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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ul 15. 2022

세상의 절반

집, 안일_빨래: 건조기



  커피 속 얼음은 빠른 속도로 녹고 있었다. 카페의 에어컨 바람에 슬슬 추워지고 있었다.

  "요즘 엄마들은 팔자 좋아. 집에서 세탁기가 빨래해줘, 청소기가 청소해줘, 밥솥이 밥해줘, 요새는 뭐? 건조기? 옷도 말려 준다매? 요즘 엄마들이 심심해서 저렇게 카페에 나와 노는 거야."

  "......"

  "좀 있음 설거지도 기계가 해주겠네. 여자들은 애 안 낳음 왜 사는지도 모르겠어."

  "아저씨! 그만 좀 하시죠. 우리요, 청소랑 빨래랑 설거지랑 다 하고 애들 밥도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나왔어요. 그리고 빨래들이 스스로 세탁기 안으로 들어가요? 빨래 끝나면 건조기 안으로 알아서 걸어 들어가요? 청소기는 혼자 돌아다니면서 청소해요? 다 해놓고 온 거라고요! 아저씨 건조기 돌릴 줄은 알아요? 그거 다 끝나면 정리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아요?"

  "뭐? 이 년이?"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저도 꼰대 할배라고 하려다 아저씨라고 좋게 말해준 거라고요!"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를 일으켜 세웠다. 얼굴이 빨개진 그 중년의 아저씨 옆의 아주머니도 할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그만 좀 해요, 진짜. 나이만 처먹으면 단 줄 알아, 목소리 볼륨을 줄인 친구를 끌고 급하게 카페를 나왔다. 유모차 바퀴가 문턱에 걸렸다. 바깥은 새빨간 여름이 익어가고 있었다.




  "하이고, 이 조용한 아파트가 그 난리였단 말이라, 참내."

  "응응, 그러니까 저기 아파트 창문마다 거의 모든 엄마들이 집에 있다고 보면 돼. 그러다가 아이들이 하교하거나 하원한 후에는 다들 놀이터로 쏟아져 나오는 거지. 대단한 동네야."

  "하이고, 아까워라, 집에만 있는 그 능력들을 어쩔꼬. 너도 아깝고. 뭐.. 애 키울 때야 어쩔 수 없지만, 여자들 애 키운다고 집에 있는 거 진짜 너무너무 아까워."

  나는 조용히 유모차를 밀었다. 어제 온 엄마는 오늘 서울로 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중이었다. 엄마는 어제 오후 아이들이 가득한 놀이터를 보고 '얼라들이 이 동네 다 모였네'라며 놀랐다. 군인아파트의 출산율은, 출산 절벽이라는 단어를 의심하게 하는 수준이다. 점심의 한가하고 조용한 아파트 단지를 보며 엄마는 내내 '아까워, 여자들 능력 너무 아까워'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결혼 전 수강생이 가득했던 나의 중국어 교실반을 떠올렸다. 플루트를 가르치다가 애 키우는 친구를 생각하다가 카페 사장님이었던 애셋 엄마의 부은 얼굴을 그려보았다. 엄마는 '다음에 또 올게'라며 버스정류장 쪽으로 작아졌고, 나는 텅 빈 그네에 앉아 흔들거리다 아이가 울어 집으로 돌아갔다.






  妇女能顶半边天。

  학부 수업 시간 때 이 문장을 보고 쉬지 않고 밑줄을 쳤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문화 대혁명 시기 여성 노동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한 말이라는 교수님의 설명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여성은 세상의 절반을 떠받들 수 있다. 멋진 말이었다. 모택동은 중국 아니 세계 역사상 치명적인 인물이었으나, 그의 정치적 과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말은 내게 참으로 멋진 말이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강의를 나갔다. 멋진 옷을 입고 화장을 멋지게 하고 구두를 신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는 게 자랑스러웠다. 친구들의 집을 가면 친구들 엄마는 그냥 아줌마였는데 우리 엄마는 멋있었다. 나도 엄마처럼 될 거라고 많이 생각했다.

  학부에서 중국어를 배우며 중국에 대해 공부했다. 모택동 혁명과 건국, 문화 대혁명 이후 바뀐 중국의 남녀 의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중국인들은 집안일을 힘든 일이라 여겨서 남자들이 한대, 사회생활을 함께 하고, 집안일은 남자가 하는 거지. 그래서 중국 남자들은 요리도 잘 한대. 여자들은 아이 양육과 교육에 집중하고. 우리랑 비슷한 듯 달라.

  적어도 그때의 내게는 중국인들의 그러한 의식이 멋있게 느껴졌다. 나의 전공이 중국어라는 것에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왜 우리나라 남자들은 집안일이 힘든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 거야, 나 역시 집안일을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세상에 툴툴거렸다.

  학부를 중국어로 마치고 중국 정치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대만 여성 정치에 집중했다. 대만은 근현대사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한(예를 들어 일제 식민 통치 경험과 군부 독재를 겪고 짧은 시간 민주주의 발전과 경제 성장을 이룬) 양상을 보였는데, 여성의 정치 참여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았다. 이상했고 신기해서, 관련 논문을 계속 읽었다(관련 논문은 대부분 중국어와 영어였다, 한국어 논문은 극히 적었다). 대만은 문화 대혁명을 겪지 않았는데도 남녀의 지위에 대한 의식에 있어 우리나라와는 차이를 보였다. 옆에 있는 나라들인데도, 같은 유교 문화와 정신을 바탕으로 함에도 다른 점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마오쩌둥과 리덩후이(李登輝)를 내 안에 쌓으며, 그들을 밥벌이로 삼고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7년이 지났다. 나는 애둘엄마가 되어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카페에서 우리를 향해 독한 말을 쏟아내는 중년의 남자에게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은, 조금은 그에게 동의하고 있었다. 그렇지, 옛날 어르신들에 비하면 우리는 참 쉽게 집안일하고 참 쉽게 애 키우고 있지, 이렇게 커피도 마시면서. 그러나 나의 친구는 달랐다. 빨래가 다 되면 스스로 기어서 나오냐고, 청소기가 혼자서 청소하냐고 소리 높여 반문했다. 나는 또 동의했다. 그렇지, 나 아니면 사실 돌아가는 일이 하나도 없지, 할 일 다 하고 커피 한 잔 마시는 건데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거야.

  언니, 저런 말 듣는 거 진짜 억울하지 않아? 우리가 그냥 놀고먹기만 하냐고! 뼈 빠지게 애 키우고 집안일하는데, 겨우 커피 한 잔 먹는 거 가지고 저런 말을 들어야겠냐고! 언니도 건조기 사버려, 신세계야 신세계. 힘들잖아, 어차피 할 거 손 하나라도 줄여.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집안일, 혼자라도 편하게 해야지 안 그럼 억울해서 못 살아.

  셋째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겨우 진정한 나는 남편에게 건조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집안일과 육아에 빠져드는 나를 건져 건조하기 위함이었다.


  건조기가 집에 오고 몇 달 후, 남편이 설거지하는 나의 등에 말했다.

  "이등휘가 죽었네."

  나는 '그래'하고는 계속 쌀을 씻었다. 나의 한 시절이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을 공부하고 연구하던 젊은 내가 매일 접하던 이름이었다. 한때 내가 밥벌이로 하고 싶었던 이의 죽음을 들으며 나는 밥을 했다. 그의 시대와, 그와 함께했던 나의 시절을 씻어내 버렸다.

  그 밤, 나는 오랜만에 '妇女能顶半边天'를 검색했다. 여성이 세계의 절반을 떠받들 수 있다니. 나는 60여 년 전의 마오쩌둥에 패배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를 동경하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지고 있었다. 여성은 세계의 절반이라지만, 그들은 집안의 천장을 겨우 떠받들 뿐이지. 어두운 천장을 보며 '패배'를 중국어로 쓰려 했는데, 그마저도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슬펐다.



  얼마 전 대만 친구랑 메신저 수다를 떨다가 문득 친구가 말했다. 언니, 곧 리덩후이 2주기야, 시간이 빨라.

  그렇네,라고 말하고 나는 건조기로 가서 빨래를 꺼냈다. 뜨거운 온도가 내 품에 가득 안겼다. 마오쩌둥과 그가 한 말과 리덩후이도 함께 안겨왔다.

  빨래를 개며, 나는 그새 엄마 나이 두 살을 더 먹었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여자는 세상의 절반을 떠받들 수 있다는 말에, 남다른 동의를 했다. 마오쩌둥 과는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나는 그에게 패배가 아닌 동의를 보냈다.

  세상에 나가 사회적으로 지위를 가져야 '세상의 절반'에 위치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 세상의 절반에 해당하는 존재를 셋이나 키워내고 있다. 그것도, 건강히, 무탈하게. 이 자체로 이미 나는 세상의 절반을 떠받들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어떤 실체적인 소득도, 현상으로서의 인정도 주어지지 않지만 나는 나의 일을 세상의 절반을 떠받드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 위대함 속에서, 나의 능력이 '사회적으로' 발휘되지 못함은 - 조금은 아쉽지만 -, 휘발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나는 세상의 어엿한 절반이라고 스스로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래서 떳떳하게 건조기에 일을 맡긴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꺼내어 건조기에 넣고 돌리고 개고 정리하는 모든 일은 나의 주관이다. 남들이 나의 일을 함부로 말하지 않게 할 것이다. 멋대로 과거와 비교하지 않게 둘 것이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일을 하찮게 보는 순간 세상의 절반은 그 어떤 동의도 얻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절반과 나머지 절반이 모두 동의하여 마침내는 그 누구도 '아까운' 존재가 되지 않도록,

나부터

나의 일에

동의하는 바이다.


  

뜨거운, 동의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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