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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Dec 23. 2021

수고했어, 나의 스웨터!

< 작당모의(作黨謨議) 12차 문제(文題) : 크리스마스 >

  2001년 그 해 겨울, 세 개의 스웨터를 짰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그런 거’ 하면 팔자 사나워진다고 엄마가 극구 말리던 뜨개질이었다. 청승맞은 일 혹은 ‘그런 것’으로 분류되었던 뜨개질은 눈 침침해지고, 팔 아프고, 사 입는 것보다 실값이 더 든다는 이유가 따라붙었었다. 뜨개옷 하나 얻자고 본전도 못 찾을 일은 하지 않는 게 맞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내 어렸을 적 기억 속의 엄마는 겨울철을 앞둔 가을 무렵부터 뜨개질을 시작하셨다. 새로운 털실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뜨개질의 시작은 전 해 입었던 뜨개옷을 푸는 것으로 시작됐다. 형제가 넷이나 되니 물려 입을 옷은 물려 입고 작아진 옷들만 풀어도 되었지만 엄마는 뜨개옷을 죄다 풀어제꼈다. 한 철 동안 마르고 닳도록 입고 다녔으니 털이 뭉치기도, 더러운 것이 묻었기도, 디자인이 질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뜨개옷 푸는 날이면 방 안으로 비스듬히 쏟아지는 햇살 속에 수많은 털들이 봄철 아지랑이처럼 올올이 폴폴 날아다녔다. 색색의 실들은 전쟁놀이용 눈뭉치처럼 단단히 감겨 바구니에 쌓였다.


  그다음은 미리 구상해 놓은 밑그림대로 실 색깔을 골라 합치기도 하면서 옷을 짜 나갔는데 설계도 없는 머릿속 디자인이었다. 종이에는 밑단 시작을 몇 코로 잡을 것인지, 겨드랑이와 목부분은 몇 코씩 줄여 나갈 것인지, 꽈배기 무늬와 벌집 모양, 격자무늬는 몇 코를 잡아 대칭을 맞출지 등에 관한 수치들만 메모돼 있었다. 그런데도 한 번 뜨개바늘을 잡고 뜨개질을 시작하면 마치 공장기계에 ‘ON 버튼’이 켜진 것처럼, 미싱은 잘도 돌아가는 것처럼 사나흘이면 뚝딱 옷 하나가 완성이 되었다.


  어린 눈으로 바라본 뜨개질 세계는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은 언제나 대단해 보였으며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목도리와 모자를 떴다. 평뜨기 다음으로 쉬운 한코고무뜨기였다. 장갑과 머리끈도 같은 색으로 맞춰 떴다. 나만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굿즈를 늘려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중학교 이후부터는 간간히 조끼와 스웨터를 짜입었고 선물을 하기도 했다. 뜨개질은 은근 중독성 있는 작업이어서 한 번 잡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뜨개질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나에게 엄마가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거 하면 팔자 사나워진다더라. 그것까지만 하고 더 이상 하지 마라.”였다.


엄마가 짜주셨던 스웨터들. 앞쪽이 나, 뒤에는 언니(좌) 학창시절 내가 떠서 입고 다녔던 조끼와 스웨터(중, 우)


  사나워질 뻔한 필자가 어째 좋아지려는지 대학 갈 무렵부터 뜨개질은 더 이상 하지 않았는데 머리가 커서 바라본 엄마의 뜨개질과 미싱질은 포근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다. 힘들다 내색은 안 하셨지만 그것 모두는 노동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취미로 하는 뜨개질이 아니라 추운 겨울 식구들이 한 철을 입고 버텨내야만 했던 월동준비 품목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엄마는 뜨개질만큼이나 재봉에도 일가견이 있으셨는데 구름판이 있는 재봉틀로 블라우스, 원피스, 캉캉치마 등을 만들어주셨다.

 “엄마, 이번에는 3단 치마로 만들어 주세요” 주문을 하면 주름 잔뜩 잡힌 3단 치마가 반나절 만에 내 눈앞에서 하늘하늘 춤을 췄다.


  일종의 노동으로까지 간주했던 그 뜨개질 말이다. 그 뜨개질을 결혼한 그 해 겨울, 하필 잡게 된 것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당시 나는 꽤나 답답하였었다. 지긋지긋한 직장생활을 접고 결혼을 하면 모든 것이 편안하고 기쁘고 재미있을 줄 알았다 (33살이나 먹었었지만 나름 순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놀고먹는 시간이 몇 개월 지속되다 보니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둘이 벌다 한 사람만 버니 경제적인 타격이 왔다. 시댁 챙기고 살림하는 것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심지어 어떤 날은 남편이 귀가하기 전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벙어리처럼 지내는 날도 있었다. 무기력했다. 열중할 뭔가가 필요했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 중 하나로 떠올린 것이 우습게도 뜨개질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뜨개질이라니!’


  그러나 나름 뜨개질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했다. 소심한 위안이었다. 엄청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은 편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에게는 ‘앞으로 잘 지내십시다’는 바람을, 친정엄마에게는 ‘그동안 길러주신 은혜, 백골난망입니다’하는 감사를, 남편에게는 ‘서로 사랑하며 오래 함께 합시다’는 애정을 담았다. 남는 게 시간이다 보니 하루 종일 뜨개질을 했고 4~5일 만에 옷 하나씩을 떠서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중 두 개의 뜨개옷이 20년 만에 다시 내게로 돌아온 것이다. 155년 전 프랑스 함대에 강탈됐던 외규장각 의궤가 2011년 대한민국 국적기를 타고 돌아온 것처럼. 물론 강탈됐던 뜨개옷이 돌아온 것이 아니니 비유가 적합치는 않지만 오랜 세월  타향살이하다 돌아온 내 심장의 일부를 마주하게 된 듯 감개무량했던 것이다.


  친정엄마의 옷과 남편의 옷이 돌아온 것인데, 엄마의 옷은 몇 해 전 친정 갔을 때 추워하는 딸에게 “네게 더 잘 어울리는구나. 이제 네가 입으렴.” 하며 내어주셨던 것이다. 남편의 옷은 얼마 전 “계속 회사에 걸어놓느니 가지고 왔소. 유니폼을 입기도 하지만 실내 난방이 잘되니 입을 일이 있어야지. 그동안 잘 입었수.” 하며 가지고 온 것이었다. 친정엄마의 옷은 품이 맞지 않으니 입을 일이 없고 남편의 옷 역시 입을 만큼 입었기에 이제 서랍장 깊숙이 들어갈 일만 남은 것이다.


  다시 내게로 돌아온 뜨개옷을 옷 박스에 넣기 전, 세탁하여 며칠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오며 가며 한동안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바라볼 때마다 마음에 바람이 한차례씩 지나갔다. 슬며시 입어보고 그 넉넉하고도 따뜻한 품을 느껴보기도 했다. 심장에서 시작된 미세한 소리의 진폭은 동그란 파장을 그리며 온몸으로 퍼졌고 종내는 저릿한 공명(共鳴)을 느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진 것 하나라도 내어주려 했던 귀한 마음의 언어이구나. 또한 이것은,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려 했던 나의 분투의 역사로구나. 젊은 날의 열정이기도 했구나.


  마음속에 불던 바람이 잦아들었다.

 “이제 네 소임은 다 하였느냐?” 물으니 고개를 힘 없이 끄덕였고, “돌아가서 너도 이제 쉬렴.” 하였더니 못내 아쉬워 답을 피하더니,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너를 꺼내어 보마. 한 번씩 입어보고 쓰다듬어줄게.” 약속하자 그제야 간신히 안녕을 고하는 것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수고했어, 나의 스웨터!”

나는 나의 젊은 날에 뜨거운 안녕을 보냈다.






4 4,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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