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 방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은 다음에 d가 대답하지 않자 이 방은 원래 이러했느냐고 물었다.
원래?
그러니까...... 본래 이러했느냐고.
d는 남자의 발을 올려다보다가 이렇게 답했다.
그래요 진짜 그렇다 당신의 말씀 그대로, 이 방은 본래 이러했습니다.
- 황정은, <dd의 우산>, p. 37-38 -
여기까지 읽고 잠시 책을 덮었다. 그러니까 소설가란, 단어를 이렇게 운용하는 사람들이군. 한껏 기대를 안고, 여기서 기대란, '원래'와 '본래'에 대한 덧붙이는 말이나 어떤 깃든 이야기, 의식, 삶의 태도 이러한 것들이 나열될 거라는 기대인데 그런 것을 안고 계속 읽어 나갔다. 황정은 작가는 나의 기대를 깔끔하게 지웠다. 그저 d의 행동을 좇을 뿐이었다. 그의 건조한 삶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실망했고, 존경했다.
수필적 글쓰기에 좀 더 가까운 나의 글쓰기 흐름이었다면, 내 글쓰기가 '원래'와 '본래'의 운용을 얼마나 의식해왔는지 설명했을 것이다. 내가 '원래'를 사용하는 경우를 (굳이) 예를 들고 '본래'를 남달리 사용하려는 의지에 대해 (필요도 없는) 해명을 했을 것이다.
이는 나의 외국어 학습에서 기인한 습관이다. 중국에서 별생각 없이 모국어적 바탕으로 말하면서 '原來'라고 했다가 지적을 받았다. 친구들이 그럴 땐 '本來'라고 말하는 거라고 알려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원래와 본래의 사용에 꽤나 민감하게 반응했다. 후에 중국어 선생님을 하며 문법적으로 그들의 용법 차이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더더욱 분명하게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역회사에서 일하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actually'와 'originally'를 구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모국어의 바탕과 비슷한 재질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따로 배우지 않고 그렇게 쓰게 되었는데, 무수히 많은 외국 메일을 접하며 자연스레 체득한 언어 사용이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중국어와 영어로 '원래'와 '본래'를 구분해 사용할 만큼 나는 두 단어에 예민하다. 물론 모국어로서의 한국어에 있어 그들이 갖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미묘한 것이어서 그것을 설명하라고 하면 나의 입은 쉽게 출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음... 그러니까... 그걸... 설명을 굳이 해야 해? 너도 알잖아. 원래는 원래 그렇게 쓰는 거고, 본래는, 딱 봐도, 본래. 어? 모르겠어? 원래는 원래, 본래는 본래, 그런 거잖아.
매우 모국어적인 설명이다.(설명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래서 무슨 한국어 선생님이 꿈이고 글을 쓰겠다고 하는 건지. 한심하고 또 한심하다. 에라이, 다 때려치우고 싶다가도, '원래와 본래, 로 글을 쓰자' 하며 이 밤에 잠 안 자고 글을 쓰는 내가 한심한 만큼 대견하기도 한 것이다.
나는 '원래' 쉽게 자기만족하고 행복해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거의 유일하게 글쓰기에 있어 자기 비하가 자주 일어난다. 이래 갖고 무슨 글을 쓴다고, 소설 쓰고 싶다는 말 어디 가서 함부로 하지 마라, 취미로도 글 쓴다고 떠벌리지 말자, 글 잘 쓰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디 너 따위가, 너 나부랭이가 글을 쓴다는 건지. 그러나 쉽게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그 성질(...!)이 어디 가지는 못해서, '그런 글을 못 쓰니 잘 쓰는 이들의 글을 읽으면 되지'하고는 책을 잡고는 행복해하는 것이다. 아, 이런 글들을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살다니, 난 진짜 복이 많아. 김 복덩이지, 암암.
물론 읽으면서 천이백삼십일곱번쯤의 작은 일희일비가 일어나긴 한다. 하아,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쓰는 걸까 - 아 이런 문장을 읽을 수 있다니, 읽고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다니, 이 시대에 감사하자 - 쳇쳇쳇, 뭘 먹고 이런 문장들을 써내는 거야, 쳇쳇쳇 - 이런 글을 읽게 해 준 모든 인연의 노력(이를 테면 어린이집 선생님)으로 읽고 있으니, 이보다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그렇다, 나는 진정 행복한 그리고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적어도 나는, 40년의 인생을 흔들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이것만 해도 행복한데, 그것을 함께 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내 삶을 행복으로 채우는 것과 그것을 함께 하는 사람들. 무엇이 더 필요할까.
행복한 것과 같은 이유로, 황정은 작가의 위 소설에 잠시 나오는 대목으로 오늘 종일 피곤했었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나처럼 이렇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같은, 사치스러운 질문과 대답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왔다. 남자들이 배 위에 오를까 봐 잠을 서서 자고, 사람들의 얼굴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등에 업은 새끼의 뒤통수가 터진지도 모르고 앞으로 밀려나갈 뿐이고, 이런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은 울지도 못하고 얼른 다른 이를 만나 가정을 차린다. '내가 좋아하는 것' 같은 소리 하네. 그들의 인생 앞에서 나의 우울, 수치, 고독, 고통 같은 것은 유치하고 사소하며 한없이 불량스러울 뿐이다. 그런 고상한 질문 같은 건 할 시간도 없이 살았거니와 질문을 가졌다 한들 답을 찾을 여유 같은 게 있을 리가 없고 찾았다 해도 그것을 행하거나 즐길 수가 없다. 죽지 않고 살기에도 너무 빠듯하다. 삶이 주입하는 여러 결정과 노동 속에서 우연히 답을 찾았다 한들, '나'를 위해 그것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죄책감이나 자책 같은 감정 또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손짓과 사회적 시선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혹은 천천히 죽을 뿐이다.
그에 비해 나는 어떤가. 글을 읽고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행할 수 있고 사람들과 그 마음과 행위를 나눈다. 이런 축복이 나에게 '원래'부터 있었던 건지, '본래' 주어진 건지 궁금해진다. 아니, 이렇게 따지는 게 중요할까. 나는 그저, 읽고 쓰는 게 좋다. 그뿐이다. 다른 게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럼에도 이 축복을 그저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즐길 수만은 없다. 자음과 모음의 결합이, 어휘가, 문장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얼마나 무겁고 참혹하고 잔인한지 알기에, 어디 가서 해맑은 표정으로 '글쓰기가 취미예요' 함부로 말하기 힘든 것이다. '글쓰기가 취미예요'를 쉽게 말하던 시절엔, 연이어지는 '무얼 쓰세요'라는 질문에 여러 답을 했었다. 중고등학교 땐 '시요', 20대엔 '기사 작성 연습해요'와 '논문이요', 아이를 낳고는 '에세이요'.
근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가장 많이 쓰는 건 에세이지만, 잠들지 못하게 하는 건 시였고,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소설이었다. 이 것들을 쓴다는 것이 내 삶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삶의 바닥의 요철凹凸, 그 생김을 들여다보고 상처를 드러냈다 다시 보듬고 감정의 끝에 서서 함께 흔들려보는 행위들, 흔히들 '문학'이라고 말하는 이 것들을 생각하고 읽고 쓰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는가, 대면해야 했고 어쩐지 나는 정면으로 그 질문을 바라보기 힘들었다.
나는 저녁밥과 아침을 고민해야 하고 다음 달 여행경비를 짜야 하고 아이 바지와 양말을 기워야 하는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을 미뤄두고 시와 소설과 에세이가 내 안에 무얼 만들고 있는지를 가만히 보고 있다. 또다시 한심해진다. 내가 '본래' 이런 사람인가 싶어지면, 익숙한 자책이 익숙하게 시작되고야 마는 것이다.
자책의 끝은 늘 비슷하다. 그것은 희미하고 어설픈 희망이다. 시와 소설과 에세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안에 어떤 틀을 갖추어가고 있다는 느낌이자 실체이고 방향이자 인식 같은. 그리하여 결국 그것들이 나의 남은 생을 가득 채우고 비틀기도 하며 때론 무너뜨리고 결국에는 완성시킬 것이라는, 그런 진부하고 촌스런 낙관이다.
앞으로도 '원래'와 '본래'의 미묘한 차이를 더듬으며 글을 쓸 것이다. 정확하게 용법적 차이를 설명하지 못해도, 문맥과 문장이 그들을 필요로 할 때 포근하게 불러올 것이다. 황정은 작가가 '원래'와 '본래'를 문장 속에 잘 놓는 바람에, 나는 마치 내가 본래 이런 사람인 것처럼 글 하나 풀어놓았다. 이 것 밖에 되지 않아 아쉽지만, 어쩌랴 지금까지의 나의 생이 이 정도밖에 익지 못한 것을.
앞으로 나의 인생이 글을 성숙시킬지, 글이 나의 인생을 자라게 할지 지켜보려 한다. 뻔하지 뭐, 동반성장이겠지. 동반성장의 끝에 자연스럽게 놓일 문장 속 원래와 본래는 어떤 모습일지 희뿌연 예상을 해본다.
글을 향해 생을 바친 나의 침입이 고요하고 잔잔한 진입이 되길
그리하여 마침내 원래부터 글과 함께했던 사람이 되길.
이러한 희망은 내 안의 글쓰는 이와 비슷한 속도로 자랐다. 어느덧 다 자란 나의 글이 나에게 역사같은 문자를 남긴다,
본래 글쓰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