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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un 11. 2022

추앙하는 기분이 된다


  추앙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나 역시 남들처럼, 나의 아저씨 작가의 후속작이라는 말에 보기 시작했다. 등장인물이나 스틸컷이나 예고편이나 뭐 하나 끌리는 건 없었지만, 나의 아저씨도 그랬으니 그런 건 으레 그러려니 했다. 작품이 중요하지 딴 게 뭐가 중요해.

  솔직히 나의 아저씨는 진입 장벽이 4회 정도까지는 이어졌는데, 나의 구씨 아저씨 아니 나의 해방 일지는 진입장벽이 2회 만에 낮아졌다. 그것도 한순간에. 물론 '추앙' 때문이다.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넷플릭스를 보다가 멈췄다. 구씨처럼, 남들처럼 초록창에 '추앙'을 쳤다. 내가 아는 그 뜻이 맞았다. 그러고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왼손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 으아아아. 얼굴이 빨개졌다. 뭔가, 분했다. 박해영 작가가 미웠다. 추앙. 추앙, 추앙이라니. 나는 내가 돌보지도 않던, 관심도 없던 내 고양이 새끼를 누군가 몰래 데려가 예쁘게 키우는 걸 본 기분이 들었다. 저거 내 건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추앙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추앙 같은 단어, 평소의 나라면 거들떠도 안 봤을, 문어체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고지식한 단어를 박해영 작가는 이 커플에게 심어 줬다. 그리고 전 국민이 추앙 추앙 거리게 만들었다. 입만 열면 추앙이다. 요즘 사람들은 사랑 안 하고 추앙하고 사는 것 같다.(요즘은 숭앙도 나오고, 추방 일지, 추악일지도 나오는 걸 봤다. 이게 다 그놈의 추앙 때문이다.)

  그 커플이 서로 추앙하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내내 '추앙'을 빼앗긴 기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멋진 단어를 먼저 사용해 버린 박해영 작가를 찾아가 따지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저한테 물어봐 주실 수 있었잖아요, 나 여기서 추앙 쓸 건데 괜찮겠니. 전 어차피 이렇게 유행할지 몰라서 쓰시라고 했을 테니까요.  

  나는 급히 다른 멋진 단어를 찾기 시작했다. 문어체에서만 쓰일 법하지만 실은 우리 관계의 구멍 난 부분, 어긋난 부분을 메꾸어줄 수 있을 법한 그런 단어. 몇몇 예심을 거쳐 그나마 생존한 단어는 '심판'이었다. 법정의 단어들에 곧잘 흥분하던 나였다. 법정에서만(또는 예배당에서만) 들을 단어이면서, 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하는 행위이지 않을까 싶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서 쉽게 심판하고 그것이 오판인지 아닌지 드러나는 순간들의 연속선상에 위태롭게 살고 있다. 선택이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자신의 유전자와 환경이 내리는 심판 들일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심판한다. 사람을, 상황을, 사건을, 행동을, 이론을, 사상을, 역사를, 인류를.

  하아, 뭐하는 짓인가. 고작 단어 몇 개 늘어놓고 한다는 짓이. 망상이 휘황찬란하다. 심판 같은 소리 개나 주자. 난 개를 안 키우는데, 개를 키우는 사람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 건가. 또또 시작이다. 제발 좀 묶어놓고 싶다, 나의 의식의 흐름. 내가 무슨 박해영 작가처럼 영향력 있거나 멋진 작품을 써낼 수 있는, 써내는 사람도 아닌데. 일개 아줌마 주제 무슨 어휘 선택에 밥도 안 먹고 골머리를 싸매고 있냐고.

  그래도 여전히, 추앙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무시할 수 없다. 이 기분을 잊지 않으려 카톡 프로필 글귀도 '推仰'이다.(꼴값을 떤다) 추앙 사건이 나를 관통하며 남긴 것은 꽤나 크다. 이제 나는 꽤나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어휘들을 긁어모을 것이다. 어떻게든 입에, 손에 올려볼 것이다. 문장 안에 녹여볼 것이다. 계속 실패하고 상처받고 낙담할 것이다. 뭐 어떤가, 어차피 대상은 글자이고 단어이다. 실패는 기록되지 않을 것이고 상처는 크지 않을 것이며 낙담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걸 세 글자로 뭐라 한다? 작가병.






데이비드 오어의 재미있는 보고에 따르면,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like)와 '나는 X를 사랑한다(love)'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 보면, 대체로 '좋아한다'가 '사랑한다'보다 더 많다고 한다.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에 비해 세 배나 많다는 것. X의 자리에 '영화', '미국', '맥주' 등등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왜일까?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나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

신형철 평론가(2017.01.06, 한겨레,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책 이야기를 할만한 지인들에게 떠벌리고 다니지만, 신형철 평론가님의 팬이다. 처음 그에 대한 평가들을 접하며 '정확한 문장, 정확한 표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문장이 덜 정확하면 어떻고 또 안 정확한들 어떤가' 싶었다. 덜 정확하고 안 정확해서 더 아름다운 문장들도 많은데.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자주 탄식했다. 패배의 인정이자, 정확한 표현들이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었다. 더불어 이 문장들을 갖기 위해 그가 해온 내면의 싸움(투쟁이라고 쓰려다 너무 심각해지는 것 같아 갈음했다)이 어렴풋이 느껴져서였다.

  특히 위의 인용 부분은 읽고 책을 덮었다. 머리를 싸맸다. 미간을 짚었다. 눈썹을 훑고 마른세수를 했다. 괜스레 베란다로 나갔다. 문장과 표현의 흐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부분 때문이었다. '기분이 된다'.

  나였다면 큰 고민 없이 '기분이 든다'라고 썼을 것이다. '기분'에 맞대응하는 서술어는 '든다'이다. 우리 집 여덟 살짜리도 오늘 밤 그렇게 말했다. 엄마가 화내서 슬픈 기분이 들었어.(미안해) 기분은 드는 거다. 그러나 신형철 평론가는 그렇게 쓰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이를 의식해서, 고민하고 골라 썼을 것이다.(아니라 해도 큰 상관은 없다, 그러나 그럴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다)

  훌륭한 시를 읽을 때 나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 기분이 드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자아가 그 기분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기분이 된다, 그리고 그 주체는 다름 아닌 훌륭한 시이다. 평론가는 순수히 그런 기분이 되었기 때문에, 그 체험을 했기 때문에 '기분이 된다'라고 썼다. 기분이 든다, 라는 평이한 문장, 평이한 서술어로는 잡아낼 수 없는 상태이다. 기분이 경지가 되는 순간이다. 이런 표현과 지점이야말로 '정확함'이었다. 베란다 밖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갑자기 그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휘와 표현, 문장, 요즘의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주제이다. 추앙과 기분이 된다, 이 단어와 표현이 나를 꽁꽁 묶어놓고 있다. 그깟 거 가지고,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에게는 '그깟 거'이지만 나에게는 자못 심각한 사건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심각한 사건에 휘말려 있다. 밥 먹고 아이들을 키우는 외에는 온통 '추앙하는 기분이 된다'. 내 안에서 추앙을 밀어낼 수 있을 만한 매력적인 단어를 찾아내는 것, 그것을 시나 소설, 수필 속에서 정확한 표현으로 세워두는 것, 이 작업을 나름 애써 하고 있다. 물론 결실은 없다. 영원히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골똘해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면 오겠지, 완전히 그런 기분이 '되는' 그런 순간이, 내가 나의 문장을 '추앙'할 수 있는 그런 날이. 그날이 오면 누군가로부터 내 문장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되겠지. 그때까지 그저 추앙해 보련다, 정확한 표현으로 인간을 그려내고 드러내고 살려내는, 마침내 내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는 기분이 되게 하는 모든 단어와 문장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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