랑과 상실을 알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인간이던 때의 나는, 사랑과 상실을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상실하는 모든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었고, 사랑 또한 돈보다 낮은 가치에 머물러 있었어요, 사랑마저 돈으로 살 수 있었으니까 아니 그렇다고 믿었으니까. 그런 사람은 아이들을 대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이는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해야 하고 상실에 아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 녀석을 저렇게 지구 상의 생물처럼 만들어 주셨다고 하셨어요.

- 거 참, 심히 인간적인 신이시구만.

- 이제 슬슬 또 일을 나가봐야겠습니다. 저 녀석도 나도 이 정도 쉬었으니 힘을 내야지요. 하룻밤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라 나름 빠듯합니다. 나와 저 녀석을 본 건,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물론 비밀로 안 해 주셔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거라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영업 규칙상 이 말은 하긴 해야 합니다. 저를 본 것, 제가 말한 것들 비밀입니다.

- 하하하. 걱정 마시요. 보아하니 나보다 몇 년 위인 것 같은데, 나도 살만큼 살아서 할 말 안 할 말 구분은 잘하니까. 덕분에 이 밤이 심심치는 않아 좋았습니다. 다음엔 어디로 가십니까.

- 그 목록은 저 놈한테 있습니다. 허허. 저도 도착해 봐야 압니다.

- 저기, 내년에 또 볼 수 있는 겁니까. 이 일이라는 게, 좀 외롭거든. 특히 밤. 12월 25일 밤은 나름 특별한 밤이라 그런지, 더 그래요. 몇 분이라도 이야기하니 좋네.

- 우리는 연합체로 구성되고 운영되어 있어요. 누가 어디로 가게 될지는 매년 다릅니다. 제가 내년에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으면 내년 이 날 밤 노크해 보겠습니다. 그때까지 지구에 문제라는 전염병 조심하시고 잘 지내십시오. 1년에 한 번 움직여 보면, 작년에 본 사람 올해 못 보는 일이 꽤 많습니다.

- 나는 이 아파트만 8년 째야. 죽지 않는 이상 아마 내년도 여기 있을 거요. 내년에도 한국 올 수 있었으면 좋겠구먼.

- 그럽시다. 저 녀석이 날아오를 때 조금 이상한 냄새가 나요. 놀라지 마시라고.

- 조심히 다니시요. 내년에 볼 수 있음 또 봅시다.












오늘은 할아버지의 49재가 끝난 날이다. 기분이 이상하다. 할아버지는 평생 '타이어 잘 써야 돼, 타이어 엉망이면 체인을 해도 문제야, 체인 해보니까 결국 타이어가 가장 문제야. 체인 벗기는 순간 타이어 문제를 잊어버리거든. 니네 아빠 타이어 괜찮냐'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나나 동생이나 엄마아빠보다 타이어를 더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런 할아버지가, 타이어에 치이셨다.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데 잘못 밟은 사람이 할아버지의 오토바이를 쳐버렸다. 어른들은 급발진이라고 했다. 경찰에게 물어보니, 그 차의 타이어는 새거처럼 보인다고 했다. 할아버지, 타이어는 괜찮아도 사람이 문제였어요. 사람이 문제였다구요. 하늘나라에는 자동차 없나요. 제발 자동차, 타이어, 체인 이런 거 좀 잊고 편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참 순진하신 분이셨다. 나도 안 믿는 산타를 믿는 분이었다. 올해 크리스마스엔 꼭 진짜 산타랑 사진 찍어서 보여준다고 했다. 루돌프 코에서 진짜 밟은 빛이 난다고 했다. 루돌프가 날아오를 땐 오랜 타이어 태우는 것보다 좀 덜 역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너무 진짜 같아서 하마터면 믿을 뻔했다. 그런 터무니 없는 이야기 해주는 할아버지가 없어서, 올해 크리스마스부터는 할아버지 산타가 주는 선물을 받을 수 없어서 너무 슬프다. 곧 크리스마스인데, 할아버지가 산타랑 찍은 사진을 봐야 하는데. 할아버지가 다시 돌아와서, 진짜 산타를 봤다고 다시 뻥을 쳤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뻥도 진짜라고 믿게 될 것 같다.
오늘따라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다. 할아버지, 그곳에선 진짜 산타랑 사진 찍고 루돌프도 타고 즐겁게 지내세요. 많이 보고 싶어요, 할아버지.    




*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 다들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랍니다.

* 대문 사진 출처: 현대 오토 글로비스 공식 블로그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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