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야 할 글이 있다. 그런데 나의 자판은 자꾸 이상하게 흐른다. 좀 더 다른 방향이다. 별 수 있나, 쓰라는 대로 써야지.
내가 쓰는 글은 나의 이야기이자 나를 통과하는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 이야기를 쓰기 위해 나는 통과되어야 한다. 물론 다른 이를 통과할 수도 있다. 그러면 다른 문체로 쓰일 것이고, 그들의 독자에게 읽히게 되겠지.
글 쓰는 일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담겨 있는 이야기가 누구의 몸을 통과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문자의 배열. 그 배열에 어떤 이는 아프고 어떤 이는 밥을 굶으며 어떤 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기껏해야 자판을 두드리는 일, 그리하여 목과 척추와 허리에 무리가 가고 눈이 건조해지며 머리가 빠지는 몹쓸 일에 그 몸들은 그 몸을 바치고야 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이야기에 다칠 것을 두려워하는 누군가에게, 나는 괜찮으니 다른 이를 염려하라 이르면, 너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워진다 한다. 기껏해야 읽고 쓰는 삶이다. 그 이도 나도 시간이 되면 아니 시간을 내어 읽고 쓴다. 그리고 염려한다. 네가 읽고 쓰기 때문에 걱정하고 마음을 쓴다. 긴 이야기가 살을 붙이는 동안 영혼의 군살은 감량이 된다. 이 말이 너무 하고 싶었어서, 이 말을 너무 듣고 싶었어서.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진실로 그리워하고 얼굴을 보지 않았기에 감히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 오직 이야기로 부푼 글만이 있다. 우리 사이에 글 말고 시간과 거리도 있으나, 우리는 살아오면서 알게 되지 않았던가. 그런 것은 때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접으라, 미로로 가득한 지도를, 당신의 가련한 과거를, 흔적이 남은 기억을, 낡은 두려움을, 소비된 적 있었던 감정을, 웃음으로 범벅이 된 표정을. 이 모든 것을 접기 위해 우리는 글을 쓰고 있다. 잊은 척하며 잊어왔던 행위를 소중히 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이른 봄밤의 귀뚜라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척, 문장이 내쉬는 숨을 들이마신 적이 없었던 척했던 모든 밤은 지나갔다. 그 밤들을 전생처럼 잊고 글을 쓴다. 재미가 없는 글이다.
늘 그랬듯 이상한 일은 일어난다.(실은 이상하지 않은 일들이 거의 없다) 재미가 없어도 사람들은 읽고 라이킷을 누른다. like it. 아, 읽지 않고 눌렀으려나.라이킷은 어느새 한도를 초과한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반짝이는 눈으로 이 글을 읽어내려가는 그 귀한 마음을. 그러나 또 다른 사실 또한 알고 있다. 하트를 누르고 지나가는 손이 눈보다 더 빠르다는 것을.
이로서 확실해졌다. 이 재미없는 글이 벌어들인 라이킷이 이 정도라니, 역시나 적잖이 읽지 않고 누르는군. 얼마나 다행이야, 이 재미없는 글을 읽지 않는 이가 이 정도라니. 한 순간도 진실할 수 없었던 글을 읽지 않았으니, 이로서 세계는 다시 한번 진실에 가까워지는군.
그래서 매일 글을 쓴다 아니 쓸 수 있다. 거창한 거짓말의 곳곳에 미세한 진실을 끼워 넣고 타자라는 일련의 행위를 거쳐 이야기를 출산시킨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라면 1인칭 소설이나 수필, 에세이가 될 것이다. 화자가 너라면 2인칭 소설이나 무언가가 될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 또는 그녀라면 전지적 시점, 이런 말들은 왜 쓸데없이 어려운 뉘앙스를 갖는 거야. 이런 지겨운 이야기는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어쨌든 한다. 고작 이 따위의 분류로 매겨지는 글이 되는 것이다. 글을 쓰고 발행하고 읽히고 라이킷을 벌어들이고 공백을 참아내지못해 글을 쓰고. 이 윤회를 벗어날 방도가 도대체가 없다. 알을 깨고 나가면 되지만 여기서 데미안을 거론하기엔 에어컨이 너무 상쾌하다. 고전은 어쩐지 퀴퀴하다. 하긴, 고전의 필수항목이지 퀴퀴함, 그것 없인 고전으로 라벨링 될 수 없지. (라벨링의 규범 표기는 레이블링이라고 한다. 고전의 퀴퀴함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라벨링이라고 끝까지 고집을 피울 테다)
결국은 이야기, 나의 이야기, 너의 것일지도 모를 이야기, 그의 것인 것만 같은 이야기, 제발 그녀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이야기. '글쓰기'를 눌러 '발행'까지에 걸치는, 그 시간을 관통하는 이야기. 어떤 무의미들이 기화했다가 읽는 이에 닿는 순간 액체가 되어 눈에서 흐르고 고체가 되어 마음을 짓누를 그런 이야기. 결국엔 당신에게 가닿고야 말 이야기.
그러한 연유로, 발행보다 글쓰기 버튼이 뻑뻑한 때가 오면 단 하나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내 뒤에서 곧 나를 찌를 이야기. 그 이야기를 말하는 이의 목소리나 성별, 지위, 직급, 순결, 청렴도, 신성성 이러한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의 내밀한 감정이 거래 성사되는 곳에서 도장만 잘 찍으면 된다. 발행은 늘 도장을 찍고 난 이후이다.
조금은 병신같은 글이 되어 버렸다. 이 것도 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혼자 물은 질문에 사방에서 답이 날아온다. 안 되지, 병신 같잖아. 이보다 더 병신 같은 글들도 많아. 원래 이렇게 병신 같은 글을 쓰려 앉았던 것 아니었어? 딱 만족스럽게 병신 같은 글이야. 모든 대답들이 한결같이 어리석고 개운하다. 답은 그대들에게, 라이킷은 꼭 주길, 여기선 생명수 같은 것이니까, 댓글은 사양하겠어, 생명수에 독을 탈 수도 있으니까.
어쩐지 발행이 조금 두려워졌다. 진짜 병신같다고 생각할 것만 같다. 구독 해지를 누르는 손가락이 보이는 듯도 하다. 어디 아프냐는 연락이 올지도 모르겠다. 이것 보라, 진실은 가까이 할수록 위험하다. 그러나 나는 이마저도 알고 있다. 발행 후에 마주할 어떤 눈은 진실을 끝내 감지할 것이고 어떤 눈은 병신에 집착할 것이고 어떤 눈은 진실이고 뭐고 투명한 하트를 물들이기에 급급할 것을.
(글에 쓰인 모든 '진실'을 '진심'으로 바꾸는 것을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곧 고민을 멈추었다. 나의 진심은 이따금 진실과 꽤나 일치하지 않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진심이 진실이 될 수는 없기에, 진심이라는 것의 가변성을 무시할 수 없기에, 그럼에도 진실은 진실로 위치하고 있어야 하기에, 이 글의 진실은 진실로 남겨두려 한다. 물론 라이킷을 누르는 이들은 이것조차 읽지 않을 테니 상관없을 테다. 그리하여 나의 발행에는 큰 용기가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