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한숨으로 시작한다. 더 이상의 불만은 허락되지 않는다. 유튜브 보고 싶은데, 말을 꺼냈다가 아빠한테 눈물 쏙 빼도록 혼난 기억이 강하다. 한숨 한 번 쉬고 건조대로 향한다. 첫째야 이제 이런 정도의 불만 표현을 할 수 있는 나이라지만, 둘째와 셋째는 그렇지 않다. 너무나도 단순한 세계 속을 살고 있는 둘째는 '이리 와서 빨래 널어' 아빠의 말에 '네' 하고는 빨래를 넌다. 그뿐이다. 셋째에게는 놀이이다. 언니들처럼 탁탁 턴다 아니 그냥 흔든다. 아하하하하 신난다. 여기저기 막 걸어둔다. 아하하하하하하 더 신난다. 첫째는 얼추 힘 있게 털어 아빠에게 빨래를 주지만 둘째는 영 시원치 않다. 이렇게요? 이렇게가 맞아요? 더해요? 배고파요. 맥락이라는 게 없다. 빨래를 털다가 배고픈 걸 감지하고 말하는 둘째의 단순한 생각이 부러울 뿐이다.
엄마와 아빠는 도통 내게 일을 시키기 않았다. 4인 가족의 일이랍시고 딱히 시킬 일이 없을뿐더러(엄마가 거의 알아서 했으니까), 엄마는 가끔 '커서 하기 싫어도 할 일인데 뭘 일찍 하노'하면서 거드는 내 손에 한 마디를 얹었다. 그 말을 들은 내 마음은 가벼워져서 개던 양말만 개고 일어나 내 방으로 갔다. 공부를 하는 것이 엄마의 마음에 보답하는 것이었으나 나는 만화책이나 쥐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커서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은 내 방 문을 열기 전에 이미 잊혔다.
내 몸의 절반은 그런 엄마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 나 역시도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자랐다. 절반은 그런 생각이었고, 절반은, 아이들의 손이 오면 일이 더 커지는 게 싫었다. 혼자 하면 10분이면 끝날 일이 아이들이 오면 15분으로 늘었다. 집안일은 혼자 해도 충분히 싫은 일이므로 그 일이 더 늘어나는 건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싫었다. 아동 노동을 착취하지 말자, 내 집안일의 모토였다.
모든 일에 나랑 반대인 남편은 역시나, 아동 노동 착취를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부터 집안일을 도와주고 해야 엄마 아빠가 키워준 보람을 알지. 보람 같은 소리 하네, 마음의 소리는 입 밖의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이리 와서 빨래 널어, 아빠의 한 마디에 세 마리는 쪼르르 건조대로 모였다. 아빠의 말이니까 속도도 빠르게. 첫째는 약간은 도움이 된다 해도 둘째 셋째는 손을 보태지 않는 게 도움이 되는데 굳이 손을 보탠다. 바닥에 빨래를 떨어뜨리고 되는대로 건조대에 걸치고. 슬슬 짜증이라는 게 올라올 타임인데 어째 아빠는 끈기 있게 그들의 서툰 손을 기다린다. 아동 노동 착취를 주장하시는 분답군. 아빠의 말투는 오히려 다정하다. 그렇게 아니라 이렇게, 옳지, 잘했어, 다음에도 이렇게 해야 해~ 그러면 아이들은 '네' 삼중창을 울리며 '재밌다'를 덧붙인다. 이게 아닌데, 하는 내 마음의 진동이 잠잠해지기도 전에 아빠의 아동 노동 교화 시간은 끝난다.
세 자매가 각자의 태블릿으로 달려가기도 전에 아빠는 또 외친다. 이리 와 빨래 개야지. 네에에, 세 자매의 삼중창은 끝나지 않았다. 안 봐도 뻔한 그들의 솜씨에 나는 이미 짜증이 나 있다, 내가 다시 개야 할 그들의 결과물들에. 그런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는 그들에게 배당량을 정해 준다. 큰 언니는 속옷과 양말, 둘째는 수건, 셋째는 가재 수건. 첫째는 아빠에게 배운 지 오래라 그럭저럭(실은 잘) 갠다. 나보다는 할머니들의 재주를 이어받아(얼마나 다행인지) 손재주가 있어 동글동글 잘 갠다.
문제는 역시나 둘째다. 수건 개기는 매번 해도 쉽지가 않다. 수건을 받아 들고는 흠, 흠 고민을 한다. 결국 그녀의 시그니처 문장이 입술을 열고 나온다. 생각이 몰라요. 아빠의 끈기는 다시 발휘된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자 해봐. 이렇게요? 이렇게 맞아요? 와 성공. 내 눈엔 성공 100미터 근처에도 못 갔지만 아빠는 의외의 목소리를 낸다. 옳지, 잘했어, 자, 이거는 더 잘해봐. 아빠의 칭찬에 3센티미터는 자란 둘째의 목소리가 거실의 벽을 통통 두드린다. 엄마 이거 봐봐, 돌돌돌 대충 뭉친 가재 수건을 들고 여기저기 다니다 결국 아무 데나 던져둔 막내는 아직은 열외다.
첫째가 초등학생이 된 3월 이후 아이들은 빨래 널기와 개기에 동참한다.(동참이라고 써도 될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처음 나는 남편에게 괜히 심술을 부렸다. 도움도 안 되는데 뭘 시켜요, 그냥 내가 혼자 하는 게 더 빨라요. 나만큼 남편도 고집이 셌다. 지금부터 일을 해봐야 일이 힘든 거고 그만큼 가치 있는 거라는 걸 알아요. 그건 당신 생각이고, 이 말은 입술 안에서 꺼내지 않았다. 늘 그렇듯 나는 남편의 뜻을 꺽지 못했고 그저 '내 불쌍한 새끼들 아빠 때문에 벌써부터 일해야 하는구나'하며 혼자 속상해했다.
자주 그렇듯 나의 생각은 이번에도 틀린 것 같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곧잘 해냈고 엄마 아빠 도와주기를 즐거워했으며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아빠가 맞았다. 아빠 당직으로 집에 없는 날, 내가 혼자 빨래를 널거나 갤 때면 소리 없이 내 옆으로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엄마 힘들지요, 도와줄게요. 아이들은 그새 꽤나 능숙해져 있었다. 진짜 도움이 되고 있었다.
흠, 아휴, 정말. 첫째의 손놀림에 놀래는 동안 둘째의 고충을 놓치고 있었다. ㅈㅇ아, 수건 개기가 잘 안돼? 네, 생각이 몰라요. 언니가 가르쳐 줄게. 8살 언니의 수건 개기 교육이 시작되었다. 자, 이렇게 접고 손을 여기 대고 이렇게 하면 짜잔, 이번엔 언니랑 같이 해볼까? 할머니들의 재주를 받은 언니와 달리 나의 재주를 받은 둘째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잘 안 돼요.
손재주도 좋고 동생 달래기 재주도 좋은 큰언니가 둘째의 울음을 받아준다. 우리 ㅈㅇ이가 수건이 안 돼서 속상했어요? 우리 ㅈㅇ이 소원이 수건 잘 개는 거야? 언니가 기도해 줄게, 우리 동생 수건 잘 개게 해 주세요. 언니 기도에 감화받은 동생은 울음을 그치고 다시 작업에 집중한다. 이 모든 시간 곁에 있을 수 있음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저들은 알까. 고만고만한 고사리 손들이 수건을 만진다. 펼치고 접고 다시 접기를 반복한다. 다 했다~ 끝! 이제 태블릿 봐도 돼요? 를 말하는 입에 입을 맞춘다. 10분 만이야.
남편은 한편으론 맞았지만 한편으론 틀렸다. 아이들이 지금부터 일을 하면서 배우는 건, 일이 힘든 거고 그만큼 가치 있는 거라는 거 이전에, 집안일을 함께 하며 집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차곡차곡 개고 쌓아가는 것임을.
당직 중인 아빠와의 영상통화를 마치고 나란히 누운 여자 넷 주변에 어둠도 같이 누웠다. 첫째에게 묻는다. 소원이 뭐야? 저는 아이폰을 사는 게 소원이지만, 엄마를 잘 도와주고 싶어요. 오늘처럼 아빠가 없을 때 우리가 많이 도와줘야 엄마가 안 힘드니까. 둘째에게 묻는다. 소원이 뭐야? 말이 없는 둘째는 역시나 대답이 없다. 수건 잘 개는 거야? 네. 단답형을 좋아하는 둘째를 위한 맞춤 질문을 던지자 비로소 목소리를 들려준다. 네 살 막내에게 묻는다. 소원이 뭐야? 음.... 언니!
미안하구나, 너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아, 영원히.
고사리들의 소원이 밤잠 깊이 어두운 곳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생각이 몰라요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